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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에 대하여

기사승인 2021.10.12  15:5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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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 목사와 함께 하는 주제로 읽는 성경 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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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는 무엇을 의미하고, 왜 받는가? 그리고 세례의 방식은 왜 교회마다 서로 다른가? 온 몸을 물에 담그는 침례와 물을 세 번 머리에 붓는 방식 가운데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 세례의 의미와 방식에 대한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교회마다 다릅니다. 로마 가톨릭과 정교회, 개신교 안의 여러 교파들의 세례에 대한 이해와 세례 방법, 상호인정 여부도 서로 달라, 하나로 정의하기가 어렵습니다. 게다가 세례 문제는 2천년 동안 교회 안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교회분열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세례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 확인도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세례의 유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교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그 유래를 찾는데, 요한은 에세네 파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사해 서북쪽 근처 평원지역이었던 쿰란(Qumran/두 개의 달이라는 뜻을 가진 아랍어에서 유래)에서 금욕적인 생활을 했던 공동체의 정결의식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이 정결의식을 차용했다는 주장입니다.

‘에세네’라는 단어는 시리아어 ‘에세노이’에서 온 단어로 ‘거룩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광야에서 모세의 율법을 충실히 지키면서, 성경을 필사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지요. 세례자 요한이 에세네 파에 속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요한의 세례와 에세네파의 정결의식인 침수가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하는 것입니다.

쿰란 공동체에게 세례는 일종의 입회의식이자 동시에 정결예식이었습니다. 공동체의 규약을 지키기로 헌신한 사람들이 입회할 때 세례를 받은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세례의 의미는 일종의 입회, 혹은 입교 의식의 성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만 쿰란 공동체 안에서는 세례가 정결예식으로서 빈번하게 행해졌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오직 단 한 번 세례를 받는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쿰란 공동체는 정기적으로 침수 예식을 거행하여 자신의 정결과 거룩함을 유지하려고 했던 반면, 그리스도교에서는 단 한 번의 세례로 죄를 용서받았고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때문에, 여러 번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고, 온 유대 지방 사람들과 온 예루살렘 주민들이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며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막 1,4-5)는 마가복음에 의하면, 요한에게 세례는 단지 몸의 정결이 아니라, 죄의 고백과 회개를 통한 용서의 표징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 자신이 세례를 베푸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예수께서 더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세례를 주신다는 소문이 바리새파 사람들의 귀에 들어간 것을 예수께서 아셨다. 사실은, 예수께서 직접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제자들이 준 것이다.’(요 4,1-2)고 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제자들이 세례를 주었다고 하여 세례의 본질적인 의미가 축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도록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위임을 받았고(마 28,19), 주님의 이름으로 구해지고, 주님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세례는 사실 다 같은 의미와 권위를 가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오셨을 때, 요한은 놀라 ‘내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습니까? 하고 말하면서 말렸다고 합니다.(마 3,14).

이 사건을 예수님의 제자들과 요한의 제자들 사이, 혹은 예수님과 요한 사이의 위계적 갈등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 요한의 회개 운동 사이의 유사성과 두 사람 사이의 밀접한 관계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이가 내 뒤에 오십니다. 나는 몸을 굽혀서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막 1, 7-8)라는 요한의 말을 빌려,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세례와 요한의 물세례를 구별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셨을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같이 내려왔다는 것입니다(마 3,16). 성령을 비둘기 모양으로 표상하는 교회의 전통은 바로 이 장면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저는 고등학생 시절 세례를 받았습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저는 제가 세례 받을 때도, 비둘기 같은 성령이 내려오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눈을 질끈 감아도 비둘기는커녕 참새 한 마리도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저의 믿음이 부족해서 그럴 것이다 하고 정당화함으로써 더 이상의 신앙적 회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비둘기 같은 성령이 내려온 이유를 깨닫기까지는 한 참 세월이 지나야 했습니다. 왕을 상징하는 봉황도 아니고, 황제를 상징하는 독수리도 아니라, 하필이면 비둘기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성경에 처음 나타난 비둘기와 관련된 이야기는 홍수 심판 후, 노아가 땅이 말랐는지 확인하기 위해 방주 밖으로 내보낸 비둘기가 금방 딴 올리브 잎을 부리에 물고 돌아온 것입니다(창 8,11). 비둘기는 구원과 생명을 의미한 것이지요. 두 번째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 희생제사로 암송아지, 암염소, 숫양과 함께 비둘기를 바친 것입니다(창 15,9). 아브라함에게 비둘기는 약속의 확인을 위한 희생제물이었는데, 그 후 레위기 법전에 의하면 가난한 사람이 바치는 속죄제물로(레 5,7; 12,6), 신약성경에서는 성령 임재의 표징으로 이해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물 세례를 받으셨을 때, 나타난 비둘기는 성령임재의 표징이자, 속죄제물로 자신을 바치실 예수님의 운명을 앞서 보여준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세례와 함께 성령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속죄를 위해 자기를 희생제물로 삼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만이 아니라, 세례 받는 이들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고전 12,13)고 말했을 때,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은 인종과 계급의 차이를 넘어 모두 한 형제자매임을 의미한 것입니다. 비록 세례의 형태는 다를지라도, 침례건 안수건, 옷을 입고 물에 잠기든, 옷을 벗고 물에 들어가든, 성유를 사용하든 하지 않든, 어떤 형태로 세례를 받았건,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이고, 그리스도의 지체로 인정받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세례를 베푼 지역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과 동시에 세계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 세례의 한 장면 ⓒWirestock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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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의 방식도 역사적으로 다양했습니다. 신약성경 시대는 흐르는 요단 강에서 온 몸을 물에 담는 일종의 침례였고, 침례전통을 지금도 충실하게 지키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주후 약 100년경에 기록된 문헌 ‘디다케’에 의하면, 네 가지 세례 방식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흐르는 물에서 침례 하는 것이고, 둘째는 고여 있는 찬물에서 침례 하는 것, 셋째는 고여 있는 따뜻한 물에서 침례 하는 것, 넷째 방법은 물을 세 번 머리에 붓는 것이었습니다. 침례와 머리에 물을 세 번 붓는 것, 지금까지 유지되고 시행되는 세례 예식이지요.

한국 정교회 예배당에 가면 제단을 바라보고 제단 앞 왼편에 침례탕이 있습니다. 십자가 모양으로 바닥을 깊게 파고 물을 담아, 십자가의 세로대 발치에서 수세자가 들어와 십자가 중앙에서 침례를 받습니다. 사제는 십자가의 가로대 한 쪽에 서서 집례를 하고, 세례 받은 신도는 가로대 다른 편으로 나갑니다. 온 몸을 물에 담금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다는 의미를 훨씬 실제적이고 몸 전체로 경험할 수 있는 예식이 침례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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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를 둘러싼 신학적 논쟁도 성만찬 교리와 마찬가지로 교회 분열의 원인이었습니다. 세례의 의미에 대한 다양한 이해, 유아 세례와 견신례, 재세례 등을 둘러싼 논쟁으로 분열된 교회의 일치를 실현하기 위해 세계교회협의회는 오랜 공동작업 끝에 1982년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세례, 성찬, 직제’(BEM/Baptism, Eucharist, Ministry)라는 문서를 채택했습니다. 이른바 ‘리마 문서’로도 불리는 이 문서는 성공회, 침례교회, 제자교회, 그리스 정교회, 루터교회, 감리교회, 구가톨릭, 동방정교회, 오순절교회, 장로교회, 로마가톨릭, 제칠일안식일교회, 연합교회, 발덴시안 등에서 파송된 120여명의 위원들이 공동작업으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리마 문서에 의하면, 세례는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언약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 생명의 표징이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회심이고 용서함 받음이며, 성령의 선물이며, 그리스도의 몸에 편입되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표징입니다. 그런데 리마 문서의 강조점은 세례의 성례전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고,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친교를 생생하게 경험한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리마 문서를 바탕으로 한 세례와 성만찬 예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일치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에큐메니칼 교제를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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