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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같은

기사승인 2021.07.21  16:2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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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 NCCK신학위 <사건과 신학> 6월호 ⑷

▲ 영화 <미나리> 속 순자가 미나리를 키웠던 장소 ⓒCJ엔터테인먼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신학위원회는 ‘사건과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매달 시대적 요청에 대한 신앙고백과 응답을 신학적 접근과 표현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사건과 신학’ 블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번 2021년 6월 <사건과 신학> 주제는 “‘미나리’를 보았다”입니다. 이글은 <성공회 노원 나눔의집 양만호 신부>(클릭하면 원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님의 글입니다.

영화를 보고 다음날 시장에 갔다가 ‘미나리’를 한 봉지 샀다. 그러나 아무 요리도 하지 않고 냉동실에 처박아 버렸다. 꽁꽁 얼어있을 미나리. 우리 삶이 늘 그렇다.

영화 OST를 듣고는 홀딱 반해서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오후 시간이 났다. 꼭 영화를 봐야 하는 시간은 아니었다.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오후에 영화를 볼 거라고 처음 만난 이에게 말해버렸다. 그를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 말에 의해 움직였다.

영화관에 젊은이들은 보이지 않았고 할머니들 몇몇, 홀로 온 중년여성 하나가 보였다.

제이콥은 새로 이사 온 땅에서 ‘가든’을 만들겠다고 가족들 앞에서 선언한다. 부인 모니카는 ‘가든’은 작은 것이라고 흘긴다. 그러나 제이콥은 에덴의 ‘가든’이라고 말한다.

제이콥은 Jacob 곧 야곱이다. 야곱은 구약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 중 하나이다. 밤이 새도록 천사와 씨름하여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내고, 형이 받기로 되어 있던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팥죽 한 그릇으로 가로챈다. 독하고 이기적인 인물이다. 질기기도 하다. 아내 라헬을 얻기 위해 14년을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일한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으로 불리는 그는 13명의 자녀를 두었고 그중 12명은 이스라엘 12지파의 시조가 된다.

야곱은 세상과 싸우고 하느님과도 싸운다. 제이콥 역시 세상과 또 하느님과 싸운다. 그는 뭔가 이루고 싶어 한다. 미국 사회에서 성공하고 싶은 것이다. 미국에 온 지 10년이 되었지만 이렇다하게 손에 쥔 것이 없다. 병아리 감별사로 일하며 생계를 꾸려갈 뿐. 그는 결혼해서 부인과 미국으로 건너오며 이런 약속을 한다. 미국에 가서 서로를 구해주자고. 부인 역시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구원의 약속은 계속 유예되고 있다.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순자, 장모가 미국에 온다. 아이들은 할머니가 할머니 같지 않다며 할머니를 싫어한다. 물길을 찾아 어렵사리 가꾼 농장의 수확물이 겨우 판로를 얻어가려 할 때에 농작물을 저장해 둔 창고가 불타고 만다. 순자의 실수로. 그녀는 거의 실성하고 결국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그녀가 물가 옆에 키운 미나리는 무성하게 자란다.

영화에는 독특한 인물이 등장한다. 제이콥의 농장 일을 돕는 그는 근본주의 신앙을 갖고 있다. 커다란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지고 고행을 하여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기도 하고, 물길을 찾는 인디언의 방법을 선호한다. 제이콥은 그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결국은 그의 말을 좇아 물길을 찾는다.

삶은 우리가 생각한 대로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좌절하고 절망하고 울부짖는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간다. 어떻든 살아야 하기 때문에. 꿈이 산산조각 나더라도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인생은 우리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는다. 어느 노랫말처럼.

영화 초입에 주제가의 멜로디가 흐른다. 노랫말은 이렇다.

늘 한결같은 밤
속삭이는 마음
어우러지네

작은 발자국 위로
한방울씩 또
비가 내리네

고개를 들고
떠나가는
계절을 배웅하네

긴 기다림 끝에
따스함 속에
노래를 부르네

겨울이 가는 사이
봄을 반기는 아이

온 세상과 숨을 쉬네
함께 맞이하는
새로운 밤의 품

삶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조금 더 누군가를 이해해 갈뿐. 이해되지 않던 부모의 삶이. 할머니 같지 않던 할머니의 말과 행동이. 도무지 말을 듣지 않던 아이의 인생이. 그렇게 어우러지며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간다.

은총은 일상에 있다. 거창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사소한 것에 있다. 기적 역시 거기에서 일어난다. 멀고 높은 것을 꿈꾸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삶의 중요한 연료이니까. 이루지 못하더라도 이룰 수 없더라도.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신도 타인도 자기 자신도.

우리에겐 의무가 있다. 캐내야 할 의무가. 이 막막한 자본주의의 들판에서 어리석고 오래된 낡은 꿈을. 우리가 함께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일이 지옥이 아니라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한 일일 수 있는지를.

우리는 결국 모두 사라져갈 것이다. 우리는 기억될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성취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따스했는지로. 친절하지 않은 세상에서 친절하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애썼는지로.

양만호 신부(성공회 노원 나눔의집) kncc@kncc.or.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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