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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팬데믹이 되도록 만든 건 인간이었다

기사승인 2021.07.29  22:5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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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대와 동행의 새 길을 그리며 ⑴

▲ 인도 뉴델리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코로나로 잃고 슬퍼하고 있다. ⓒReuters

코로나 바이러스가 보여준 우리들의 실상

1. 이렇게 오래 가리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몇 주 또 몇 달도 아니고, 해를 넘겨 2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도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 속에 여전히 갇혀 있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그 터널 밖의 세상도 여전히 안개 속입니다.

2. 2019년 12월 31일 중국 우한에서 원인 불명의 폐렴 환자 27명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WHO를 통해 전해지면서, 이 재난은 시작되었습니다. 2020년 1월 11에는 우한에서 첫 사망자가 나왔고, 2020년 1월 20일에는 한국에서도 첫 확진자가 발생하였고, 1월 말까지 이미 수십 개국에서 확진자들이 발생하였습니다.

3. 작년 1월 말에 우한 교민 수송계획이 발표되면서, 천안, 진천 등에서 격리수용시설 설치 문제로 지역주민들과의 마찰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 와중에,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된 중국인들이 한국에 몰려와 무료로 치료를 받아서, 건강보험 재정을 악화시킬 것이라는 가짜뉴스가 확산되었고, 1월 23일부터 2월 22일까지 이어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의 “중국인 입국금지 요청”은 76만 명이 넘게 참여하여, 그때까지의 국민청원 중에서 세 번째로 많은 참여자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2월에는 WHO가 신종코로나 감염증 명칭을 ‘Covid-19’ 코로나 19로 결정하자, 국내에서는 감염증의 명칭을 놓고, “우한폐렴”이라는 말을 사용하겠다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사대주의 논쟁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4. 하지만 지난해 2월은 무엇보다도 대구의 신천지 교회를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제1차 대유행이었습니다. 모든 뉴스는 신천지라는 종교집단에 대한 이야기와 그 신천지 집단과의 모종의 연관성이 있음을 계속 상기시키면서 우리들에게 “코호트 격리”라는 말을 처음 알게 해준 대남병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주류 종교와 사회로부터 반사회적이라는 낙인을 짊어지면서도 모여들었던 신천지의 젊은이들, 이름은 요양병원이지만 침상도 없는 병실에 방치된 수용자들처럼 보이던 환자들, 그리고 그들을 통해 바이러스의 운동 경로가 만들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던 위기의 정체와 실상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5. 3월이 왔지만, 학교의 개학은 연기되었고, 마스크를 사기 위해 약국 앞에 길게 줄을 서야 했던 마스크 대란을 경험했습니다. 3월 말에는 정부의 재난 지원금 발표가 있었고, 4월에는 총선이 있었고, 조국 사태로 수세에 몰렸던 여당이 K방역 성공을 내세운 재난 정치를 통해 압승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6. 지난해 5월은 이태원 발 코로나 확산과 미국에서 일어난 백인 경찰에 의한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 사건으로 다시 격발된 BLM 운동으로 기억합니다. 위기에 직면하여 신뢰와 연대의 정신이 정말 필요한 때에, 성적으로 문화적으로 소외된 한 집단을 희생양 삼아 분노의 표적으로 만들려 했던 주류 언론 특히 종교언론들을 바라보면서 교회와 사회 안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병증을 실감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인 경찰의 무릎에 깔린 채, “숨을 쉴 수가 없어요”, “제발, 제발”을 신음처럼 내뱉으며 죽어간 조지 플로이드의 모습을 보면서, 성적 인종적 차별과 배제와 혐오의 문화와 정치가 바이러스 그 자체보다 더 위협적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어야 했습니다. 바이러스는 국경도 넘고 신분의 구별도 넘어서 누구에게나 오지만, 그 바이러스로 인한 영향과 고통은 신천지 신도들과 대남병원에 수용된 노약자들과 함께 성적 인종적 소수자들에게는 전혀 다른 차원을 갖는다는 것도 배워야 했습니다.

7. 그리고 6월 말부터 8월 초순까지 유례가 없는 최장기 장마와 최악의 호우를 경험하였습니다. 팬데믹 상황에서 경험한 장마나 폭염은 분명히 과거와는 다른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지구위의 인간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요구하는 환경의 아우성이 비로소 들리는 듯했습니다.

8. 하지만 ‘코로나19’와 직접 관련된 8월의 사건은, 전광훈과 극우 기독교 집단을 중심으로 진행된 광복절 집회와 관련된 제2차 대유행이었습니다. 극우 집단과 극우 기독교가 표출하는 반사회적 분노와 혐오의 정치 그 자체도 문제지만, 개신교 신자들과 목회자들이 이 운동의 핵심 세력을 이루고 있고 적지 않은 수의 교회들과 교계 지도자들이 심정적으로 동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신학과 신앙실천의 행태에 대해서 깊은 의문은 갖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식민주의, 분단과 냉전, 그리고 산업화의 과정을 통해서, 한국교회가 형성해 온 ‘교회됨’과 ‘신자됨’에 대한 이해와 태도가 바이러스와 만나면서 재난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는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9. 8월에는 광복절 집회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의사들의 파업이 8월 초에 시작되어 9월 초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정부와 의사 단체 사이의 기 싸움을 바라보면서, 공공의료의 확대라는 난제에 관한 견해의 차이 정도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특권화된 이익 집단들이 철옹성처럼 버티고 서서 자폐적인 언어를 무차별 내 쏟고 있는 우리 사회의 실상을 보는 듯했고, 이런 사회에서 공공성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갖게 될지 의심 가득한 마음으로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10. 11월에는 미국 대선이 있었고, 트럼프의 재난정치가 실패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어서 백신 대량 생산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재난의 끝이 멀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백신이 정말로 이 재난의 끝을 말하는 것이라는 확신은 아직도 우리에게 없습니다.

11. 12월 들어서면서 미국과 유럽은 물론이요, 국내에서도 3차 대유행이 본격화되고 있었습니다. 어김없이 요양원, 교도소, 외국인 노동자 시설 등이 집단 감염의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었고, 교회와 교회 관련 시설들도 여전히 굳건하게 집단 감염의 주요 진원지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12. 백신 접종이 현실화되면서, 보수 교회를 중심으로 백신에 대한 가짜뉴스는 더욱 기승을 부렸고, 백신의 생산과 분배가 지구적 빈부격차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음이 드러나면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분명히 알려준, 지상의 모든 인류, 모든 생명들의 상호 연결성과 의존성에 대한 이해가 전혀 호소력을 갖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인류가 이 재난으로부터 공정함과 연대의 가치를 정말 배울 수 있을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3. 코로나19와 함께한 지난 1년 반 정도를 돌아볼 때, 팬데믹 상황과 직접 관련성이 없는 듯이 보이지만, 결코 분리해서 바라볼 수 없는 많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재난 상황에서도 증권과 부동산 시장의 투기열풍은 오히려 더 기승을 부렸습니다. 은행 빚을 포함한 모든 가능한 재원을 다 모아, 말 그대로 ‘영끌’해서, 증권과 부동산에 투자하는 젊은 세대의 투기행렬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팬데믹으로 인한 타격에 더해서, 벼락부자를 꿈꾸거나 적어도 벼락 거지는 안되겠다는 욕망과 투기의 광풍이, 가난한 자들의 삶을 더욱 변방으로 밀어내고 있습니다.

14. 바이러스는 인간이 만든 모든 물리적 정신적 장벽을 무너뜨리고 모두에게 옵니다.  철책선도 국경선도, 인종적 성적 차이나 편견도 바이러스의 운동에 차이를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이러스 확산으로 인한 영향과 피해는 확연한 차이를 나타냅니다.

15. 정말로 영민하게도 바이러스는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곳을 정밀하게 타격해 가면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알면서도 모른 척했고. 또 발전과 집단의 이익이라는 미명 하에 외면해왔던 누군가의 고통을 바이러스가 오히려 가장 정확하게 찾아서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포함한 우리 사회의 제 집단들 내부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던 병증들을 명료하게 증폭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퍼펙트스톰: 재난의 조건

16. 코로나와 함께한 1년의 경험을 되돌아보면, 이 재난은 우리의 행위나 간섭과는 상관없이 바이러스가 스스로 만들어 낸 재난도 아니고 바이러스에 의해서만 만들어진 재난도 아닙니다.

17. 바이러스를 인간의 삶 가까이 불러낸 것도, 그리고 그렇게 해서 다가온 바이러스가 퍼펙트스톰이라 할 만큼 엄청난 재난으로 증폭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한 것도 우리 자신들이고, 우리의 교회이고, 우리의 사회입니다.

18. 그러니까 바이러스만 문제 삼아야 할 것이 아니라, 재난을 만들어낸 우리들의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삶의 조건이 문제 삼아야 합니다.

19. 요양병원, 교도소, 콜센터, 물류창고, 외국인 노동자 숙소, 등등의 문제를 방치해 왔던 것도, 바이러스나 그보다 더한 위험이 있어도 생존을 위해서 그것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존재를 끊임없이 외면해 왔던 것도 우리들이고 우리 사회입니다.

20. 계속 집단 감염의 주요한 진원지가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모이겠다고 나서는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교회에 대한 이해 그리고 교회로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우리가 전혀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문제를 가리고 진실을 호도하면서, 바이러스의 확산을 위한 조건을 우리의 교회와 신학이 만들어 왔던 것입니다.

21. 팬데믹은 특정한 질병의 문제이거나, 특정한 바이러스의 문제가 아닙니다. 과거에도 지금도, 특정한 병원균이나 질병은 그것이 있다고 해도, 그 자체로 에피데믹이 되거나 팬데믹이 되지 않습니다. 그 병원균이나 질병이 팬데믹이 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확산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입니다. 그러므로 팬데믹을 극복한다는 것은,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문제이기 보다는, 우리가 지금까지 만들어 온 바이러스 확산의 조건을 문제 삼는 것이고, 이 조건을 변화시키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22. 지금의 재난은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토지와 자연과 다른 생명들의 아픔, 불평등하고 위험한 노동에 시달리는 가난한 자들의 아픔, 그리고 차별과 배제와 혐오의 희생양이 되어 온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들의 고통이 중첩되어 일어난 일종의 퍼펙트스톰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재난 이후의 새로운 사회, 곧 뉴노멀을 상상하는 길은 그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와 우리의 삶이 오랫동안 타자화해 왔던 사람들과 생명들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자세와 능력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23. 바이러스가 우리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폭로하고 있는 것은, 누군가를 희생양 삼아 살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속여가며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현재의 삶을 정상이라고 간주해 온 우리의 모습입니다. 공감이나 연대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으로부터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거리두기를 함으로써 지켜 온 우리의 삶을 직시하고 문제 삼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우리가 만들어 온 거리두기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삼기가 없다면, 지금 우리가 새 시대를 위해서 말하는 사회적 거리두기, 언택트, 뉴노멀의 미래는 오히려 더 참혹한 재난이 될 것입니다. 

24. 자본주의 성장 이데올로기에 갇혀 발전을 위해서 모든 타자들을 도구화하고 대상화하는 삶을 계속하고, 그래서 타인의 고통과 나의 위기가 불가분리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애써 무시하면서, 타인의 안전 없이 나의 안전은 있을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 만드는 거리두기와 언택트의 미래는 희망이 아니라 절망이 될 것입니다.

양권석 교수(성공회대)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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