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히어로에서 히어러까지(From Hero To Here-er)

기사승인 2021.10.20  00:21:14

공유
default_news_ad1

- 2021 NCCK신학위 <사건과 신학> 9월호 ⑶

#1. 장면 하나

학생운동과 청년운동, 청년학생운동… 쓰기 시작하기 전 취지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 원고 요청하신 분의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이하 KSCF) 총무에게 보낸 것이 분명한데 어디에도 <학생>이란 단어는 없다. <청년>을 <학생>으로 읽어야만 했다. 

#2. 장면 하나에 대한 단상

학생운동이 저물어갈 무렵인 것 같다. 운동 현장에서 학생보다 청년 또는 청년학생이란 단어가 널리 사용되었다. 수가 줄어들기에 묶어 크게 보일 필요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거리에서 시위하고 있는 대학생들도 “청년학생”이라 스스로 말하는 모습을 볼 때면 ‘학생’은 이제 단독으로 쓰일 수 없는 단어가 된 것 같다. KSCF 문서를 작성할 때만큼은 <기독 학생운동, 학생청년운동>이라고 적는다. 학생이라는 단어를 놓고 싶지 않다.

#3. 장면 둘

KSCF 선배 주소 확인하고 한 분 한 분 전화로 ‘신임 총무’로 인사드리고, 여쭙고, 적는다. 대부분 반갑게 응대해주시며, “어려운 일인데 수고가 많아요”라고 해주신다. 드물지만 “아직도 케이(*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KSCF를 줄여 부르는 말. 편집자 주)가 있어요?”라고 물어보실 때가 있다. 반갑다는 의미라고 알아들으면서도 뒷통수를 맞는 기분이다. “네, 선배님, 아직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대답하면 활동 이야기 하시며 격려해주신다.

#4. 장면 둘에 대한 단상

학생운동 규모나 활동이 약화되었지만, 학생운동, 기독학생운동, KSCF 연맹과 지역, 학교에서 운동하셨던 분들에겐 여전히 진행형이었다. 하고 싶은 일도 많았을 삶의 소중한 시기, 사회와 세상을 바꾸는 시간으로 선택하고 실천하셨던 분들이기에 학생운동의 경험은 이후 삶에서도 중요하게 삶의 의미로 자리 잡은 것 같다.  

#5. 장면 둘에서 뻗은 생각

학생운동은 어떻게 흘러왔을까?

1945년 해방이후 60년대까지 대학생, 아니 고등학생까지, 사회적으로 스스로 지식인 지위를  자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전후 사회 복구를 책임지고 어려운 국민들 삶을 돌아보는 역할을 기꺼이 감당하는 활동이 곧 학생운동이었다. 기독학생운동도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이후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이란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고 사회를 복구시키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라 여겼고, 마을 우물파기, 의료 지원, 여름 겨울 교회 수련회를 통해 아이들에게 새로운 지식과 문화를 전하는 일을 담당했다. 드물게 받은 엘리트라는 ‘은혜’를 기꺼이 주변과 나누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의 실천이 기독학생운동의 내용을 이루게 된다.

4·19혁명을 정점으로 국민생활의 어려움은 정치 질서를 바로 세우지 않고는 궁극적으로 극복할 수 없다는 각성이 정치참여로 이어져 학생운동의 주요 내용이 된다.

노동자 현실을 세상에 드러내신 70년 전태일 열사의 죽음 앞에 ‘나에게 대학생 친구 한 명만 있었으면…’ 하셨던 열사의 글귀는 대학생들, 기독학생들에게 민중의 고통과 고난을 대변하는 일로, 민중 속으로 들어가 아픔을 세상에 고발하고 바꾸어나가기 위한 일이 학생운동의 활동 이 된다.

80년 광주에서 전해진 이대로 가다간 결국 민중의 죽음이라는 현실밖에 없다는 절망감은 대학을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한 혁명 기지로, 혁명가를 길러내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운동으로 전환시켰으며, 87년 민주항쟁을 통해 전국적 학생운동조직으로 탄생하게 된다. 기독학생운동도 해방신학, 민중신학, 사회과학 등 많은 지식을 기본으로 대학과 민중 현장을 동일한 변혁의 활동 현장으로 여기게 된다.

90년대 이후 수학능력으로 전환, 대학입시 다변화, 아이엠에프 시대 도래는 무한 경쟁, 스펙 쌓기가 대학 존재 이유가 되었으며, 취업을 위한 중간 거점으로 바뀌었다. 뭔가 끝없이 준비하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학생운동이 열어 놓았던 활동(농활)들은 학점을 받기 위한 스펙의 한 분야가 되었으며, 모든 것은 ‘숫자’로 바뀌어갔다.

#6. 장면 셋

2021년 반값등록금 토론회에서 대학생의 경제적 현실과 등록금 마련을 위한 가족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당사자 목소리와 정책으로 문제해결을 제안하는 단체와 정당, 단계적으로 풀어가자는 정부의 입장까지 한 자리에서 들을 수 있었다. 공부/스펙을 위해 대학에 갔지만 등록금의 벽은 곧 물고 태어난 수저의 벽이었고 넘을 수 없다는 절망으로 느껴진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벽 앞에 멈추지 않고 사회적 해결을 요구하며, 실현을 위해 활동하고 있으며, 다양한 모습으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 7. 장면 셋까지 떠올리면서 올라온 질문과 답

질문: 학생운동, 기독학생운동은 가능할까?’

1940-60년대 사회 복구 책임감으로 출발한 학생운동, 70년대 민중의 아픔을 대변했던 학생운동, 80년대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한 학생운동까지 모두 변화의 주체인 학생으로서 사명을 다 할 것인가가 주요한 질문이었다. 90년대 이후 사회 변화의 주체로서만이 아니라 변화된 내용의 수혜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자각하기 시작하였다. 90년 중반까지 학생운동과 사회 운동가를 만들어내는 역할에 충실했다면 이후 학생운동은 학생들의 이익을 확보해 주어야 할 책임까지 맡게 되었다. 운동의 내용이 정반대로 된 것 같지만 학생 자신의 필요를 자각한 운동이며, 나아가 이전 책임성과 현실적 삶에 대한 이해를 동시에 갖고 있으며, 사회에서 당당하게 받아야 하는 것은 무엇이고 세상에 기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을 멈추지 않고 있다. 

답 : ‘학생운동은 쉰 적이 없다.’

반값 등록금 투쟁의 학생 당사자들을 만나면서, 히브리 민중사를 선택하고 읽고 토론하는 KSCF 학생들을 보면서 잊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학생운동은 학생들이 준비하면서 만들어갔다는 사실을. 기독학생운동 총무로서 놓치고 있던 것이 있었다. 기독학생이 있는 한 기독학생운동은 일어난다는 믿음을.

정상복 KSCF 전 총무님이 하신 말씀을 떠올렸다.

“기독학생운동이 쉬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쉬웠던 적이 없었던 기독학생운동은 쉬었던 적 또한 없다.

도임방주(KSCF 제19대 총무) kncc@kncc.or.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