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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신비를 깨닫다

기사승인 2021.08.06  16:4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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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생애에서 잊지 못할 순간들-자전적(自傳的) 고백(告白) ⑵

▲ 오강남 명예교수는 독일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Getty Image

온 세상이 함께 합창하다

고등학교 때 3년간 약 10km되는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통학했다. 통학 길에서 학교 부근에 가면 그 당시에는 오른 쪽으로 논이 있었다. 보통 친구 몇이서 같이 자전거를 타고 가지만, 어느 가을 날, 그날따라 혼자서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고 가면서 내 삶의 진로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던 벼이삭들이 춤추며 합창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마치 천사들이 나를 위해, 그리고 나의 미래를 위해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합창하는 듯하였다. 너무나 신기하게 생각하며 계속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

중국 고전 <장자> 제2편 첫머리에서 말하는 ‘땅이 부는 퉁소 소리(地籟)’인가 ‘하늘이 부는 퉁소 소리(天籟)’인가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아무튼 그 웅장한 합창 소리로 하늘이 나와 함께 한다는 생각이 내 속에 자리 잡게 되고 이것은 내 영적 여정을 꼴지우는데 하나의 큰 사건이었음에 틀림없는 일이다. 마치 화엄(華嚴)사상에서 말하는 우주의 모든 것이 서로 어울려 있다는 상즉(相卽) 상입(相入), 사사무애(事事無礙)의 세계를 미리 맛본 것인가?

성서와 신화적 세계관

나의 이종사촌 형이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에 다녔는데, 그 형의 집이 대전이라 서울 우리 집에서 나와 같은 방을 쓰며 학교에 다녔다. 나보다 한 학년이 빨라 그는 대학생이지만 나는 아직 고3이었다. 그런데 그 형의 책꽂이에 재미나는 신학 책이 많았다. 김하태 박사의 책도, 폴 틸리히 책도 처음 접했다. 김하태 박사님의 책에 “종교의 정점(pinnacle)은 신비주의”라는 말은 내 일생을 따라다니는 말이 되었다. 김 박사님과는 미국에서 여러 차례 뵙고, 비록 내가 연세대 출신이 아니지만 나를 특별히 생각하셔서 90회 기념 논총에 특별히 내 글을 싣도록 하라고 부탁하셨다고 한다. 영어로 된 폴 틸리히 책에서는 하얀 것은 종이이고 까만 것은 글자라는 것 이상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나중 틸리히는 내가 가장 영향을 받은 신학자 중 한명이 되었다.

아무튼 그 책꽂이에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이 쓴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라는 얇은 책이 있었다. 60년도 전 일이지만 지금도 그 책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노란 뚜껑에 비닐이 씌어져 있고, 옮긴이는 유동식 교수. (지금은 새로운 번역판이 나와 있다.) 그 책을 읽고 중학교 때부터 그때까지도 성경을 문자대로 읽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없었는데, 이 책을 통해 성경을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 혹은 틸리히 용어대로 ‘탈문자화(deliteralization)’해서 받아들이고 그 의미를 실존주의의 렌즈를 통해 찾아낼 수 있구나.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을 했다. (내가 2001년 연세대학교 교회에 강연하러 갔을 때 유동식 교수를 만나 교수님이 번역해주신 그 책 때문에 제 인생의 진로가 바뀌었다고 말씀드리고 감사함을 표했다.)

그 때 이후 해석학(hermeneutics)이 중요함을 확신했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이를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예수는 없다』라는 책도 결국 기독교 성경과 교리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인 셈이고, 그 후 쓴 <또 다른 예수>라는 <도마복음> 해설서에서도 제1절에 “이 말씀들을 올바로 풀 수 있는 자는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라고 한 구절을 풀이하며, “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종교적 진술에 대해 어떤 ‘해석hermenutics’을 하느냐가 우리의 영적 사활에 직결될 정도로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라는 주를 달았다.

신은 존재할 수 없다

교회학교를 다니고 주위와 가정환경 등의 덕택으로 종교에 대한 관심은 계속되었다. 같은 교회 다니던 형 중에 서울대 국문과에 다니던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을 통해 서울대학교에 종교학과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종교에는 관심이 많았으나 성직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데, 그런 내 입장에 종교학이 적격일 것 같아 종교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1학년에서는 주로 교양과목과 라틴어 공부에 열중하였다. 2학년 때부터 전공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때 쯤 어느 분의 병문안을 위해 그 당시 위생병원이라 불리던 병원 시멘트로 포장된 오르막 길을 오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신은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절대적인 신이 존재한다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절대적이란 말은 아무 것에도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뜻인데, 존재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시간과 공간 안에 있고 그에 따라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기에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나중에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를 알게 되면서 틸리히도 결국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틸리히를 좋아하게 된 것도 이런 ‘전이해’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틸리히는 신이 ‘하나의 존재(a being)’일 수 없고 ‘존재의 근원(Ground of Being)’이라고 했다. 또 신은 “조건지워지지 않은 무엇, the Unconditioned)라고 하기도 했다. 우리가 알고, 우리가 말하는 신이란 ‘신의 상징(symbol of God)’으로 우리는 이런 상징으로서의 ‘신 너머의 신(God beyond God)’을 체득해야 한다고 했다. 물론 틸리히의 이런 생각은 중세 신비주의 사상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신을 Ungrund라고 한 것과 맥이 닿아 있다.

이런 생각은 나중 <도덕경> 제1장에 나오는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진짜 도가 아니다, 도라는 것은 시공을 초월하고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범주에도 속할 수 없다는 것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신이 완전히 없다고 해도 곤란하다. 신인합일(神人合一)이라든가 신이 내 마음 속에 있다고 하는 것도 신이 완전히 없다고 하면 성립되기 곤란한 말이다. 인간의 제한된 논리로 보면 신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이런 어려움을 류영모 선생은 신을 “없이 계신 이”라고 표현했다. 불교에서 말하는 진공묘유(眞空妙有)와 맥을 같이 한다. 서양 철학에서는 신이 절대적으로 초월(超越)이지만 동시에 내 마음 속을 비롯 만물 속에도 내재(內在)한다는 범재신론(汎在神論, panentheism)을 주장하는 사상가들도 많은데 이것도 “없이 계심”이라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노력에서 나온 신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은 그야말로 신비(mystery)다. <도덕경> 제1장에 나오는 말 그대로 “신비 중의 신비요, 모든 신비의 문(玄之又玄. 衆妙之門)이다.’

오강남 명예교수(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soft10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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