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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와 지식으로 헤아릴 수 없는

기사승인 2021.09.12  14:3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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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으로 뵈옵나이다(욥기 42:2-5)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지난 주일부터 절기상 창조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물음표를 던질 수밖에 없는 시대이고, 현재 제기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겨주기만 합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욥기는 창조주 하나님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욥기는 의로운 사람 욥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됩니다. 욥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소개한 이후에 장면은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로 넘어갑니다. 우리는 흔히 사탄이 욥을 시험하기 위해 고통을 주었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시험 자체보다는 사탄이 하나님께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사탄이 하나님께 던진 질문은 간단합니다. “욥은 왜 하나님을 섬깁니까?” 이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던져질 수 있는 질문입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 복을 받고,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으면 벌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하나님께 한 가지를 제안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그 원인과 결과를 뒤엎어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겨도 고통 받게 만들어 본다면, 사람이 여전히 하나님을 섬길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를 알지 못하는 욥은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끊임없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자신에게는 죄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셨고, 고통을 주셨음을 주장합니다. 욥의 주장은 옳습니다. 사탄이 제안한 내용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욥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하나님께 한 가지를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재판정으로 내려오셔서 자신과 시시비비를 가려보자는 것입니다. 지금 누가 옳은지, 누가 잘못하고 있는지 따져보자고 요구합니다.

욥과 친구들의 대화가 끝난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욥의 요구대로 재판정에 서십니다. 그곳에서 욥과 변론하십니다. 욥기 38-41장까지의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좀 이상합니다. 누가 잘못했는지 따져보자는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주라는 이야기만을 하십니다.

하나님과 욥의 대화는 일반적인 대화가 아니라 하나님과 욥의 논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지한 말로 판단을 어둡게 하는 이가 누구냐?”로 시작됩니다. 우리 성경에는 ‘생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짜(עצה)는 일반적으로 모략, 권고 등으로 번역됩니다. 따라서 생각이라는 단어보다는 뭔가를 판단하고 계획을 세운다는 의미가 더 적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향해 무지한 말로 자신을 변호하고 있다고 얘기하십니다. 그러면서 창조 섭리를 두 장에 걸쳐서 말씀하시는데, 40장 4-5절을 보면 욥이 대답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4절에서 욥은 이상한 이야기를 합니다. “저같이 비천한 존재가 무슨 대답을 하겠습니까? 전 그냥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5절에서 “제가 한 번 말했으니까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 앞에서 욥이 겸손하게 입을 가리는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는 욥이 하나님께 어떤 대답을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내용은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께 뭔가를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이미 제대로 변론을 했기 때문에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고 말합니다. 어찌 보면 상당히 거만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또 두 장에 걸쳐 창조 섭리와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이야기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변론 뒤에 욥이 다시 대답하는 장면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 대답은 하나님을 찬미하는 듯한 표현으로 시작됩니다. “당신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고 당신의 계획은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그 다음 표현은 욥의 신성모독이 정점에 달하는 이야기입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셨던 그 표현을 살짝 바꿔서 하나님께 돌려드립니다. “무지한 말로 판단을 감추는 이가 누굽니까?”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이 부분과 4절의 본문은 잘못된 편집구로 판단합니다. 욥의 회개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부분이 욥기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전한다고 봅니다.

▲ Wlliam Blake, 「The Lord Answering Job out of the Whirlwind」 ⓒWikipedia

욥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변론하시는 이야기가 못마땅합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던 자신이, 죄가 없는 자신이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말해보시라고 요구했는데, 뜬금없는 창조 섭리만 말씀하고 계신 하나님을 욥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흐름 속에서 욥의 말은 “제 대답이 무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답이 무지한 말 같습니다”라는 표현이 됩니다. 그래서 4절에서 욥은 다시 말합니다. “제가 하는 말을 들으시고, 제가 하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셔서, 제가 좀 알게 해보십시오”

우리는 욥이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던진 질문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이 역시도 욥기에는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5절에서 욥은 갑작스럽게 태도를 바꿉니다. “제가 당신을 귀로 들었으나, 이제는 눈으로 당신을 봅니다” 그리고 욥은 회개합니다.

욥기의 전체적인 내용은 논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욥과 친구들의 논쟁, 욥과 하나님의 논쟁입니다. 이 논쟁 속에서 욥은 틀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욥의 친구들도 상당히 그럴싸한 논쟁을 펼쳤습니다. 이 중에서 하나님의 변론이 가장 이상합니다. 욥의 질문에 대한 대답도 아니고 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 고통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궁금증을 해소해주지도 못합니다.

욥기를 계속 읽으면서 하나님의 답변을 가장 이상하게 느낄 수밖에 없던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욥을 비롯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논리적으로 따져 묻습니다. 원인과 결과를 명확하게 제시해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에는 그런 논리가 없습니다. 원인과 결과도 모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세상을 창조하셨는지, 왜 모든 생명을 위해 먹을 것을 마련하시고 그들이 살아가게 하시는지, 왜 베헤못과 리워야단이라는 두려운 생물까지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하시는지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하신다고만 말씀하십니다.

욥기는 하나님의 섭리, 우리를 사랑하시고 아끼시며 지키시는 그 섭리에는 아무 이유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를 아무리 논리적으로 따져 봐도, 원인과 결과를 따져 봐도 그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따져 들어갈 때 하나님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유 없는 사랑을 우리는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욥의 마지막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하나님께서 욥에게 무엇을 하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마지막에 욥은 그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도 알게 됩니다.

욥은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을 자신의 논리와 지식 속에서 판단해왔습니다. 그것을 귀로만 들었다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를 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아끼시고 사랑하시어 이들을 지키시고 키우시는 그 모습 자체를 봅니다. 이제 욥은 눈으로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하고 따져보면서 우리의 길을 정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대해 원인과 결과를 따지며 그것을 간직하려고 할 때, 우리는 그저 오늘도 섭리하고 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힘든 세상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 옆에서 섭리하고 계십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잠시 쉴 수 있는 순간을 허락하시고, 잠시 웃을 수 있는 순간도 주십니다. 내가 깨닫지 못하더라도 나를 돕는 이들을 보내주시고, 늘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이들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리에게 이런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이번 창조절에 우리의 어려움과 힘든 상황에만 매몰되지 않고 여전히 섭리하고 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시길 바랍니다. 여전히 우리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밀고 계신, 우리 옆에서 우리를 지키고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욥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처럼,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되시길 바랍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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