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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기사승인 2021.10.26  00:4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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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 목사와 함께 하는 주제로 읽는 성경 ㊲

‘은혜 받으셨습니까?’, ‘은혜가 넘치는 교회’, ‘하나님의 은혜로’ 등, ‘은혜’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인의 일상적인 신앙생활에서 자주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정작, 은혜가 무엇인지, 은혜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보면, 저마다 대답이 다르고, 시대마다 그 뜻도 변해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은혜’가 무엇인지 함께 알아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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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속의 ‘은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호의, 혹은 친절함을 나타내는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된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부터, 이스라엘의 선택과 구원, 율법의 부여 등은 모두 하나님의 호의의 행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시라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계시하시면서 스스로 규정한 본질입니다. 출애굽기 33장 19절부터 34장 9절까지,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주다.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출 33,19)고 계시하셨습니다. 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본질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은혜는 구체적으로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하며,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고,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출 34,6-7)으로 구체화됩니다. ‘자비’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훔’(rahum), ‘은혜’로 번역된 ‘한눈’(hannun)은 모두 같은 어원에서 온 것이고, ‘불변의 사랑’, ‘친절’로 번역된 명사, ‘헤세드’(hesed)도 구약성경에 245번 사용되는데, 모두 넓은 의미에서 ‘은혜’와 관계된 것입니다.

출애굽기 34장 6절에 표현된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일종의 신앙고백은 그 후, 모세오경, 시편, 예언서 등에 광범위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규정하는 본질로 전승되었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단지 하나님의 태도나 심리적 상태가 아니라, 사람을 구원하고 보호하는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물론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은혜로운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은혜는 우월하고 힘있는 사람과 열등하고 약한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관계가 망가지지 않고, 유지되고, 또 좋게 회복될 수 있을 때에만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자격이 없는, 심지어는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를 파괴한 공동체나 개인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과 구원의 행위입니다. 인간 편에서의 실수나 죄악 때문에 거절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자신의 약속에만 근거해 있기에 은혜인 것이지요.

< 2 >

신약성경이 이해하는 은혜는 ‘주는 데서 드러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분에 넘치는 신적인 호의라고 하겠습니다. 구약성경은 은혜를 ‘헤세드’, ‘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자비와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했는데, 신약성경 저자들은 ‘은총’(charis) 혹은 ‘은혜’(grace)라는 단어를 선호합니다. 공관복음서, 서신서, 사도행전에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 저자들은 은혜(카리스)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의 성향을 서술하는 매우 그리스도교적인 방식의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사도 바울의 구원론과 사도행전, 히브리서와 베드로전서에서도 중요한 용어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은혜는 신적인 도움과 권한의 부여를 의미합니다. 스스로도 어려운 상황에 있지만, 마케도니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물질적으로 도운 것(고후 8,1; 9,14)도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겸손한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베드로전서 저자는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벧전 5,5)고 하는데, 이것은 구약성경 잠언(3,34)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특히 가난하고 박해받는 사람들에게 힘을 줍니다.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힘을 주고, 박해를 견딜 수 있는 힘을 주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행 4,33; 빌 1,7).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죄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는 선고를 받는다(롬 3,24)고 함으로써, 은혜를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바울의 신앙관의 기초이기도 합니다. 은혜는 대가 없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은혜는 사역을 위한 특별한 힘으로 주어집니다. ‘카리스’와 ‘카리스마’는 신약성경에서 모두 사역을 위한 특별한 신적인 능력부여를 언급할 때 사용됩니다. 헬레니즘 문학에서 ‘카리스마’는 이미 ‘선물’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신약성경 저자들은 영적인 선물이라는 개념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를 의도적으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카리스마의 형태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고, 교회를 교화하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돌보심을 매개하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은혜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인사와 축복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이 쓴 편지의 머리글과 마감글에서 인사와 축복으로서 은혜는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여기서 은혜는 평화, 자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 1973년 당시 빌리 그래함 목사 여의도광장 집회에 운집한 사람들. 순복음교회당 건축모습이 보인다. 현재의 빌딩숲은 빈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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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은혜가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354-430)의 신학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능력을 강조했던 펠라기우스(Pelagius, 360-418)와의 논쟁에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주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이 자유의지로 악을 선택했고, 죄는 인간의 타락에 의해 발생했다고 말합니다. 타락한 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타락한 인간의 자유의지는 단독으로 선을 이루거나 구원을 성취할 수 없다. 인간이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오직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입니다.

중세 후기 교회에서 은혜는 신적인 ‘성향’이라기보다는 신적인 ‘유출’이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는 은혜를 성례전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주입되는 어떤 본질이라고 이했습니다. 이렇게 주입된 은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용서로 인도하는 선행을 할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퀴나스는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은혜, 인간의 노력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초자연적인 성격을 가지는 ‘작용은혜’(operative grace)와 인간 본성의 자연적 역량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하는 ‘협력은혜’(cooperative grace), 두 종류로 나누었습니다. 아퀴나스에게 은혜는 인간의 본성을 완전히 파괴하고 새로운 본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인간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킵니다.

그러나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부흥시켰고, ‘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이라는 표현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성향이라는 것이지요. 교회나, 성례전, 혹은 인간적 선행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구원의 시작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선택에 달린 것이지, 사람의 영적인 성향이나 장점들에 달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원은 거듭남의 선물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칼뱅(J. Calvin, 1509-1564)은 은혜를 ‘마술’(magic)로 보는 중세적 신학을 폐기했던 것입니다.

20세기에 와서 은혜를 신학적 성찰의 중심에 다시 세운 인물은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였습니다. 칼 바르트는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역사에 대한 낙관적인 진보론과 인간성에 대하여 심각한 도전을 받고, 로마서에서 종교개혁 정신,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다시 불러냄으로써, 19-20세기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을 정립했습니다.

< 4 >

우리는 지금까지 은혜가 구약과 신약성경, 그리고 신학의 역사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발전해 왔는지 살펴보았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은혜는 선교 초기부터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중심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로서의 구원’이라는 은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오직 은혜로만의 믿음은 유교적 신분사회의 해체, 여성인권신장, 직업귀천의 해소 등에 기여했습니다.

은혜가 다시 한국교회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1960년대와 70년대 산업화와 대부흥운동 시기였습니다. 급격한 산업화와 농어촌사회의 붕괴, 도시노동자의 열악한 삶으로 흔들리는 정체성과 양극화는 신앙의 내면화, 개인화를 강화했습니다. 은혜는 개인적 죄와 용서, 방언과 치유 체험과 동일시되었지요.

교회의 양적 성장과 안정기에 들어서면서, 은혜는 개인적 마음의 평안함, 갈등 없는 공동체 생활의 표현이 되었고, 코미디 수준에 가까운 설교와 목사의 원맨쇼, 감성적 찬양과 통성기도가 은혜로운 예배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은혜란 과연 그런 것일까요? 은혜스런 교회는 아무런 갈등도 없고, 평안하기만 한 공동체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로운 교회는 갈등 없는 교회가 아니라, 있을 수 있는 갈등을 성숙하게 해결해가는 교회이지요. 은혜로운 예배는 한바탕 웃고 끝나는 예배가 아니라, 회개와 거듭남,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예배이지요. 은혜받았다는 것은 만사형통했을 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엄청난 종교적 체험을 했지만, 자기 몸에 가시같은 지병을 평생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치유해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구원하지 못한 것이지요. 그런 바울에게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고후 12,9)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 안에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더욱 더 기쁜 마음으로 자기 약점들을 자랑했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이었습니다(고후 12,10).

그렇습니다. 은혜 받은 삶, 은혜 안에 있는 삶은 고통과 고난 없는 삶, 갈등 없는 삶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은혜 안에 있는 삶은 고통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놓지 않는 삶이지요.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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