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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사울의 종교정책을 뒤집다

기사승인 2021.07.22  16:3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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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역사 알기 ㊵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사울’, ‘다윗’, ‘솔로몬’에 관한 성경의 자료들은 연대를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학자가 지적하고 있듯이 성경에 포함된 각각의 전승들은 시대순으로 나열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윗’이나 ‘솔로몬’의 경우에는 선한 모습, 신앙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칭찬받을 만한 모습은 앞부분에 배치되어 있고, 잘못을 범하거나 하나님을 떠난 모습은 뒷부분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사울’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겠지만, ‘사울’은 왕위 등극과 전쟁에 관한 기록을 뺀다면 다윗과 연결되어서만 나타나기 때문에 같은 방식으로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무엘」에서 ‘다윗’과 ‘솔로몬’의 전승들이 시간과 상관없이 배치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고 해서 그 전승들을 본래 시간에 맞춰 배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무엇이 언제 일어난 일인지 알 수 있는 기준이 없을 뿐만 아니라, 현재 배치되어 있는 흐름이 큰 틀에서 보았을 때 어색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를 통해서 초기 왕정 시대에 야훼 종교와 관련되어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울’은 왜 하나님과 ‘사무엘’에게 버림받게 되었는지, 그 이후에 ‘다윗’은 어떤 일을 했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빼앗긴 언약궤와 왕정 요구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지게 된 요인은 한 가지로 잘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도 왕을 세우게 된 원인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요인은 블레셋에 의한 위협으로 보입니다. 블레셋에 의한 위협은 이미 「사사기」에서도 다뤄지고 있고, 우리가 잘 아는 ‘삼손’은 블레셋을 막기 위해 세워진 사사였습니다. 사사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끊이지 않는 블레셋의 침략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더 강한 군사력과 그 군사를 운용할 수 있는 지도력을 원하도록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으로부터 얼마나 큰 위협을 받고 있었는지는 언약궤 설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로에서 보관하고 있던 언약궤가 이스라엘 지파 동맹 전체에서 얼마나 중요하게 다뤄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후에 언약궤가 다뤄지는 모습을 보면 종교적 상징물로 상당히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왕을 세우길 원하던 당시 이스라엘은 블레셋에 의해 종교적 상징물까지 빼앗긴 상황이었습니다.

학자들은 아스돗에서 언약궤가 옮겨진 지역, 벧세메스가 블레셋 국경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언약궤는 다시 기럇여아림으로 옮겨지는데 이곳도 ‘솔로몬’ 이전까지 이스라엘에 속한 지역이 아닌 가나안 사람들의 성읍으로 추정합니다. 다만 기럇여아림은 이스라엘과 일종의 동맹을 맺고 있었던 것으로 봅니다. 그렇기에 언약궤는 ‘다윗’ 이전까지는 「사무엘상 6-7장」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이스라엘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블레셋도, 이스라엘도 아닌 제3지역에 보관되었습니다.

▲ Nicolas Poussin, 「아스돗의 역병」 ⓒ위키피디아

위의 그림은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이 1630년부터 31년까지 작업하여 그린 ‘아스돗의 역병’입니다. 중앙 하단부에는 역병으로 인해 죽은 이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좌측 중간에 아스돗 신전에 놓여있는 언약궤가 보입니다.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애매한 점도 있습니다. 블레셋에 의해 언약궤를 빼앗겼다는 「사무엘상 4장」의 진술은 ‘사울’이 왕이 된 이후 블레셋과의 전투를 그리고 있는 「사무엘상 14장 18절」과 충돌합니다. 기럇여아림이 이스라엘의 영토에 속해있다면 그나마 언약궤가 돌아왔고,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에 있던 언약궤를 가져왔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는 또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투에 승리한 후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왔다는 「사무엘하 5-6장」의 진술과 충돌합니다.

이 본문들 중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는 본문은 아마도 「사무엘상 14장」으로 보이는데, 학자에 따라 이 본문을 주전 9세기경에 만들어진 본문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 본문에서 ‘사울’은 약간은 무능해 보이기도 하고 힘없이 주저하는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반면에 그의 아들 ‘요나단’은 결단력 있고 과감한 전사로 그려집니다.

「사무엘상 14장」에 나타난 언약궤는 ‘사울’이 종교적 제의 전통을 충실히 지키는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서 첨가된 말로 보입니다. 종교 전통을 충실히 지키려는 모습과 무능해 보이는 모습은 우리에게 쉽게 연결되는 이미지는 아닙니다. 하지만 ‘사울’의 저주 맹세와 그 대상이 자신의 아들 ‘요나단’이었다는 점은 「사사기 11장」에 나타난 ‘입다’와 그의 딸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이는 잘못된 종교 제의와 그것에 의존하는 지도자를 비판하기 위한 내용으로 보입니다.

「사무엘상 14장」이 어떤 전승 과정을 거쳐서 의미가 확대되고 이런 비판을 담게 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은 이 글의 관심이 아닙니다. 또 「사무엘상」도 그런 의미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다만 ‘사울’의 잘못을 부각하기 위해 ‘사무엘’과 ‘사울’의 이야기 사이에 이 전승을 넣어둔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 순서를 따져보자면, 「사무엘상 14장」에 나타난 블레셋과의 전투는 ‘사울’이 다른 곳에는 등장하지 않는 제사장, 특히 실로 출신의 ‘아히야’를 대동하고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점을 보았을 때, ‘사울’의 재위 초반에 일어난 전투로 보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무엘과 사울

‘사울’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사무엘’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사무엘’에 관해 대략적인 모습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는 언약궤를 보관하고 있던 실로의 계승자로 그려집니다. 하지만 그는 언약궤가 옮겨진 기럇여아림으로 가서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지 않습니다. 라마를 그의 활동 중심으로 삼고 이스라엘의 사사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사사였다는 말에는 조금 생각해볼 부분이 있습니다. 「사무엘상」에 나타난 사사는 「사사기」에 나타난 사사와 조금 다릅니다. 「사사기」에 나타난 사사들은 자신의 지역을 중심으로 국지전을 펼쳤던 전사(戰士)에 가까웠다면, 「사무엘상」에 나타난 사사는 말 그대로 판관에 가깝습니다.

「사무엘상 4장 18절」은 실로의 ‘엘리’가 이스라엘의 사사로 40년간 활동했다고 말합니다. 「사무엘상 7장」에는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다스렸다고 말하는데, 이때 사사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사파트(שׁפט)’가 사용됩니다. 「사사기」의 사사들은 일반적으로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지 않는 반면, 「사무엘상」에 나타난 사사들, ‘엘리’와 ‘사무엘’, 굳이 추가하자면, ‘사무엘’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는 제사장이거나 재판관으로 표현됩니다.

「사무엘상 7장」에는 ‘사무엘’이 블레셋 병력을 막아낸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사무엘’이 전사의 모습으로 그려지지는 않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 간구하며 번제를 드려서 블레셋 병사를 몰아냅니다. 이는 「사사기」의 사사들과는 확실히 구분되는 모습입니다.

사사의 역할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된 것인지, 전사 역할을 할 인물의 부재 때문인지, 사사에게 종교적 역할이 더 부여되면서 변화한 것인지, 사사는 더 이상 무력을 통해 이스라엘을 지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전사로서의 사사가 부재했던 것도 이스라엘 지파 동맹이 왕을 요구했던 이유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무엘상 9-10장」에 나타난 ‘사울’과 잃어버린 암나귀에 관한 전승에서 ‘사울’은 왕(멜렉, מלך)이 아니라 군사령관(나기드, נגיד)으로 표현되며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어쩌면 이 표현이 왕정이 처음 수립되던 당시 이스라엘 지파 연합이 원했던 왕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블레셋, 암몬, 아말렉과 같은 주변국의 위협 속에서 각 지역의 병력만으로는 감당이 안 되었기 때문에 전 지파의 병력을 소집하고 통솔할 수 있는 군사령관을 원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모습은 「사무엘상 13장」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3장」은 흔히 ‘사울’의 첫 번째 실수라고 말해지는데, 블레셋과의 전투에 앞서 아무리 기다려도 ‘사무엘’이 오지 않자, ‘사울’이 직접 번제를 드린 이야기입니다. 어찌보면 ‘사울’의 실축을 기다린 ‘사무엘’의 책략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이야기는, ‘사울’이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 밖의 직무에 손을 댄 사건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사무엘’이 ‘사울’을 향해 계속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서 첨가된 표현일 뿐입니다. 「사무엘상 13장」의 히브리어 본문에서 ‘사무엘’은 ‘사울’을 왕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잘못을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대신할 새로운 ‘나기드(군사령관)’를 세우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앞서 「사무엘상 14장」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제사장 ‘아히야’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제위 초반에 ‘사울’은 군사령관의 역할만을 수행하였고, 그의 전쟁에는 제사장이 동행했거나, 동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최소한 신탁을 전하는 역할이나 전쟁 전 번제를 드리는 역할은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런 제사장 직분은 여전히 실로 출신의 제사장들이 맡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보자면 ‘사무엘’도 실로 출신의 제사장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초기 지파 동맹에 의해 요구된 왕은 군사령관이었고, 종교 권력은 여전히 실로에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울’은 더 많은 권력을 왕에게 집중시키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발생하게 된 사건이 「사무엘상 13, 15장」에 나타난 사건들로 보입니다.

사실 지난 글 「이스라엘 역사 알기 ㊱ ‘누가 이스라엘의 왕을 결정했는가’」에서도 다루었지만, 처음 왕이 세워지던 때에 왕위 계승에 관한 사항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윗’의 아들들이 용사로서의 면모를 과시하면서 왕위 계승을 노렸다는 점은 당시 지파 동맹이 원한 왕은 혈통에 의한 정통성 있는 왕이 아니라 카리스마 있는 강력한 전사였음을 알게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울’이 자신보다 강한 용사 ‘다윗’으로 인해 왕권이 무너져 내릴까봐 염려했다는 이야기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에는 그의 아들 ‘요나단’이 차기 왕위에 등극하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울’이 ‘요나단’이 다음 왕이 될 것이며, 자신의 혈통이 계속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면, 이는 ‘사울’ 스스로가 그런 상황을 만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왕위 세습은 ‘다윗’의 혈통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지파 동맹 사이에서 세습왕정의 흐름을 이끌어 낸 인물은 ‘사울’로 보입니다. ‘사울’과 ‘요나단’ 사후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을 자처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사울’의 두 번째 실수이자 하나님께 버림받게 된 사건이 나타난 「사무엘상 15장」의 아말렉 전투도 이런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고 봅니다. ‘사무엘’은 과거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전투 방식인 진멸(헤렘, חרם)을 요구합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진멸한다는 방식은 일반적인 전투가 아니라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 전투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사무엘’의 요구를 듣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사울’의 심정은 이해가 됩니다. ‘사울’ 시대에는 세금이라는 개념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울’은 왕이 되었고 자신의 상비군을 통솔하며 전쟁을 수행했지만, 그에 따른 제반 비용을 어떤 방식으로 취득했는지에 대해 성경은 말해주지 않습니다. 만약 ‘사울’이 상비군 운영비용과 전쟁 수행비용이 부족했다면 이 부족한 금액은 약탈을 통해 얻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아무것도 약탈하지 말고 진멸하라는 ‘사무엘’의 요구가 ‘사울’에게는 가혹한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이런 문제가 있었겠지만, ‘사무엘’이 보았던 ‘사울’의 잘못은 종교적 전통을 깨뜨리고 있다는 점이었을 것입니다. ‘사울’은 어느 순간 실로의 제사장 집단을 무시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종교 권력을 자신의 손에 두려고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는 제사장 집단을 무시합니다. 「사무엘상 22장」에서 ‘사울’이 놉의 제사장들을 학살할 수 있었던 점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사무엘’의 죽음 이후 이런 작업은 더욱 본격화 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무엘상 28장」에는 ‘사울’이 신접한 자와 박수를 쫓아내었다는 진술이 나타납니다. 이 이야기에서 ‘사울’은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시도합니다. 그 시도가 실패하자 선지자를 찾아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어떤 말씀도 내리시지 않습니다. 이 진술은 ‘사울’이 ‘사무엘’의 영을 불러냈다는 이야기를 위한 전제 조건으로 나타나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사울’이 대부분의 제사장 집단을 몰아내고 제정일치 국가 체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 Salvator Rosa, 「사울에게 나타난 사무엘의 영」 ⓒ위키피디아

위의 그림은 살바토르 로사(Salvator Rosa, 1615-1673)가 1668년에 그린 ‘사울에게 나타난 사무엘의 영’으로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중입니다.

「사무엘상」은 ‘사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건을 상당히 초반부에 배치함으로 ‘다윗’을 선택하신 사건이 ‘사울’ 왕정 초반에 일어난 일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13, 15, 28장」이 거의 같은 맥락 속에서 버림받은 ‘사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 이야기들은 ‘사울’ 왕정 중반 이후에 벌어진 사건들로 보입니다. 아마도 강력한 왕권 확립을 위해서 ‘사울’은 당시 여러 지방 산당에 있던 제사장 집단을 내쫓거나 죽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의 종교 정책

‘다윗’은 ‘사울’과는 다른 방식을 취합니다. ‘다윗’은 ‘사울’에 의해 박해당했던 지역인 놉의 제사장 ‘아비아달’을 중용합니다. 「사무엘하 8장 17절」에는 ‘아비아달’과 그의 아버지 ‘아히멜렉’의 관계가 거꾸로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본문에서는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로 나타납니다.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후, ‘다윗’은 새로운 제사장을 한 사람 더 채용하는데, 그 사람이 ‘사독’입니다. ‘사독’은 출신이 불분명한 사람이긴 한데, 아마도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던 여부스족 사제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창세기 14장 18절」에 나타난 살렘(아마도 예루살렘의 축약형) 왕 ‘멜기세덱’이나 「여호수아 10장 1절」에 나타난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 모두 이름에 의로움을 뜻하는 ‘세덱(צדך)’이 들어가는데, ‘사독(צדוך)’이 여기에서 파생된 이름이라면, 그는 본래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여부스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아비아달’이나 ‘사독’이 어디 출신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들이 레위인 계보에 속해있다고 말하는데, 이런 족보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사무엘하」는 이들을 실로의 제사장 ‘엘리’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22장」은 ‘아비아달’의 아버지 ‘아히멜렉’이 ‘아히둡’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사무엘하 8장 17절」을 보면, ‘사독’도 ‘아히둡’의 아들로 나타납니다.

「사무엘상 1-4장」의 실로 설화에서 ‘아히둡’은 등장하지 않습니다만, 앞서 살펴보았던 「사무엘하 14장 3절」에서 ‘아히둡’은 ‘이가봇’의 형제이고 ‘아히야’의 아버지이며 ‘비느하스’의 손자이고 ‘엘리’의 증손으로 나옵니다. 「사무엘상 4장 19-22절」에는 ‘이가봇’이 ‘비느하스’의 아들로 등장하는데, ‘엘리’의 계보가 약간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들이 혈연관계라는 점은 확실해 보입니다.

또 ‘다윗’의 옆에서 제사장 직을 수행하던 이들이 실로의 제사장 ‘엘리’와 연결된 인물들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도 분명합니다. 이와 동시에 ‘다윗’은 실로의 상징물이었던 언약궤를 되찾아 예루살렘에 옮깁니다. ‘다윗’의 행동은 ‘사울’이 단절시킨 것으로 보이는 실로 전통을 다시 회복시킵니다.

‘다윗’의 이런 종교 정책이 이스라엘 지파 동맹의 지지를 얻기 위한 행동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사무엘」에 나타난 ‘다윗’은 위대한 왕으로 그려져 있지만, 전승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윗’은 생각보다 백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다윗’과 ‘사울’의 관계 속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는 있지만, 「사무엘상 25장」에는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하던 때에 ‘나발’을 만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발’은 갈렙 족속의 유력가로 나타나는데, 그는 「사무엘상 25장 10절」에서 ‘다윗’을 향해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모욕적인 말을 던집니다.

모욕적인 말을 들은 ‘다윗’은 ‘나발’의 집안을 몰살하겠다고 맹세까지 하지만, ‘다윗’을 찾아온 ‘아비가일’로 인해 이 맹세를 실행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사무엘상 25장 38절」은 하나님께서 ‘나발’을 치셨다고 말하고 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결국 ‘나발’은 죽습니다. 그리고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다윗’의 아내가 됩니다.

이때는 아직 ‘다윗’이 왕이 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왕이 된 이후에도 ‘다윗’이 지지를 얻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은 또 나타납니다. ‘압살롬’의 반란이 종식된 이후에 보이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압살롬’의 죽음 이후 예루살렘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사무엘하 19장」에는 ‘다윗’을 빨리 모셔와야 된다는 몇몇 유다 지파 사람들의 목소리가 나타납니다. 이들은 함께 모여 있는 이들을 향해 ‘왜 왕을 모셔올 일에 잠잠하냐’고 말합니다. 어쩌면 많은 이들은 ‘압살롬’의 죽음 이후 ‘다윗’이 다시 왕위에 오르는 것에 반대했는지도 모릅니다.

「사무엘하 19장 9-15절」은 유다 지파 사람들 사이에서 나눈 이야기입니다. ‘다윗’을 다시 왕으로 받아들이자는 결정은 유다 지파의 독단 속에서 벌어지는데, 그 유다 지파 안에서조차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결국 유다 지파는 ‘다윗’을 모시고 요단을 건너 길갈로 오는데, 「사무엘하 19장 40-43절」을 보면, 다른 지파 사람들은 뒤늦게 길갈로 나와 유다 지파 사람들을 비판합니다. 그리고 왜 왕을 모시는 일에 자신들과 의논하지 않았는지를 따집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 ‘다윗’의 재위 기간 전체에 걸쳐 백성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던 당시 ‘다윗’은 큰 지지를 받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어지는 「사무엘하 20장」에는 베냐민 족속인 ‘세바’가 반란을 일으킨 내용이 나타나는데, 이 사건이 정확히 언제 일어났는지 분명하진 않지만, 이 역시도 ‘다윗’이 전체 이스라엘을 구심력 있게 붙들고 있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제의 중앙화를 꾀했던 정책은 지파 동맹 대부분의 지지를 얻지 못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각 지파에는 자신들만의 성소가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실로 제사장 전통과 언약궤라는 기존 전통을 자기 종교 정책의 도구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다윗’이 세운 두 제사장, ‘아비아달’과 ‘사독’이 레위 계보라는 점은 더 후대에 만들어진 내용이겠지만, 이들이 실로 제사장 가문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다윗’ 때에 만들어진 선전 문구였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다윗’이 펼친 또 다른 종교 정책이 레위인의 기용이었습니다. 「사무엘-열왕기」에는 레위인이 단 네 번 등장하는데, 한 번을 제외하고는 언약궤를 옮기는 장면에서만 나타납니다(삼상6:15; 삼하15:24; 왕상8:4). 다른 한 번은 남북이 분열된 이후, 북왕국의 ‘여로보암’이 레위인이 아닌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삼았다는 구절입니다.

「사무엘-열왕기」에 나타난 레위인은 언약궤와 관련이 있는 인물들입니다. ‘사울’ 때에 그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들은 언약궤가 벧세메스로 옮겨졌을 때 거기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앞서 ‘사무엘’은 실로 출신이지만 언약궤와 함께 움직이지 않았다는 언급을 했는데, 「사무엘상 6장」을 따르자면, 레위인들은 언약궤와 함께 움직입니다. 이들은 분명 실로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는 인물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언약궤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들어옵니다.

밀러/헤이스는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재미있는 제안을 하는데, 「여호수아 21장」에 나타난 레위인의 성읍이 이스라엘 12지파에 고루 배분되어 있기는 하지만, 결국 확장된 ‘다윗’ 시절의 영토 내부에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솔로몬’이 확장한 영토보다 작고, 「여호수아」에 나타난 전체 이스라엘의 영토보다도 작습니다. 아래의 지도가 ‘다윗’의 영토와 레위인 성읍을 표시해 놓은 것입니다.

▲ 밀러/헤이스, 『고대 이스라엘 역사』, 637

만약 「여호수아」에 나타난 레위인의 성읍 목록이 ‘다윗’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라면, ‘다윗’은 레위인을 예루살렘에서 언약궤를 보관하고 지키는 이들로 세운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곳곳에 파견하여 그곳에서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직을 수행하게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레위인이 아닌 이들로 제사장을 세운 ‘여로보암’의 종교 정책은 이런 ‘다윗’의 종교 정책에 대한 반발이었을 것입니다.

조금 고민스러운 문제는 ‘다윗’ 당시 레위인으로 분류되는 이들이 본래부터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들만 있었던 것인지, 제사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레위인이라고 불렀던 것인지, 이 둘이 혼합되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다윗’ 시절 최고위 제사장이었던 ‘사독’은 레위인이 아니었지만, 후대 사람들에게는 그가 레위인으로 전해졌다는 점입니다. 또 놉의 제사장 ‘아비아달’도 레위 지파 출신의 레위인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습니다.

이와 함께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 이유는 ‘다윗’ 시절 제사장 중에 레위 지파 출신이 아닌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띄기 때문입니다. 특히 지난 글에서도 살짝 언급했지만, 「사무엘하 8장 18절」에 나타난 ‘다윗’의 관료 목록에 따르면 ‘다윗’의 아들들 역시도 제사장이었다는 점은 레위인과 제사장의 관계에 대해 혼란을 안겨줍니다.

또 「사사기 17장」 이후에는 레위인이 관련된 이야기 두 가지가 나타나는데, 이때 레위인들은 베들레헴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은 베들레헴 출신이고, 한 사람은 에브라임 출신으로 베들레헴 여성과 결혼한 레위인입니다. 「사사기」 이후로 레위인이 ‘다윗’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점은 조금 더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복잡한 문제를 다루기에는 지면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내용을 정리해보자면, ‘사울’은 처음에 군사령관 역할을 수행하면서 실로의 제사장 집단과 함께 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 말년에 ‘사울’은 이들과의 단절을 시도하면서 종교 권력을 왕권에 편입시키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에 ‘다윗’은 ‘사울’의 종교 정책을 뒤집고 자신이 실로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다고 선전합니다. 이를 위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대대적인 이벤트를 벌였고, 예루살렘의 최고위 제사장들은 ‘엘리’의 자손으로 칭해졌습니다. 이와 함께 ‘다윗’은 레위인만이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제사장 직을 수행하던 사람을 레위인이라고 부른 것인지, 레위 지파 출신들만을 선별하여 제사장으로 삼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고 봅니다.

만약 이러한 추정이 맞다면, ‘다윗’은 남왕국의 종교적 근간을 세운 왕이 됩니다. 북왕국은 ‘여로보암’ 시절에 종교적으로 완전히 뒤바뀌었기 때문에 북왕국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겠지만, 남왕국에서, 특히 포로기 이후 레위인 제사장 집단이 권력을 갖을 수 있었던 기원에는 ‘다윗’의 종교 정책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본래 「사무엘」 안에 시간이 뒤엉켜있는 ‘사울’과 ‘다윗’의 행적을 재정리하여 어떤 사건들이 벌어진 순서를 배열해보려고 했는데, 종교 정책과 관련된 내용이 길어져서 다음 글에서 이 점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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