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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과 장자

기사승인 2021.08.20  16: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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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생애에서 잊지 못할 순간들-자전적(自傳的) 고백(告白) ⑷

▲ 오강남 교수가 출간한 <장자>

화엄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다

1971년 박사과정에 입학해서 1976년 학위를 끝냈다.  학위논문 제목은 <Dharmadhātu: A Study of Hua-yen Buddhism>(法界緣起: 華嚴佛敎에 관한 일 硏究)였다. 처음 화엄 철학을 접하면서 이것이 바로 현대 사회에 절실한 사상이라는 것을 감지하고 화엄 사상을 논문 주제로 잡기로 했다. 저명한 물리학자 Fritjof Capra는 그의 베스트셀러 The Tao of Physics(한국어 번역, <현대 물리학과 동양 사상>)와 The Turning Point(<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에서 화엄이야말로 막다른 골목에 이른 데카르트와 뉴톤의 기계론적 세계관을 대체할 사상이라 보았다.  Arnold Toynbee도 화엄은 인간의 지성이 이를 수 있는 최정점이라 했다.

여기서 화엄 철학을 길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요점만 말하면 우주의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고 서로 의존되었다는 것을 체계적으로 논하는 사상이다. 쉽게 말하면, 문이나 창문이 있어야 집이 있을 수 있지만 또 집이 있어야 문이나 창문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또 문이 없으면 창문도 없고 창문이 없으면 문도 있을 수 없다. 이처럼 집이라는 개념 속에 문이나 창문이 들어가 있고 문이라는 개념에는 집이라는 개념이 들어가 있다. 집이 문이고 문이 집이고 창문이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면 종이 한 장에서 구름을 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종이가 있으려면 나무가 있어야 하고 나무가 있으려면 비가 있어야 하고 비가 있으려면 구름이 있어야 한다. 구름 뿐 아니라 햇빛도 땅도, 공기도, 종이를 만드는 사람도, 사람이 먹는 쌀도, 쌀을 생산하는 농부도, 농부가 사용하는 농기구도, 농기구를 만드는 쇠붙이도, 쇠붙이를 캐내는 광부도, 광부의 부모도, 그 부모의 부모도… 결국 종이 한 장에 온 우주가 다 들어가 있는 셈입니다. 종이에 없는 것은 종이 뿐이다. 화엄불교 자체의 용어를 쓰면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일중다(一中多) 다중일(多中一), 상즉(相卽) 상입(相入), 이사무애(理事無礙) 사사무애(事事無碍)라 한다. 이 우주는 ‘인드라망’과 같다고 한다.(화엄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고 싶은 분은 졸저 『불교, 이웃 종교로 읽다』 [현암사, 2006] 참조)

학위 수여식은 물론 감격적인 순간이었지만 그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은 학위 모자를 아내에게 씌워주고 마침 우리 집에 와 계시던 어머님께도 씌워드린 것이다. 두 아들과 우리 부부 어머님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이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독립적으로 연구 생활을 하고 학생들을 가르칠 자격을 얻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학위를 받을 즈음 어느 대학으로 갈까? 북미에서 교수로 채용될 수나 있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가지 가능성을 앞에 두고 있었다. 첫째는 지금까지 그야말로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순탄하게 학업을 마쳤기에 계속 순탄하게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다.

지금까지 대학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별걱정 없이 생활과 학업에 열중할 수 있었고, 특히 같은 과 대학원 80명 중 두 명에게 주는 캐나다 정부의 Canada Council Scholarship라는 최고의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장학금은 학비는 물론 생활비, 학위 논문 조사 연구를 위해 다른 나라고 가도록 본인과 식구들을 위한 여행비, 학위 논문을 타자로 치는 비용, 학위 논문을 인쇄하는 비용까지 그야말로 끝내주는 것이었다. 그 덕택으로 1973년 가을부터 74년 6월까지 식구들과 함께 한국과 일본에 가 있을 수 있었다. 그 사이 둘째 아들이 한국 세브란스 병원에서 태어났다.

다른 한 가지 가능성은 지금까지 순탄하게 항해해 왔으니 파도가 좀 일고, 심지어 태풍을 맞더라고 지금까지 받은 혜택을 생각하고 이를 감내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순탄한 항해가 계속되었다. 학위를 받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 끝난 상태에서, 캐나다 동부에 있는 New Brunswick 주 Monton 대학에서 여름 학기, Ontario 주 북부에 있는 Sudbury 대학에서 가을 학기, 모교인 McMater 대학에서 여름 학기, 정식으로 학위를 받고나서는 미국 Ohio 주 Oxford라는 도시에 있는 Miami 대학에서 가을 학기, 캐나다 Manitoba 대학에서 1년, Alberta 대학에서 2년을 가르친 다음 1980년 캐나다 중부에 있는 Regina 대학(University of Regina)에 정착하고 곧 tenure(정년보장)를 받게 되어 계속해서 26년을 가르치고 2006년 말에 은퇴했다. 리자이나 대학에 재직 중 몇 번의 안식년을 맞아 서울대학, 서강대학, 밴쿠버의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UBC) 등에서도 가르칠 수 있었다.

붕(鵬)새의 비상(飛翔)

리자이나 대학에 정착하면서 가르치는 일과 저술에 전념하게 되었는데, 열 몇 권의 저술 중 특히 두 책에 대한 것이 나에게 특별히 의미가 있어 이를 잊을 수 없는 순간 시리즈에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처음으로 낸 책으로는 학위 끝내고 토론토 교포신문에 <해방과 자유의 종교>라는 제목으로 종교 칼럼을 연재하다가 그것을 모아 낸 책 『길벗들의 대화』 (1983)가 있다. (이 책은 그 후 『열린 종교를 위한 단상』 등 다섯 번 다른 제목의 교정판으로 나오다가 마지막으로 김영사에서 2012년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그 다음 나온 것 역시 교포신문에 연재한 것을 책으로 냈는데, 『도덕경』 풀이(현암사, 1995, 개정판 2010)였다.  이 책이 독자들의 호응을 받게 되자 출판사로부터 『장자』 풀이도 쓰라는 부탁을 받았다. 『장자』는 연재물이 아니라 한꺼번에 쓴 책이다. 일단 풀이를 쓰기 시작하고 나서 완전히 장자에 빠졌다. 그 때의 감흥을 『장자』 풀이 서문 첫머리에 이렇게 밝혔다.

“캐나다에 와 살면서 얼큰한 김치찌개를 먹을 때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지 못하고 한 평생을 마치는 이곳 서양 사람들은 참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처음 『장자』를 접한 이후, 그리고 이곳 캐나다 학생들과 『장자』를 읽을 때마다 이렇게 신나는 책을 읽어 보지 못하고 일생을 마치는 사람은 김치찌개의 맛을 모르고 한평생을 마치는 사람보다 훨씬 더 불쌍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김치찌개가 제가 가장 맛있는 음식이듯이 한마디로 『장자』는 저에게 가장 신나는 책입니다.  이것이 제게는 더할 수 없이 행복한 ‘운명적 해후’인 듯합니다.”

일단 불이 붙으니 그야말로 앉으나 서나 장자 생각뿐이었다. 일주일에 여섯 시간 수업에 들어가는 최소한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불철주야 신들린 듯 오로지 장자하고만 있은 셈이다. 잘 때도 장자를 보다가 책을 베개 밑어 넣어두고 장자와 함께 자고 일어나서도 제일 먼저 장자 책을 꺼내 보고, 학교로 버스 타고 가면서도 장자에 대해 생각하였다.

한 번은 수업에 들어가 내가 지금 장자 귀신이 쓰인 듯한데 너희들 중 혹시 축귀(exorcism)하는 학생이 있냐고 농담을 하니, 짖꿎은 학생 하나가 장자하고 자니 어떻습니까 하는 질문을 했다. 아무튼 장자를 읽고 생각하고 풀이를 쓰면서 2천 몇 백 년 전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늘의 계시를 받았다는 것 이외의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1편 「소요유」에서부터 붕새의 비상을 눈에 보이듯 극적으로 이야기한다.

“북쪽 깊은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살았는데… 그 크기가 몇 천리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었는데, 이름을 붕(鵬)이라 하였습니다. 등의 길이가 몇 천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한번 기운을 모아 힘차게 날아오르면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았습니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여 물결이 흉흉해지면, 남쪽 깊은 바다로 가는데, 그 바다를 예로부터 ‘하늘 못(천지(天池)’이라 하였습니다.”

이 거침없는 비상은 변혁을 이룬 인간이 이를 수 있는 초월과 자유를 상징한다. 장자 전체를 통해 ‘나는 나를 여의었다(吾喪我),’ ‘마음을 굶기다(心齋),’ ‘앉아서 잊어버리다(坐忘),’ 그리고 기막힌 우화들을 통해 나의 의식이 바뀔 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처음 『장자』를 대했을 때의 감격을 나는 “더할 수 없이 행복한 운명적 해후”라고 표현했는데, 실로 나의 삶을 바꾸는 또 하나의 순간이었다.

오강남 명예교수(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soft103@hotmail.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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