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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의 어리석음

기사승인 2021.07.24  16:5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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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농민혁명에 나타난 망국노 민영준과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은 처벌을 받았는가? ⑵

▲ 고종 황제의 어리석은 판단은 결국 일제에게 나라를 넘기는 역사의 과오를 남겼다. ⓒGetty Image

4월30일 일본은 조선 주재 일본공사관의 보고로 ‘조선이 청에 청병한 사실’을 알았다. 5월 1일, 이홍장은 정여창에게 군함 2척을 인천으로 보내라고 지시하였으며 섭지초와 섭지성에게 군사 1,500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가도록 하였다. 5월 2일에 청군은 아산만에 상륙하였다.

숨가쁜 조선의 상황

일본은 5월 2일에 전시에 설치되는 군 통수기관인 대본영을 히로시마에 설치하였고 4일에 청나라의 총리아문과 조선 외아문에 각서를 보내어 ‘조선 파병’을 통보하였다. 그리고 혼성여단을 편성하여 6일에 인천항에 도착하도록 하였다. 5월 3일 미국 함대 볼티모어호는 자국인 보호의 명목으로 인천항에 입항하였다.

전쟁의 기운이 서울을 휩쓸고 사람들이 성안의 백성들이 피난을 떠나기 시작한 5월 3일, 홍계훈의 정부군이 승리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조정대신들은 청군파병을 강행한 민영준을 힐책, 비난하였다. 위기의식을 느낀 그는 원세개에게 청군 상륙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주일 청국 공사 왕봉조가 일본 외무대신 무쓰 무네마쓰에게 이홍장의 ‘출병이유서’를 이미 전달한 뒤였다.

5월 6일 고종은 미국공사 실(John M. B. Sill)과 스커렛 제독을 접견하고 “만일의 사태가 일어날 경우 미국 공사관으로 파천할 것”이니 준비해달라고 요청하여 미국 공사의 승낙을 받아냈다.(1) 또한 원세개에 편지를 보내어 청군의 철수를 요청하였다. 이홍장은 원세개의 전보를 받고 철수 준비를 지시하며 일본에 일본군을 동시에 철수하도록 독촉하게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계속 인천에 상륙하여 16일에는 4,500명이 되었다. 청군과 일본군의 상륙 소식을 들은 김학진 전라감사와 홍계훈은 폐정개혁안이 포함된 농민군의 휴전 제안을 받아들여 7일에 ‘전주화약’을 맺었다. 그 후, 전봉준과 김학진은 서로 협의하여 수령의 도피로 치안과 행정이 마비된 전라도 53개 읍의 관아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치안을 담당케 하였다.

일제의 조선 침탈 야욕

청의 철병 요구를 거절한 일본은 조선에 머물 명목을 만들기 위해 두 나라가 함께 ‘조선 내정 개혁’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청은 일본의 제안을 거절하는 공식회답을 보냈으나 일본 외무대신은 청에게 일본군은 결코 철수하지 않을 것이며 일본 단독으로라도 자신들이 생각하는 바를 할 것이라고 답신을 보냈다.

오토리 게이스케 일본 공사는 고종을 면담하여 ‘조선 내정 개혁’(갑오개혁)을 요구했다. 긴급한 상황 속에서 청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일본이 제의한 ‘양국이 공동으로 조선 내정을 개혁하자’는 요구를 재검토하였고 ‘먼저 양국 군대가 철수한 다음에 조선 내정개혁을 상의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청과 협상 중에 있는 고무라에게 협상 중지를 명함으로서 두 나라는 조선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6월 21일 일본은 병력 2천 명으로 경복궁을 습격했다. 일본군은 장위영과 경성전보총국 점령하였으며 경회루 부근에 주둔하였다. 고종은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따로 격리 되었고 4대문이 봉쇄 되었으며 대신들은 궁 안에 갇혀 협박을 당하였다. 조선의 주권은 이미 일본의 손에 넘어갔다.

일본군은 민영준, 민형식, 민응식, 민치헌, 등 민 씨 척족을 축출하고 대원군과 개화파 인사들을 내세워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였다. 한 편으로 일본군 3천명은 청군을 공격하기 위해 아산 방면으로 신속히 남하하였다.(2) 그리하여 6월 23일 동아시아의 패권을 가르는 청일 전쟁이 한반도에서 일어났고 일본은 성환, 풍도 앞바다, 평양에서 청을 압승하며 승승장구하였다.

조선은 일본의 요구대로 6월 25일 합의체 형식의 입법 및 정책결정 기구인 군국기무처를 설치했고 개화파 인사들이 요직을 차지하였다. 김홍집의 1차 내각은 28일에 종래의 의정부와 6조 체계를 대대적으로 개편하였다. 대개혁으로 왕의 권한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 군주’ 수준으로 약화되었다. 7월 5일 전 형조 참의 지석영이 민영준과 무당 진령군을 효수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다음은 상소문의 일부이다.

신이 전국 억만 백성의 입을 대신하여 자세히 진술하겠습니다. 정사를 전횡하고 임금의 총명을 가리며 백성을 수탈하여 소요를 초래하고 원병을 불러들이게 만들며 난이 일어나자 먼저 도망친 간신 민영준과 신령의 힘을 빙자하여 임금을 현혹케 하고 기도한다는 구실로 재물을 축내며 요직을 차지하고 농간을 부린 요사스러운 계집 진령군에 대하여 온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살점을 씹어 먹으려고 합니다.
아! 저들의 극악한 행위가 아주 큰 데도 한 사람은 귀양을 보내고 한 사람은 문책하지 않으며 마치 아끼고 비호하는 것처럼 하니 백성들의 마음이 어찌 풀리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빨리 상방검으로 두 죄인을 주륙하고 머리를 도성 문에 달아매도록 명한다면 민심이 비로소 상쾌하게 여길 것입니다.(3)

고종의 실수

그러나 고종은 민영준과 진령군의 처벌을 거부했다. 7월 15일, 새로운 관제에 의하여 1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었고, 군국기무처는 민영준, 민형식, 진령군 등을 처벌하고 탐관오리가 강탈한 산림과 토지를 주인에게 돌려줄 것 등을 건의하는 의안을 올렸다. 민영준은 ‘권력을 마음대로 농단하여 임금을 속이고 백성을 학대한 죄’로 기소되었으나 고종은 계속 그의 처벌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17일에 고종은 마지못해 민영준을 전라도 임자도로 유배를 보내 위리안치 하라는 영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이미 도피한지 오래였다.

1895년 삼국간섭으로 조선에서 입지가 불편해진 일본은 이노우에 공사로 하여금 고종 내외를 방문케 하여 ‘왕실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일본이 청으로부터 얻을 배상금 가운데 300만 엔을 조선 왕실에게 기증하겠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17개조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개혁안의 내용은 ‘갑오경장 이후 대거 투옥된 민 씨 척족을 사면하여 석방하고 민영익과 민영준 등을 일본에 1~2년 간 기숙시킨 후에 요직에 다시 기용한다는 것’이었다. 이노우에의 ‘개혁안’은 조선을 망친 민 씨 척족들의 부패한 정치를 다시 허락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고종은 이노우에 개혁안에 숨어 있는 간계를 생각하지 않고 역사를 과거로 돌리고자 하였다.

고종은 6월 17일 탐관오리를 사면하라고 지시하였다.

“짐이 개혁하는 때를 당하여 유신하는 정사에 참작하는 것이 없지 않으니, 개국 504년 4월 1일 이전의 범죄 중에서 모반과 살인, 절도와 강도, 통간과 재물에 대한 협잡죄를 범한 자 외에는 일체 석방함으로써 크게 은전을 보이라”(4)

고종의 조령에 따라 법부는 부정부패로 투옥된 탐관오리 중에서 석방자들의 명단을 작성했다.명단에는 민 씨 척족들의 이름이 가득했다. 민 씨 일가 중에 유일하게 개혁을 지지하고 있었던 민영달은 고종의 대 사면 소식을 접하고 ‘죄를 지은 민 씨들에게 국왕의 사면이 이루어진 것이 역겨워 더 이상 서울에 있고 싶지 않다고 했다.’(5) 7월 3일 고종의 명에 따라 법부는 갑오경장 이래 구속된 대표적인 탐관오리 260명을 석방했다. 사면자 명단에 민영준을 비롯하여 농민 탐학과 수탈로 고부농민 봉기의 요인이 되었거나 봉기를 확산시킨 주범들 조병갑, 이용태, 김문현 등이 버젓이 들어있었다.(6)

8월 19일 고종은 군부대신 안경수를 일본 공사관에 보내어 훈련대 해산과 무장해제, 민영준의 궁내부 대신 임명을 통고했다. 민영준은 유배기간에 도망쳐 중국에서 은신해 있었고 1895년 7월 대 사면령에 따라 조선에 돌아와서 당당하게 궁내부대신이 되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 후 탐학죄로 강화도 교동군에 10년 유배형을 받았지만 5월에 특사로 풀려 나왔고 9월에 중추원 원장이 되었다. 1910년 10월 한일합병에 앞장선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1911년 1월 은사공채 5만원을 받았다.

전봉준에게 법정에서 매관매직의 우두머리로 고발당한 민영준은 조선왕이라는 탐욕스럽고 혼미한 권력자의 비호로 손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백성들의 굶주림과 수탈, 인권유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봉기한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은 교수형을 당하고 시신이 거리에 매달리며 친척들까지 연좌제에 시달리는 고통을 당하였지만 그는 인맥과 돈을 이용하여 유배지에서 중국으로 피신, 잠적할 수 있었고 불사조처럼 살아 돌아와서 궁내부 대신에 부임하는 희대의 권세를 마음껏 과시하였다.

역사에서 길이 용서받지 못할 그의 죄는 일신의 안전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청군을 끌어들여 조선 역사와 백성들의 등에 칼을 꽂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부일파로 변신하여 자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왕과 작당한 역사의 반역에 대하여 면죄부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친일파 타겟이 주로 많이 알려진 을사오적이나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집중되므로 그는 역사의 집중적인 심판이나 비난마저도 피하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세자들의 재판과 처벌이 “깔따구는 삼키고 약대는 거르는” 용두사미 식으로 진행되었을 터였다. 아무리 여론이 거세고 피해자가 속출하고 고소와 고발이 들어와도 민영준처럼 요지부동 하고 철면피한 권세자, 기득권자가 있음으로 국민들이 탄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시 궁내 최고원로였던 영돈녕부사 김병시의 탄식대로
어찌 이런 나라가 있는가?
어찌 이런 세상이 있는가?
어찌 이런 왕이 있는가?
어찌 이런 법이 있는가?

미주

(미주 1) 이윤섭, 『세계 속 한국 근대사 2』, 66-67.
(미주 2) 이윤섭, 『세계 속 한국 근대사 2』, 77-78.
(미주 3) 이윤섭, 『세계 속 한국 근대사 2』. 84.
(미주 4) 이윤섭, 『세계 속 한국 근대사 2』, 139.
(미주 5) 이윤섭, 『세계 속 한국 근대사 2』, 140.
(미주 6) 이윤섭, 『세계 속 한국 근대사 2』, 140; 박종인, 『매국노 고종』, 205.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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