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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사후관 - 죽음과 죽음 이후 (2)

기사승인 2021.07.27  16:5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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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 목사와 함께 하는 주제로 읽는 성경 ㉕

< 1 >

‘주제로 읽는 성경’,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하여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죽음 후의 세계가 천당과 지옥으로 구별되고, 착하게 산 사람은 곧바로 천당에 들어가고, 악하게 산 사람은 곧바로 영원한 지옥불의 심판을 받는다는 생각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의식 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이스라엘이 연달아 군사적 재앙과 고난을 겪고,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억압을 받으면서부터라고 여겨집니다.

기원전 6세기부터 예언자들은 멸망한 나라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다시 세워주실 것이라고, 다시 말해 죽음에서 부활하는 국가가 다시 살아나 다윗 왕국을 회복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의 이런 선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 제국에 의해 연달아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국가의 재건과 부활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일부 유대교 사상가들은 이 미래의 부활이 국가가 아닌 개개인의 운명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정의로우시다면, 의로운 자들이 겪은 고난을 보답도 없이 내버려 두실 리 없다고 말입니다.

악한 자가 떵떵거리며 잘 살다가 죽어서 아무 벌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찌 공평한가? 아니, 어찌 하나님이 공평하다고 할 수 있는가? 혹은 의로운 자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다가 고난을 당하고 비참하게 죽는다면 이 또한 어찌 공정하다 할 수 있는가? 분명 우리는 이 필멸의 세상을 떠날 때에 어떤 식으로든 보상이 주어지지 않겠는가?

이런 신정론적 질문에 합당한 설명을 찾기 시작한 유대 사상가들은 사후 세계관을 제시했는데, 그들의 입장이 외경인 ‘에녹 1서’, 정경인 ‘다니엘서’ 등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종말의 때가 오면 하나님이 모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것이고, 죽은 자들은 육체로 되살아나고, 하나님은 신실하게 살아간 자들에게는 상을 내리고, 그들을 괴롭혔던 적들에게는 벌을 내림으로써 자기 백성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신다는 것이지요.

특히 지속되는 환란과 시련은 죽은 자의 육체적 부활이 일어나기 전에 대기 기간이 없이, 죽음 직후의 사후 세계가 있다고 믿게 했습니다. 다시 말해 정의는 언제일지 모를 먼 미래가 아니라 죽음 직후에 이루어진다는 것이지요. 죽으면 곧장 심판을 받는데, 악한 자는 저지른 죄에 대해 벌을 받을 것이고, 사랑으로 가득한 삶을 산 사람, 남을 보살피고 옳은 일을 하며 신을 섬기고자 애쓴 사람은 상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등장한 것입니다. 이런 사고의 변화는 후에 기독교에서 천국과 지옥 신조가 생겨나는 데 핵심적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 2 >

예수님도 당시의 이런 사후 세계관 안에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른 자는 종국에 보상에 받고 죽음에서 되살아나 이 땅의 영광된 왕국에서 영원히 살 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은 절멸하여 그 존재가 깨끗이 지워지는 벌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가까운 시일 내에 닥친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죽으면 천국이나 지옥에 갈 거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와 있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막 9,1)고 말씀하셨는데, 곧 세상의 종말이 닥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할 거라는 뜻이지요. ‘주님의 기도’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으로 오는 나라이지, 우리가 가는 나라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게다가 이 나라에는 믿음 있는 유대인만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인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신 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 아무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시민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 8,10-12).

▲ Hieronymus Bosch, 「Depiction of Hell」 ⓒGetty Image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이 고문당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영원한 불에 대해서도 일언반구 없다는 점입니다. 대신 어두운 장소가 나오는데, 이는 명백히 비유적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 바깥에는 깨닫지 못한 사람들(어두운 데 있는 자들)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들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벌은 완전히 소멸되어, 하나님의 영광된 나라에 들어가 영생을 영위할 구원받은 자들과 달리, 다시는 존재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최종적이고 완전한 멸망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 도끼를 이미 나무뿌리에 갖다 놓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실 것이다.”(마 3,7-10)고 말했습니다. 악한 사람들에게 닥쳐올 징벌, 그것은 지옥 불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찍혀서 불에 던져질’ 거라고 했습니다. 찍혀서 불에 던져진 나무는 어떻게 될까요? 완전히 소진돼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지, 영원히 타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품었던 생각도 비슷했습니다. 죄인들이 맞을 최후는 ‘절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종 이런 ‘절멸’의 이미지를 더욱 경악스럽게 묘사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죄인들이 죽임을 당할 뿐 아니라 제대로 된 땅에 묻히지도 못할 거라고 말합니다. 이는 고대 사회에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악의 운명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심한 것이 기다리고 있는데, 예수님은 죄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불결하고 역겹고 저주받은 곳인, ‘게헨나’라는 골짜기에 버려질 거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미련한 놈’이라고 부른 자는 ‘게헨나’에 던져질 것이라는 예수님의 경고를 기억할 것입니다(마 5,22). ‘게헨나’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예루살렘 외곽에 있는 불경한 골짜기, 몰렉 신에게 인간을 희생 제물로 바쳤던 신성모독적인 장소, 버려진 사체들의 쓰레기장이자 화장터,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곳이었지, 영원한 불 고문을 받는 지하세계, 지옥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후 세계에 대한 생각을 잘 보여주는 또 다른 비유는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사진 5; 양과 염소의 비유). 마태복음서 25장에만 나오는 ‘최후의 심판’ 비유는 모든 민족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 심판의 기준은 가난한 나그네, 병들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느냐, 안 돌보느냐에 있다는 것,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하나님에게 한 것이라는 것,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의인과 저주받은 악인들로 분리된다는 것, 의인은 창세 때부터 의인을 위하여 준비한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겠지만, 악인은 악마와 그 졸개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것, 의인은 영원한 생명으로, 악인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갈 것이라고 합니다.

주목할 것은 예수께서 ‘영원한 고문’과 ‘영원한 상’을, 혹은 ‘영원한 불행’과 ‘영원한 행복’을 대비시키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악한 자가 받을 영원한 벌을 영원한 삶과 대조합니다. 삶의 반대는 고문이나 불행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그런데 죽음이 어떻게 영원한 벌일 수 있단 말일까요? 끝이 없는 벌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는 멸망하며, 다시는 되살아나 생을 살지 못합니다. 그들이 맞는 죽음은 되돌릴 수 없는 죽음이라는 의미에서 영원한 벌인 것입니다.

하지만 염소들이 영원한 불에 들어간다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러나 여기서도 영원한 것은 불이지, 불에 타는 죄인들이 아닙니다. 죄인들은 타서 완전히 소멸되어도 불은 계속 타오르듯, 영영 꺼지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 개개인이 죽는 순간 어떻게 될지에 초점을 두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주로 우주의 심판관(사진 6; 최후의 심판), 즉 인자의 모습으로 강림하실 하나님이 머지않아 행하실 일, 이 세상을 쥐고 흔드는 악의 세력을 멸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실 위대한 행위에 방점을 두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 가며 산 자들은 그 왕국에 들어가겠지만, 반대로 자기만 알고서 죄와 악을 일삼는 삶을 산 자들은 멸망하여 다시는 존재하지 못하게 될 터였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사도 바울의 사후 세계관과 초대교회와 고대 교회 시대의 사후 세계관에 대하여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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