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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에서 칼빈주의로

기사승인 2021.09.18  16: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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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주의의 전개과정과 성서 ⑴

▲ 칼빈주의자들 ⓒWikipedia

‘칼빈주의’란 용어는 독일 루터교회의 논객 요아킴 베스트팔이 일반적으로 스위스 개혁자들, 특히 칼빈의 신학적이고, 주로 성례전적인 견해를 언급하기 위해 도입했다고 알려졌다. 한번 도입된 그 용어는 독일 루터교회 내에서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독일 내에서 점점 자라나는 개혁교회 신학의 영향에 관한 루터교 진영의 격렬한 동요를 말해준다.

원래 아우구스부르크 평화협약(1555년 9월)은 독일 영토 내에서 공인된 개신교의 특별한 형식을 루터교로 정의했다. 그러나 1563년 선제후 프레데릭 Ⅲ세의 유명한 「하이델베르크 신앙문답」의 채택은 팔라티네 지방에서 특히 분명한 칼빈의 영향력의 확대를 보여준다. 당시 루터파들은 칼빈과 관련된 개신교의 형식을 지지하거나 채택하는 것을 아우구스부르크 평화협약에 대한 공개적인 위반과 지역을 불안하게 하는 일로 간주하며, 칼빈의 이념을 비난하고 평판을 나쁘게 하려고 ‘칼빈주의자’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처럼 보인다. 칼빈은 이것이 개혁신앙에 대한 선제후의 지지를 폄훼하려는 감추어진 시도라고 생각했다.(1)

‘칼빈주의’는 상당히 다른 두 의미를 가지고 있는 애매한 용어이다. 첫째, 칼빈 또는 그의 저술들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은 이념들과 공동체들(예컨대 개혁교회), 그리고 개인들(예컨대 테오도르 베자, 프란시스 튜레틴)을 가리킨다. 둘째, 칼빈 자신의 사상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다. 첫 번째 의미가 훨씬 더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이 용어가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왜냐하면 16세기 후반의 개혁교회 신학이 칼빈 이외의 다른 출처들에도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칼빈주의는 베자(1519-1605)와 튜레틴(1623-1687) 같은 칼빈의 후계자들에 의해서 미묘하게 수정이 되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칼빈주의자들’로 간주될 수 없는 개인들에 의해서 큰 변화를 겪었다. 그러한 개인들에는 피에트로 M. 베르미글리(1500-1562)와 지롤라모 잔키(1516-1590)를 거론할 수 있는데, 그들의 이탈리아적 기원이 그들에게 칼빈의 신학방법과 전혀 다른 접근법을 채택하게 하였다. 그들의 이념은 많은 점에서 칼빈의 것과 비슷했지만 그 이념들은 전혀 다른 신학방법의 적용에서 나온 것이다.

후기 칼빈주의는 그들과 칼빈 사이에 있는 미묘한 차이점들을 파악하지 못하고 베르미글리와 잔키의 저작들에 감상적으로 의존한 것처럼 보인다. ‘칼빈주의’는 이렇게 주로 신학 방법과 관련되는 다수의 이질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게 되었다. 그것들은 후대의 사람들이 칼빈주의적인 것으로 지각하지만, 그 기원을 칼빈 자신에게 돌릴 수 없는 것들이다. 이 동화의 과정의 풍성한 함의는 아마도 예정에 관한 후기 칼빈주의의 토론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거기서 베르미글리와 잔키의 영향은 칼빈 자신의 영향을 능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이 ‘칼빈주의’는 모호하고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 용어이다. 한국교회 일부에서 시도되는 것과 같이 도르트 회의(1618-19) 또는 「스위스 일치신조」(1675)가 규정하는 정통주의적 관점에서 그 개념을 엄밀하게 정의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한 정의는 소위 이상적인 칼빈주의자와 역사적으로 자신을 칼빈주의자로 간주하는 사람들 사이를 이간하며 칼빈주의자들의 수를 제한할 것이다. 예컨대, 낭트칙령(1685년 10월)의 폐지 이후에 스위스로 피신한 위그노 목사들은 「스위스 일치신조」의 이른바 칼빈주의적 조항들에 거의 공감하지 않았다.

역사상의 칼빈주의자들은 교리의 엄격한 체계들을 고수하는 완고한 지지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일반적인 사회적 유형을 따르는 개인들이었다. 그들은, 어떤 교리가 칼빈과 그의 후계자들의 신념과 가치에 의해 형성되고 구체화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신학적 뿌리에서 분리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자들이었다. 칼빈은 칼빈주의의 창공에서 가장 중요한 빛이었다. 그렇지만 이념과 방법에서 그를 수정한 다른 빛들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개혁파’ 또는 ‘개혁교회’(Reformed)라는 용어가 ‘칼빈주의자’라는 용어보다 선호되기도 하는데, 그 까닭은 그 말이 칼빈 자신에 대한 배타적인 의존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2)

미주

(미주 1) A. E. McGrath, A life of John Calvin(Cambridge: Blackwell Publishers Inc., 1996), 203.
(미주 2) Ibid., 202-208를 참고.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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