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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외에는

기사승인 2021.07.27  16:4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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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은 서로에게 비춰집니다”(잠언 27:19)

▲ 사람의 마음은 마음으로 읽힌다. ⓒGetty Image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살아갑니다. 수많은 시도들과,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살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 채 살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얻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평안’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평안은, 이미 우리 안에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주어진 이 평안을 날마다 누리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훈련을 받기 위해 광야에서 40년 동안을 지내야 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기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의식주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고,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훈련 받은 것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동일하게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살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잠언 19:23 “주님을 경외하며 살면 생명을 얻는다. 그는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며, 재앙을 만나지 않는다.” 라고 지혜자는 말합니다.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어보면, “야훼를 경외해야 살 길이 열려, 먹고 쉬는 데 아쉬움 없고 재앙을 면한다.”

잠언 23:17-18도 방금 읽어드린 잠언 말씀과 동일하게 고백하고 있는데요.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잠언 23:4-5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잠언 28:26 말씀에도, “자기의 생각만을 신뢰하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지만, 지혜롭게 사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

허무한 것에 주목하지 않고, 자신의 사사로운 생각과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 먼저 물을 때 살 길이 저절로 열려진다고 지혜자는 한 결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이 지혜롭게 사는 것이요, 자신의 삶을 구원하는 길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기 위해 애써 살아가면 됩니다. 삶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살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제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말씀을 반복해서 들려드리는 이유는, 이런 먹고사는 일에 관한 두려움을 몰아낼 때 비로소 가치 있는 무언가를 하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전히 먹고 사는 일에 관한 두려움에 휩싸여 있기에 허무한 것에 주목하고, 사사로운 지혜를 의지하고, 인간관계에 절절매고, 재물을 의지하게 됩니다. 늘 쫓기고, 불안하고,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삶을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겠지.”라는 말 한 마디만 해도 마음에서 올라오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정화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무책임한 표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런 표현 뒤에는 “그러니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지.”라는 결단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일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래! 하나님이 내 삶에 부족함과 필요를 채우신다면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에 대한 이야기를 잠언 말씀들을 통해 이야기 나누고자 합니다.

잠언의 지혜자는 지혜롭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잠언 24:11-12 “너는 죽을 자리로 끌려가는 사람을 건져 주고, 살해될 사람을 돕는 데 인색하지 말아라. 너는 그것이 '내가 알 바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겠지만, 마음을 헤아리시는 주님께서 어찌 너의 마음을 모르시겠느냐? 너의 목숨을 지키시는 주님께서 다 알고 계시지 않겠느냐? 그분은 각 사람의 행실대로 갚으실 것이다.”

그리고 잠언의 또 다른 말씀에는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물을 주어라. 이렇게 하는 것은, 그의 낯을 뜨겁게 하는 것이며, 주님께서 너에게 상으로 갚아 주실 것이다.”(잠언 25:11-12)

예수님도 이와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43-44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계속해서 “46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마지막으로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완전해지는 길, 하나님의 상을 받는 길은 미워했던 사람, 원수 같은 사람, 왠수 같은 사람, 원망을 가졌던 사람, 증오를 가졌던 사람 뿐 아니라 그러한 상황까지 사랑할 때 가능하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이들을 그리고 그런 상황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에 이미 답이 나와 있는데요. 마음을 다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용의를 가지고 사람과 상황을 축복할 때 가능해집니다. 이러한 기도가 지속적이고도 꾸준하게 이루어진다면, 우리의 마음도 상대방의 태도도 상황들도 반드시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잠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입니다. “19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 새번역으로는, “19 사람의 얼굴이 물에 비치듯이, 사람의 마음도 사람을 드러내 보인다.” 마지막으로 공동번역으로는 “19 내 얼굴은 남의 얼굴에, 물에 비치듯 비치고 내 마음도 남의 마음에, 물에 비치듯 비친다.”

내 마음이 상대방의 마음에 비치기 때문에 내 마음에 무엇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내 마음에 사랑이 있으면 상대방의 마음에도 사랑이 올라옵니다. 대신에 내 마음에 분노가 있으면 상대방의 마음에도 분노가 올라옵니다. 이런 경험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숱하게 하며 살아갑니다. 사랑은 잘 몰라도 확실히 화와 분노는 금방 영향을 받게 되지 않습니까? 내가 관여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나 상황이 화와 분노를 일으키고 있으면 서서히 내 마음에도 분노와 화가 올라옴을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랑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입니다. 화와 분노에 더 민감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뿐이지 사랑도 순식간에 나와 상대방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익숙하지 않아서, 감각이 무뎌져서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사랑을 느끼는 감각을 키우고, 유지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랑의 용의를 가지고 기도할 때 감각을 키우고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며칠 전에 간성에 있는 한 카페를 갔습니다. 자리에 앉아서 조용한 가운데 책을 잘 읽고 있었는데요. 남성 두 명이 들어오더니 경상도 사투리를 쓰며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저는 이미 이들을 보며 ‘아, 상태 안 좋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에는 자신들이 있던 자리에서 긴 소파가 있는 카페 중앙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드러누워서 시끄럽게 대화하고 통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신경을 건드렸던 결정적인 부분은 누군가와 통화를 끊더니 여성에 대해 상스러운 욕을 크게 했을 때였습니다.

이미 저의 아내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그들이 굉장히 한심하며, 짜증스러운 존재임을 온 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중이였습니다. 저도 ‘더 이상은 버르장머리 없는 이 녀석들을 그냥 놔둬서는 안 되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가 어떻게 했을까요? ‘안되겠다. 이 녀석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겠다!’ 그리곤 두 손을 모아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앞에 드러누워 있는 두 명의 젊은이가 저보다 덩치가 커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기도만 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만이 제 안에 있는 분노와 불편한 마음을 정화시키고, 상대방의 불쾌한 태도를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저 불쌍한 영혼들을 도와주옵소서.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용서합니다.’ 이 기도문을 마음속에서 사랑의 용의를 끌어올려 고백하기 시작했고, 제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을 때 기도를 그쳤습니다.

제 기도가 그쳤을 때 제 앞에 있던 두 젊은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조용히 있다가 카페를 떠났습니다. ‘에이, 목사님 그게 뭐에요!’라고 말씀하실 수 있겠는데요. 제가 확신할 수 있는 건, 저의 사랑의 기도가 분명히 저와 상대방에게 선한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점입니다.

동물 애호가인 한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애완동물 뿐 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동물들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우연히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우리에 갇힌 곰이 착취당하고, 고통 받는 사진을 보게 됩니다. 너무 끔찍해서 더 자세하게 들여다 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 사진들이었다고 합니다.

‘나는 가슴을 짓누르는 슬픔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 동물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만 정신을 차리고 관심을 가져 달라고 말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포화되어 우리 속에 십 년을 갇혀 산 곰이었다.

나는 이 무자비한 착취 형태에 분노가 치솟고 구역질이 나서 가슴을 치다가 그동안 닦은 수련을 총동원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수치심을 주고 손가락질하는 것으로는 사람을 절대 변화시키지 못하니 말이다. 나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이 기도를 외우고 또 외우자 곰 농장주의 가슴에 사랑과 이해, 동정이 가득 차는 장면이 떠올랐다. 내 기도가 그들의 마음속으로 옮겨 들어가면서 그들이 벼락처럼 깨달음을 얻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 손에 묻은 피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책임임을 깨닫고 고통 속에 무릎을 꿇고 신과 곰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며 애원하는 그들이 보였다. 

네 시간 동안 온전히 나를 바쳐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 또 하나 떠오른 생각은 내가 분통을 터뜨려 봤자 그 곰 농장주들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나의 사랑이었고 그 곰들도 내 사랑을 필요로 했다. 세상은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한다. 사랑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며 이 법칙에는 예외가 없다.’ - <호오포노포노의 비밀>

이 예화가 저와 성도님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사랑 외에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사람과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점입니다. 나를 괴롭게 하는, 내가 미워하는 이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십시오. ‘본때를 보여줘야지!’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재미있게도 까페에서 제 앞에 불쾌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정확하게 책의 이 부분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용의를 내어 기도할 수 있기도 했습니다.

나의 마음이 상대방의 마음에 비춰집니다. ‘마음을 지켜 생명이 흐르게 하는 교회’라는 우리 교회의 표어는 이처럼 저와 성도님들이 마음을 다해 나와 타인을 위해 사랑으로 기도할 때 가능해집니다. 이런 기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우리 자신과 타인과 상황이 은혜롭게 변화되는 경험을 하게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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