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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의 흥망성쇠

기사승인 2021.08.19  16: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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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역사 알기 ㊸

지난 글에서 초기 왕정 시대에 활동하였던 세 사람의 예언자(사무엘, 나단, 아히야)를 살펴보면서 이들이 직간접적으로 실로라는 지역과 연결되어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실로를 중심적으로 「사무엘」과 「열왕기」를 읽어나간다면, 초기 왕정 시대 예언자들의 활동은 실로를 둘러싼 권력 갈등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출애굽 이후 언약궤가 놓여 있었다는 실로, 하지만 엘리 가문의 죄악으로 인해 ‘사무엘’ 시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그 실로가 왜 이렇게 자주 언급되는가의 문제입니다. 특히나 글의 마지막에 조금 더 생각해 보겠지만, 아무리 빠르게 본다 해도 ‘히스기야’ 시대(주전 725-695년)에 기록되기 시작한 이 역사서는 왜 버림받은 실로를 계속 언급하는가의 문제도 있습니다.

지난 글에서는 실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빠진 채, 예언자들의 갈등만을 다뤘기 때문에 조금 부족함을 느끼신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은 분열왕국 시대 예언자들에 대해 다루기 전에 실로가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려고 합니다.

고고학 및 지리적 특징

실로는 1838년 문헌학자 로빈슨(E. Robinson)에 의해 벧엘에서 북동쪽으로 16km 떨어진 키르벳 세일룬(Khirbet Seilun), 현재의 텔 실로(Tel Shiloh)와 같은 지역임이 확인되었습니다. 키르벳 세일룬이 실로라는 점은 로마시대의 유세비우스(Eusebius, 263-339)나 제롬(Jerome, c.342-420)의 글을 통해서도 뒷받침받고 있습니다.

실로는 남서쪽을 제외한 주변이 언덕으로 둘러 쌓여있으며, 낮은 고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물과 목초를 얻기는 좋은 곳이지만, 적군을 방어하기에는 취약한 지리적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 현재의 실로(텔실로) ⓒ위키피디아

이 지역에 대한 발굴 작업은 1926-32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덴마크 발굴단에 의해 시행되었는데, 세 번째 발굴을 진행하던 과정에서 발굴 책임자인 샤에르(Hans Kjær)가 갑작스럽게 사망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임시 보고서만이 작성되었습니다. 이후 1963년, 홀름-닐슨(Sven Holm-Nielson)과 불(Marie-Louise Buhl)에 의해 발굴이 진행되었고, 1981-84년에는 핑켈슈타인(Israel Finkelstein)에 의해서, 2006년에는 스트리플링(Scott Stripling)에 의해 발굴이 진행되었습니다.

이런 발굴 작업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실로가 중기 청동기시대 제2기 중후반부(MBⅡB-C, 주전 1800-1550년)에 상당히 번성한 도시였다는 점입니다. 이 시기 실로는 높이 7.3미터, 폭 5.5미터에 달하는 두터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기 청동기시대 제2기 말에 팔레스타인의 많은 성읍처럼 이집트의 침략에 의해 파괴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후 후기 청동기시대(주전 1550-1200년)에 속하는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는데, 실로는 중기 청동기시대에 파괴된 이후 약 300년간 버려진 땅으로 남겨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 후기 청동기시대 말엽부터 철기시대 제1기(주전 1200-1000년)에 소규모의 인구가 실로로 유입됩니다.

학자들은 철기시대 제1기 말엽으로 추정되는 유적에서 실로가 외부의 공격에 의해 파괴된 흔적을 발견합니다. 1932년 발굴단에 의해 확인된 이 파괴 흔적은 「사무엘상 4장」에 나타난 블레셋과의 전투 흔적으로 발표되었으나, 이후 진행된 발굴 과정에서 이 파괴 흔적을 블레셋 전투와 연결시키기 어렵다는 반론이 제기되기도 하였습니다. 핑켈슈타인은 탄소연대측정법을 통해 이 파괴 흔적이 주전 1050년경에 만들어진 것임을 밝혀내었고, 블레셋 전투 흔적임을 다시 주장하였는데, 이에 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로는 철기시대 제1기 말엽에 파괴된 흔적이 남아있긴 하지만, 재건되어 이스라엘 분열 왕국 시대에 속하는 철기시대 제2기(주전 1000-600년)에 다시 번성한 성읍이 됩니다. 그러다 철기시대 제3기에 속하는 도자기류의 흔적이 급격하게 드물어지는 점을 본다면, 실로는 철기시대 제3기가 시작되는 주전 600년경에 완전히 파괴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철기시대 제1기에 속하는 유물 중에는 제의와 관련된 집기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 실로가 특정 제의를 위한 성읍이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최근의 발굴단은 예루살렘 제1성전 시기에 사용되었던 제단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함께 회막을 세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지대 흔적도 발견하긴 했습니다만, 회막이 어디에 놓여 있었을지에 대해서도 아직 논쟁 중인 것으로 보입니다.

▲ 실로의 제단 ⓒΑΡΧΑΙΟΛΟΓΙΑ(www.archaeology.wiki)

성경에 나타난 실로

성경에서 실로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 49장 10절」입니다. 소위 ‘야곱의 축복’이라고 불리는 본문 중 ‘유다’를 향한 축복문 속에 실로가 등장합니다. 이때의 실로가 지명으로의 실로인지, 다른 의미를 가진 표현이거나 오기(誤記)에 의한 것인지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데, 이에 관해서는 조금 뒤에 다시 살펴보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여호수아 16장 6절」에서 실로는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성읍으로 처음 등장합니다. 이후 「여호수아 18장 1절」은 ‘여호수아’가 실로를 정복하였고, 그곳에 회막을 세웠다고 말합니다. ‘여호수아’는 실로에서 아직 땅을 분배받지 못한 지파들이 제비를 뽑게 하였는데, 성경에서는 이 시점부터 실로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군사주둔지이며 제의를 행하는 곳으로 나타납니다. 제비를 뽑는 행위 자체가 하나님의 의견을 여쭙는 제의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왜 실로를 군사주둔지이며 제의 장소로 택했는지 분명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앞선 고고학적인 발굴 자료를 생각해본다면, 실로는 출애굽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후기 청동기 시대(주전 1550-1200년)에 비어있는 성읍이었기 때문에 정복에 어려움은 없었을 것입니다. 또 주전 1200년 이후 철기시대 제1기에 실로에서 거주 흔적이 나타난다는 점은 출애굽 연대를 추정하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18장」에 나타난 초기 점령 시점 이후 실로는 군사주둔지라기보다 제의 중심지이며 회집 장소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제비뽑기를 마친 각 지파는 각자 자신에게 할당된 지역으로 이동했고, 특정한 일이 있을 때 실로에 모이게 됩니다(수21:2; 22:12). 「사사기 18장 31절」은 실로가 이스라엘의 제의 중심지였다는 점을 다시 확인시켜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사기 19-21장」에 나타난 레위 사람과 첩의 이야기, 그리고 이어지는 베냐민 지파와 나머지 지파간의 전쟁 이야기입니다. 베냐민 지파와의 전쟁은 광야로 도망친 베냐민 지파 남성 600명만을 남긴 채 끝납니다. 이후 이스라엘 지파는 미스바에 모여 자신들의 행동을 반성하며 그들에게 아내를 만들어주기로 결정합니다.

이들은 먼저 길르앗 야베스 사람을 몰살한 후에 그곳에 있던 여성 400명을 실로에 데려옵니다. 그런데 이때 「사사기 21장 12절」은 실로가 이스라엘에 속한 땅이 아닌 가나안 땅이라고 말합니다. 또 「사사기 21장 19-21절」에 나타난 종교 제의를 위해 춤을 추러 나오는 실로의 여성을 납치하여 아내로 삼으라는 이야기는, 실로의 여성이 이스라엘 백성에 속하지 않았음을 의미하고, 더 나아가 실로가 이스라엘에 속한 지역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실로가 철기시대 제1기 이후 제의를 위한 성읍으로 재건되었음은 확실해 보이지만, 이 성읍이 이스라엘에 속한 성읍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개연성 있게 설명해보자면,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시기에 한동안 비어있던 실로 지역을 군사주둔지로 사용하였고, 지파 회집 장소로 사용하였으나, 외부의 침입에 취약한 지리적 특성이나, 정착 후기에 조금 더 넓은 농토를 요구하면서 실로를 버렸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실로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했다고 보았을 때, 실로는 가나안 사람들에 의해 제의를 위한 지역으로 재건됩니다. 학자들은 실로에서 행해진 제의가 다산제의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사기 21장 19-21절」에 나타난 해마다 행해지는 명절과 그때 여성들이 춤을 췄다는 점, 「사무엘상 1장 1-8절」에서 임신하지 못했던 ‘한나’가 매년 ‘엘가나’와 함께 실로에 와서 제사를 드렸다는 점, 「사무엘상 2장 22절」에서 ‘엘리’의 두 아들이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과 동침했다는 점은 이런 주장에 힘을 실어줍니다. 다만 실로가 오직 다산제의만을 위한 성소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출애굽 시기와 사사 시대의 기간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실로는 이스라엘 왕정이 시작되던 시기에는 이스라엘 전체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제의 중심지로 성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시기 실로는 출애굽과 연결된 상징들과 연결됩니다. 언약궤와 ‘아론’의 자손으로 대표되는 상징들입니다.

실로에 관한 전승은 대부분 ‘아론’ 자손, 언약궤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 19장 51절」과 「여호수아 21장 1절」을 보면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이 ‘여호수아’와 함께 실로의 회막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여호수아 22장」은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와 함께 했다고 말하며, 「여호수아 24장 33절」은 ‘엘르아살’의 사후 ‘비느하스’가 그의 뒤를 이은 것처럼 이야기가 마무리 됩니다.

사사 시대로 인해 시기적으로 큰 차이가 있긴 하지만, 「사무엘상 1-4장」은 실로에 제사장 ‘엘리’가 있었고, 그의 아들 중에 ‘비느하스’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유대인들은 부모나 조상의 이름을 물려받는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엘리’는 그의 조상 ‘엘르아살’의 이름에서 따왔고, ‘비느하스’도 그의 조상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타난 족보에서 조상이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흔적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주 예외적으로 조상과 같은 이름인 사람이 나타날 뿐입니다.

실로에 관한 전승이 「여호수아」에서 「열왕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대에 걸쳐서 약간씩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실로에 관한 초기 전승은 ‘엘리’ 또는 ‘엘르아살’이라고 불리는 ‘아론’의 아들과 연결되어 있었고, 그의 아들 ‘비느하스’도 이 전승에서 계속 나타납니다. 그렇기에 「사무엘상 14장」에 나타난 실로의 제사장 ‘아히야’가 ‘엘리’와 ‘비느하스’의 직계로 나타나는 점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실로에 대한 거부

앞서 「창세기 49장 10절」에 나타난 실로에 대해 잠시 언급했습니다. 이 본문에 나타난 ‘실로가 오시기까지’라는 표현은 ‘그가 실로에 올 때까지’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폰 라트(Gerhard von Rad, 1901-1971)는 ‘유다가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실로에 가는 일이 얼마나 획기적인 사건인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폰라트, 『창세기』, 국제성서주석 1, 479)라고 말하며 그 해석의 가능성을 부정하는데, 저는 이런 해석의 가능성도 충분히 열려있다고 봅니다.

유다가 실로에 온다는 말은 유다 지파가 실로를 차지한다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49장 8-12절」의 유다 축복문은 분명 다윗 왕조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가 실로를 차지할 때, 모든 백성이 그에게 복종한다는 말은 초기 왕정 시기 실로가 그만큼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 본문이 더 후기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면, 실로는 북왕국 전역을 차지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지역이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사무엘」과 「열왕기」의 역사가 집단에 의해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실로가 초기 왕정 이전에 그 기능을 상실했고 무너져버렸다는 생각입니다. 그 시점은 일부 고고학자들의 주장처럼 주전 1050년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점은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열왕기상 11장」에 나타난 실로 사람 예언자 ‘아히야’에 의해 부정됩니다. 또 제1성전 시기에 실로에서 지속적으로 제의를 지냈다는 고고학적 발굴 결과에 의해서도 부정됩니다.

실로가 블레셋에 의해 왕정 시대 이전에 무너졌다고 본다면, 「시편 78편 60절」에 나타난 ‘실로의 성막을 떠나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이 시기에 대한 회상이 됩니다. 또 「예레미야 7장」과 「예레미야 26장」에 나타난 실로에 관한 선포는 약 400년 전의 상황을 ‘예레미야’가 선포한 것이 됩니다.

하지만 실로가 철기시대 제2기, 분열왕국 시대에 여전히 번성한 성읍이었다는 고고학적 결과를 바탕으로 살펴본다면, 실로는 왕국 분열 이후에도 북왕국 내에서 제의 중심지로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시편 78편 60절」의 의미는 조금 더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예레미야’의 선포는 40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약 100년 전 북왕국이 아시리아의 속국이 된 이후 실로가 더렵혀졌고, 자신이 예언을 선포하는 그 시기(대략 주전 600년경)에 제 기능을 상실한 실로에 대한 규탄일 수도 있습니다.

「사무엘」과 「열왕기」의 역사가가 북왕국 성소 중 하나인 실로를 모르고 있었기에 왕정 시대 이후 그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못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남왕국 출신의 역사가들은 북왕국 내에서 실로가 가진 영향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실로에 관한 기록을 의도적으로 삭제했다고 봅니다.

실로에 속해있던 종교적 상징들은 모두 남왕국 유다로 가져오면서 실로는 왕정이 시작되기도 전에 기능을 상실했다고 말함으로써 실로가 가진 영향력을 최대한 억제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비아달’을 ‘엘리’의 자손이라고 말하며 실로 집단과 놉의 제사장 집단을 연결시킨 것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보이는데, 실로와 놉은 상당히 먼 거리에 있습니다.

▲ 실로의 위치

일부 학자는 실로의 제사장들이 평소에는 놉에서 생활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위의 지도에 표시하지는 못했지만, 놉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지역으로, 지도상에서 ‘베냐민’의 ‘냐’ 아랫부분 정도에 있습니다. 참고로 「열왕기상 2장 26절」은 놉의 제사장 ‘아비아달’의 고향이 아나돗이라고 말하는데, 아나돗은 위의 지도에서 ‘베냐민’의 ‘민’ 아랫부분에 있습니다. 놉과 아나돗은 약 3km 정도 떨어진 상당히 가까운 거리이기 때문에 이 두 지역을 왕래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로와 놉은 약 30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사무엘’과 같은 순회 제사장, 예언자라면 이 정도 거리를 돌아다니며 제사를 지냈을 수도 있지만, 실로에 속한 제사장들이 굳이 30km 떨어져 있고, 지파도 다른 놉에서 거주했을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특히 분열왕국 이후 놉은 남왕국의 영토였고, 실로는 북왕국의 영토입니다.

폰 라트가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는 실로가 바벨론 포로기 이전 남왕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 실로를 차지하는 일, 혹은 실로의 영향력을 억제하는 일이 그들에게 왜 중요한지 분명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고고학적 증거에 따라 실로는 북왕국이 아시리아의 속국이 된 이후에도 한동안 종교 제의를 위한 성읍으로 존재했으며, 「사무엘」과 「열왕기」에 나타난 바와 같이 왕정 시기 이전에 기능을 상실하지 않았다는 점만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실로에 대한 역사가의 거부는 초기 왕정 시기에 있었던 종교 권력의 갈등 상황을 그린 것이 아니라 북왕국 멸망 이후 남왕국에 유입된 실로 출신의 종교 집단과의 갈등 상황이 표출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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