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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사후관 - 죽음과 죽음 이후 (4)

기사승인 2021.08.09  23:5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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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 목사와 함께 하는 주제로 읽는 성경 ㉗

< 1 >

예수님이 기대했던 것처럼 하늘에서 우주의 심판자가 강림하면서 시작될, 임박한 종말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재림과 종말의 지연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역사와 사후세계에 대한 생각을 자연스럽게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탈묵시론화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신약성경의 가장 긴 어록인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두 권이었습니다. 누가 이전의 마가와 마태복음서는 철저히 묵시론적인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데, 누가복음서는 조금 덜 묵시론적인 가르침으로, 더 후대에 쓰인 요한복음서는 비(非)묵시론적 가르침으로, 요한복음서보다 20년쯤 후에 쓰인 외경인 도마복음서는 반(反)묵시론적으로 점차 변해갔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도 이제 오고 있는 나라, 지상에서 실현될 하나님의 통치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이 죽은 후에 들어갈 수 있는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나라가 된 것이지요.

예수님이 유대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을 때, 대제사장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마가와 누가에서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서는 “당신들은 인자가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막 14,62)라고 하는데, 누가복음서는 재림에 대한 언급 없이, “이제부터 인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게 될 것이오.”(눅 22,29)라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현재와 미래의 단절을 의미한 수평적 이원론이, 이 땅과 저 하늘이라는 수직적 이원론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지금과 그때’가 아니라, ‘아래와 위’가 된 것이지요.

그래서 누가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죽으면 곧장 천국으로 간다고 믿었습니다. 누가의 이런 입장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처형을 당한 죄수에게 하신 말씀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라는 죄수의 말에, 예수님은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눅 23,42-43). 죄수는 죽는 순간 즉시 낙원에 들어갈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미래의 묵시론적 사건이나, 지상에서 이루어질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죽는 즉시 낙원에 들어갈 수 있다는 누가의 관점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최초의 그리스도교 순교자인 스데반의 이야기에서 재확인됩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쳐다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였습니다(행 7,55). 스데반이 신성모독죄를 범했다고 크게 노한 유대교 장로들은 그에게 돌을 던져 즉결 처형합니다. 그 때, 스데반은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주십시오.”라고 부르짖었습니다(행 7,59).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죽으면 영혼(프뉴마)이 천국으로 가서 주님과 함께 거할 것이라는 생각이 이미 초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Jacopo Bassano, 「Lazarus and the Rich Man」 (1545) ⓒWikimediaCommons

< 2 >

죽은 영혼이 사후에 영광을 받기고 하고 고문을 받기도 한다는 상벌 개념이 가장 잘 표현된 것은 누가복음서(눅 16,19-31)에 등장하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산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내려가 불구덩이에서 고문을 받습니다. 그런데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이끌려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다고 합니다. 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골짜기가 천국과 고문의 지옥을 갈라놓고 있고, 누구도 반대편으로 건너갈 수 없습니다.

물론 누가의 이 이야기는 사실 묘사가 아니라, 단순한 비유입니다. 심오한 영적 교훈을 주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이런 교훈이 특정한 사후의 삶 개념에 뿌리를 두었을지는 몰라도, 결국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치는데 목적이 있는 비유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 아야기의 초점은 우리가 살면서 부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누가복음서에서만 유일하게 나오는 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마침내 기독교 사후세계관의 표준교리가 됩니다.

이런 변형은 당시 초대교회를 구성하고 있던 대다수 신자들이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거나, 이교도 출신들이라는 배경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이들은 다가올 심판의 날에 대한 묵시론을 들으며 자란 유대인이 아니라, 육체의 부활보다 영혼의 불멸을 강조하는 세계관을 내세우는 그리스 문화에 물들어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들은 영생을 사후 상과 벌이 이루어지는 세계로 이해한 것입니다.

사후에 상과 벌을 받고, 천국과 지옥으로 분리된 세계에 보내진다는 생각은 그 후, 박해기를 거치면서 더욱 강력해졌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고대 교회 교부들의 사후 세계관과 특별히 중세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 사후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을 소개하겠습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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