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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 들어있는 말, 말, 말

기사승인 2021.08.04  17: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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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 있는 말씀의 권위(마태복음 7:24-29)

말은 말 그 자체로 권위를 갖지 않습니다. 그것이 진실을 드러낼 때, 그것이 삶의 진실과 어울릴 때 권위를 지닙니다. ‘탈진실’의 시대라 일컬어지고, 온갖 가짜 뉴스와 빈말들이 판을 치는 세태 가운데서 다시금 그 의미를 새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말씀대로 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지만 말씀을 듣고도 그대로 행하지 않은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누가복음의 병행본문(6:46~47)은 기초를 잘 다진 집과 그렇지 못한 집을 대조하고 있는데 반해 마태복음의 본문말씀은 위치선정의 차이로 대조하는 것이 다르지만 그 본질적인 의미가 다른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어떤 심정일까요?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은 스스로를 반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대개 말씀에 합당하기보다는 말씀과 괴리된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한 주간 가운데 하루, 그 가운데서도 딱 한 시간 마음을 가다듬고 말씀의 의미를 나누지만 우리의 실제 삶은 언제나 말씀에 합당하기보다는 그에 어긋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배와 그 예배 가운데서 나누는 말씀의 의미가 우리 삶의 중심으로서 몫을 하기보다는 우리 삶의 매우 제한된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는 느낌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한 시간의 예배 가운데서 말씀을 나누는 것이 그 순간의 느낌으로 그칠 뿐 삶의 차원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해줍니다. 아마도 거의 누구에게나 이 말씀은 경종이 될 것입니다. 그 말씀은 너무 분명하여 굳이 어떤 군더더기를 붙여야 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특별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니, 무리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놀랐다고 합니다. 여기서 놀랐다는 것은 그저 생경한 이야기라 생뚱한 반응을 보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감동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그렇게 놀라며 감동했을까요?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라고 오늘 본문말씀은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권위 있게 가르쳤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뜻할까요? 두 가지 차원에서 그 의미를 새겨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권위 있게 가르쳤다는 것은 가르치는 방식 자체가 달랐다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은 그 방식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고 다만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가르쳤다고 말함으로써 그 방식을 짐작하게 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하나하나 되새겨보는 것으로 그 방식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방식이었을까요?

율법학자들은 널리 알려진 자명한 명제들을 되풀이하거나 그에 대해 주석을 하는 방식으로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조문들을 어떻게 하면 지킬 수 있는지 해설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문자적 선언을 되풀이하거나 그 문자적 의미를 해설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곡을 찌르는 방식을 취하셨습니다. 문자로 표명된 율법 조문을 넘어 선 깊이의 차원에서 그 의미를 일깨우는 방식을 취하셨습니다.

예컨대 율법학자들은 안식일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설명했다면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참 뜻이 무엇인지를 일깨웠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안식일에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 가르쳤다면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참뜻은 진정으로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것이라는 진실을 일깨웠습니다. 율법학자들이 가르치는 방식에서 율법학자는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그 청중 역시 일방적으로 전달받는 처지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방식에서 예수님은 끊임없이 청중들을 각성시키며 그 청중은 끊임없이 판단을 해야 하는 입장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 있게 가르쳤다는 것은 그와 같은 차이를 유념한 것입니다.

과연 어떤 방식이 말씀을 따르게 하는 데 효과적일까요? 언뜻 보기에는 주어진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훨씬 쉬어 보입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깨우침과 스스로의 동의 없이 어떤 말을 따라 행하는 것은 사리분별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효과적일지 모르지만, 분별력을 갖춘 사람에게는 결코 효과적일 수 없습니다. 내가 왜 그것을 따라야 하는지에 대해 답을 찾지 못하면 곧바로 회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말씀은 그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우리를 일깨웁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의미에서 권위 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권위를 지닌 것은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의 삶과 일치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삶으로부터 배어나오는 진정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행일치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진실을 예수님 당신의 입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본문말씀 앞에서 5장의 내용을 보면 그 어법은 더욱 분명합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어떤 외적 권위에 근거하지 않고 바로 당신의 말씀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의 삶에 대한 진정성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한 사람들은 그 말씀이 곧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주는 교훈이자 동시에 당신의 언행을 일컫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받을 수 있었고, 권위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태도를 일관되게 견지해 왔습니다. 동시에 언행일치를 계속 강조합니다.

▲ 어떤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 자체가 지헤로움의 표시이다. ⓒGetty Image

그런데 도대체 어떤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 이야기일까요? 본문을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앞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7:21~22).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 다음에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라 합니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소위 말하는 종교적 신실함을 나타내는 예언과 기적을 행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일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두고 한 말이지만 오늘 많은 종교인들,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씀입니다.

소위 종교적 신실함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을 실천해야 한다는 이야기일까요? 그 답은 오늘 본문말씀의 문맥을 헤아리면 찾아집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마태복음 5장부터 계속되는 산상설교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산상설교의 유명한 팔복선언으로 시작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10)

하나님의 의와 평화를 이 땅 한 가운데서 이루는 사람이야말로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룩한 척하면서 행하는 종교적 행위라기보다는 삶 속에서 이뤄야 하는 하나님의 의와 평화의 실천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팔복선언을 통해, 인간이 진정한 삶을 누리며 복을 누리는 길, 온 인류와 피조물들이 지속가능한 삶을 누리는 길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그 팔복선언에서 오늘 본문말씀의 결론에 이르기까지 제시된 여러 가지 교훈들은 그 뜻을 실현하기 위한 구제척인 방도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의미를 새기면서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의 입장과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처지를 동시에 생각합니다. 먼저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합니다. 내 말을 믿고 따르라고 내세우면서 강요하는 권위가 아니라 진실을 깨우치게 하는 말씀의 의미 그 자체로 권위를 지니는 말씀을 과연 어떻게 선포할 수 있을까, 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의 죽은 문자로서 성서 본문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살아 있는 말씀으로서 성서 본문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이 설교자에게는 가장 우선되는 과제이며 본질적인 과제라는 것을 깊이 새깁니다.

다음으로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의 입장을 헤아려 봅니다. 아무리 진실을 깨우치는 말씀이라도 청중이 호응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은 죽은 말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율법학자들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것을 아는 청중이 있기에 예수님의 말씀은 진정으로 권위 있는 말씀이요 살아 있는 말씀이 됩니다. 말씀을 듣고 놀라는 것은 진실에 대한 갈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란 사람들은 진실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한 사람들입니다. 그 갈망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이 아니라 진실한 삶을 살고자 하는 갈망입니다. 그들이 말씀을 듣고 놀랐을 때 그들은 진정으로 진실한 삶을 살고자 동시에 결단하였을 것입니다.

거듭 확인하지만 탈진실의 시대라 일컬어질 만큼 가짜 뉴스와 빈말이 난무하는 오늘의 세태 가운데서 본문말씀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제 내년 상반기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빈말이 난무하는 정치의 계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정치적 과정은 민주주의를 실현해나가는 절차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그 과정은 난무하는 빈말 속에서 진실을 헤아릴 수 있는 지혜로운 유권자들의 현명한 판단을 동반할 때 비로소 의미 있는 과정이 됩니다. 우리가 그 분별력을 지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컨대 노동시간 120시간을 서슴없이 말하는 사람이 노동자의 현실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법조문을 들여다보며 범죄혐의만을 찾던 사람이 사회적 구성원의 삶의 평화를 구현할 정치를 실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말하는 정치적 비전이 과연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진실에 어떻게 가 닿을 수 있겠습니까? 그의 역할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말은 삶의 진실과 괴리되면 권위는커녕 상처를 입히는 칼이 되고 사람을 죽이는 독이 됩니다. 우리가 그 진실을 분별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의 말과 삶이 진실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성을 드러내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이 일깨워주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 하나님의 평화를 실현하는 삶으로 그 진정성을 드러내기를 바랍니다. 진실을 전하고 일깨우며 서로를 받아들이며 힘을 북돋는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헌신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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