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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과 청병문

기사승인 2021.07.10  15:5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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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농민혁명에 나타난 망국노 민영준과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은 처벌을 받았는가? ⑴

▲ 친일파 민영휘(민영준) ⓒWikipedia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1910년 8월 29일을 “한일합방조약”에 의해 조선이 망한 경술국치의 해로 기억하며 침략자 일본의 만행에 치를 떤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조선이 1894년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고종이 청군 차병 계획을 세웠을 때 이미 망했다고 생각한다. 동학농민 봉기가 일어난 해부터 1910년 망국에 이르는 사이에 조선의 행보는 안타깝게도 개화파 인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백성의 민원을 수렴하고 일본을 극복하기 위한 뼈저린 자기 개혁과 해체의 시간이 아니었다. 패권의 정점에 있는 허수아비 왕과 부패한 양반 관료들이 의례적으로 이합집산하며 ‘충군’과 ‘종묘사직’의 명분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 반대하거나 적극 지지하며 멸망에 적응하는 시간에 불과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소위 역사가 민란이라고 말하는 조선의 19세기 말의 ‘민란’은 왕과 양반 관료들의 부패와 탐학, 가렴주구에 짓눌려 백성들이 더 이상 살 수가 없으니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민생 차원의 요청이었다. 당시 상황에 대하여 황현은 ‘탐관오리들이 온 나라에 깔려 있어 어지럽지 않은 고을이 없으며 그물이 새어 정작 큰 고기는 다 빠져 나갔으며 제대로 징계할 수 가 없다.’ 고 개탄하였다.(1) 1893년 말을 전후하여 부정부패로 귀양을 간 탐관오리들이 이돈하, 이용익, 정광연, 이근호, 이원일, 홍시형, 김영적, 심인택, 윤병관, 조준구, 이용직, 조만승, 김세기 등이었는데 그들은 다 중앙과 지방의 요직자들이었다.(2)

동학교도들이 1891년부터 교조신원운동을 하며 공주, 삼례. 서울에 이어 1893년 4월 26일 보은에서 집회를 열어 척양척왜를 부르짖으며 탐관오리의 처벌을 강경하게 요구하였다. 고종은 보은집회에 대한 대책을 위해 삼정승을 불렀다. 조병세는 소요의 원인을 “전적으로 관리들이 탐오한 짓을 자행하여 그 침해와 학대를 견디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하였고, 정범조 역시 “소요가 일어난 원인은 탐관오리 때문입니다.”라고 설파하였다. 조병세는 “500년 동안 가르치고 길러온 백성들입니다. 침해를 견디지 못하고 우물에 들어가는 듯한 형상입니다.”(3)라고 간언하며 탐관오리 처벌을 해법으로 제시하였으나 고종은 내심 조선 팔도에 깔려 있는 260명이 넘는 자신과 민 씨 측근의 탐관오리를 벌하고 싶지 않았다.

고종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건방진 백성들과 동학도 무리들의 탐관오리 처벌 요구에 대한 해결책으로 진압군을 편성하고자 하였다. 그는 충청도와 전라도 감영에 군사가 없는 것을 한탄하며 청주의 군사를 동원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에 영의정 심순택이 강화도 군인과 평양 감영의 군인을 동원하여 동학도들이 서울로 올라오는 길목인 수원과 용인 등지에 주둔시키고 서울의 군사를 형편대로 쓰자는 안으로 고종의 진압군 편성에 무게를 실어 주었다.

그러나 고종의 생각은 처음부터 달랐다. 그는 서울의 군사는 자신의 신변보호를 위해 서울에 주둔해야 하므로 다른 지역으로 전출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서울 주둔군을 쓰는 대신에  “다른 나라의 군사를 빌려 쓰는 것은 역시 각 나라마다 전례가 있는데, 어찌 군사를 빌려 쓰지 않는가?” “여러 나라에서 빌려 쓰는 것이 아니라 청나라 군사는 빌려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발언하여 삼정승의 격렬한 반대를 받았다.”(4)

부패한 탐관오리의 정점이었던 고종은 ‘탐관오리가 문제의 원인’이라는 관료들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오히려 ‘동학무리 소탕’에 초점을 맞추어 감히 청군을 빌려 그들을 진압하고자 하였다. 자국의 백성을 스스로 치려는 그는 이미 나라의 왕으로서 자존심도, 지도력도 잃은 자였다. 이미 조선은 나라가 아니었고 왕은 왕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배고프고 억울해서 못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백성들을 외국군대를 빌려서 진압하고자 하는 생각을 고종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외국 군대 초청의 대한 생각은 다음 해, 4월27일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후에 현실화되었다.(5)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청군을 차용하려는 고종의 생각을 같은 부패한 권력 운명공동체집단에 속하는 망국노 민영준과 민비가 비밀리에 성사시켰다. 그들은 임오군란 시 군인들에게 당한 치욕을 생각하며 자신들의 권좌를 지키기 위해 백성들의 생명을 기꺼이 외국군대의 총알받이로 내놓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지난 20여 년 동안 매관매직, 상납, 과거시험 부정, 과다한 세금 등으로 조선의 뿌리를 고사시키고 있었다. 조선은 이미 죽었다. 백성의 생명을 아끼지 않는 왕,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는 지배자의 나라는 그 뒤로 16년을 더 존속하였지만 그리 큰 의미가 있지 않다.

조선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근대와 중세를 가르는 분수령이 된 동학농민혁명의 공식명칭은 <동학농민운동>이다. 그러나 연구가들의 시각에 따라 <동학운동>, <갑오농민전쟁>, <동학혁명> 등으로 불리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1월 9일(음력)에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재부임한 다음 날인 1월 10일에 고부농민 봉기로 시작되어 1894년 11월 27일 태인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 연합군에 의해 농민군이 패배함으로서 끝이 났다.

그 후 12월 초에 동학농민군의 지도자 최경선, 김개남, 전봉준, 손화중과 많은 지도자들이 차례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나라의 근본인 백성’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근 1년 동안 피땀 흘리며 투쟁한 그들 모두는 대전회통 형전의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서 관아에 변을 일으킨 자는 지체 없이 목을 벤다’는 법률에 비추어 <동학란>의 괴수와 역적으로 처벌되어 고스란히 지하에 파묻혀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전봉준은 역사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올 수밖에 없는 위대한 민중(民衆)의 선각자였다. 해방 후, 역사는 근대적 사고로 민중의 혁명을 주도한 위대한 그들을 혁명가로 부활시켜 “동학란”을 “동학농민혁명”으로 바꾸며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로 자리매김하였다.

본 글은 제목대로 왕조 역사를 해체시키고 일본의 식민지 수탈의 대상이 되어 조선으로 하여금 근대화의 길로 나가게 만드는데 극적으로 기여한 두 사람의 탐관오리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들은 농민군 진압에 청의 군대를 끌어들여 조선을 멸망의 길로, 동아시아의 패권 싸움의 장으로 만든 민씨 척족 부패 관료, 망국노 민영준과 농민 봉기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탐관오리 조병갑이다. 그들의 탐욕과 부패는 자신들도 모르게 청국 중심의 동아시아 판을 일본 중심의 동 아시아 판으로 재편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오늘의 한국에도 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청병을 요청한 망국노, 자작 민영준(민영휘, 1852-1935년)

먼저 청병을 요청한 망국노 민영준에 대한 전봉준의 고발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전봉준은 1895년 2월 11일에 있었던 두 번째 공초에서 민영준의 탐욕상을 고발한다.

문: 그렇다면 전라도 한 곳에서만 탐학을 일삼는 관리들을 제거하고자 봉기했는가. 아니면 팔도 전체에서 그러한 뜻을 펼치고자 하였는가?
답: 전라도 한 곳에서 탐학을 일삼는 자들을 제거하고, 이와 더불어 내직에서 매관매직을 일삼으며 권력을 농단하는 신하들을 몰아내면 팔도가 자연히 한 몸이 될 것이 아니겠는가?
문: 전라도 감사 이하 각 읍의 수령들이 모두 탐학을 일삼았는가?
답: 열에 여덟아홉이 그렇다.
문: 어떤 일을 가리켜 탐학이라 하는가?
답: 각 읍을 다스리는 수령과 벼슬아치들은 상납을 내세워 토지의 세금을 더 거두거나, 집집마다 져야 하는 부역의 세금을 마구 거두어들인다. 또 조금이라도 재산이 있는 백성에게는 공연히 죄를 뒤집어 씌워 재산을 강제로 빼앗고 경작지를 함부로 침탈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문: 내직에 있으면서 매관매직을 일삼는 자는 누구인가?
답: 혜당(6) 민영준, 민영환, 고영근 등이 그렇다.
문: 이들이 전부인가?
답: 이 외에도 허다해서 다 말할 수가 없다.
문: 이들이 매관매직을 행한 것을 어떻게 분명히 알 수 있는가?
답: 온 세상에 다 퍼져 있으므로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7)

전봉준 장군은 서슬이 퍼런 법무아문의 공초에서 당당하게 민영준(민영휘)의 탐학을 고발하며 그들의 두 번째 봉기는 서울 중앙에서 매관매직을 일삼는 부패한 관료들까지 겨냥하였음을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

민영준은 당시 전라감사 김문현과 전라병사 이문영을 관직에 추천하였다. 그들은 매관매직과 상납으로 굳게 결속되었으며 탐학을 서로 묵인하고 발각될 경우 서로 무마를 해주었다. 조병갑은 고부군수에서 익산군수로 발령을 받았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그는 김문현에게 고부군수로 다시 갈수 있도록 선처를 부탁하였고 그는 선이 닿는 민영준을 움직여서 1894년 1월 초에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다시 발령을 받게 하였다.

민영준은 1890년 선혜청 당상으로 임명된 이래 이권에 개입하며 모든 물건에 세금을 매기고 홍삼을 독점하는 등 온갖 방법으로 돈을 긁어모았다. 뿐만 아니라 관찰사와 수령 자리를 해마다 발령 냈고 심지어는 매달 5,6회에 걸쳐 이조와 병조의 인사권자들을 불러 회의를 하고 미리 봐둔 전국의 갑부들에게 참봉, 도사, 감역 같은 초임 벼슬자리를 팔도록 강제하였다. 한걸음 더 나가서 가문의 영광과 명예를 원하는 자들에게 뇌물을 받고 죽은 자들의 벼슬을 올려 주는 ‘증직’과 효자와 열녀를 추켜세우는 ‘정려’를 매매하였다. 그가 고종의 최측근이 된 후 10년 사이에 조선은 매관매직과 뇌물로 껍데기만 남아 빈사상태에 이르렀다.

황현은 민영준이 매관매직을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고종의 신임을 산 것은 그가 평안도 관찰사로 근무할 당시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수레에 태워 바쳤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8) 황금 송아지 상납 후, 그는 강화부 유수, 형조판서, 예조판서 겸 예문관 제학, 공조판서, 한성부판윤, 판의금사, 의정부 좌참찬, 경리사, 이조판서, 통위사, 연무공원판리, 판의금부사, 예조판서 겸 총어사, 지훈련원사, 동좌부빈객, 공조판서로 정부 요직을 두루 차지하며 고종의 최측근으로 권력의 정점에 앉았다. 동학농민의 거사가 일어날 무렵 그는 병조판서로 자리를 옮기며 친군(親軍) 경리사를 겸하였다.

3월 20일(음력) 무장에서 동학농민군이 창의문을 선포하며 재봉기를 하였다. 그러나 고종과 관료들은 늦장 대응을 하여 4월 2일에야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홍계훈은 당일로 장위영 병사 800명과 야포 2문, 기관포 2문을 이끌고 인천으로 갔다. 홍계훈의 중앙군이 전주성으로 들어간 날 동학농민군은 황토현에서 전라감영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홍계훈은 조선이 농민군을 제압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직감하였고 바로 조선 정부에 증원군을 요청하며 청나라 군을 차병하는 방안을 정부에 제시하였다.(9)

4월 14일, 조정에서 청에 진압군 파견을 요청하는 문제가 토의 되었다. 민영준은 적극적으로 청군을 부르기를 주장하였으나 반대하는 의견이 우세하였다. 반대 이유는 첫째로 나라의 근본이 백성인데 외국군에 의해 수많은 생명이 절멸되게 내버려둘 수 없다는 것이었고 둘째로 국내로 진입한 청국 군대가 통과하는 지역에 막대한 폐단이 생겨 민심이 동요할 것이라는 점이었고 셋째로 청군의 입국을 빌미로 일본과 서구 열강이 공관이나 거류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10)

그러나 민영준은 개인적으로 4월 22일 또는 23일에 원세계를 찾아가 차병 협상을 계속하였다. 농민군이 4월 28일 전주를 함락시키자 고종과 그를 비롯한 민 씨 척족들의 위기의식이 더욱 커져 그는 당일에 원세개를 다시 찾아갔다. 그는 원세개와 청군 파병의 문제를 논의하였다. 원세개는 이홍장에게 보고하였다.

어제와 오늘 상의하여 한성과 평양의 병사 2,000명을 파견하여 길을 나누어 가서 토벌하도록 하였습니다. 국왕은 병사가 적은데 추가로 보낼 수도 없고 또 그 병사들을 믿을 수도 없다는 것을 이유로 삼아 논의를 거쳐 중국에게 군대를 보내 대신 토벌해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11)

같은 날, 조선 주재 일본 대리공사 스기무라 후카시는 ‘조선이 청에 파병 요청을 할 것’이라는 전보를 일본 정부에 타전하였다. 또한 당일에 조선주재 미국공사 실(John M. B. Sill)이 ‘선교사 보호를 위해 군함을 파견해 달라’고 미 국무성에 요청하였다. 같은 날, 이토 히로부미 일본 총리대신은 내각 회의를 열어 ‘청이 파병하면 일본도 파병한다’는 방침과 외교 전략을 세웠다.(12) 4월 30일 어전회의가 열렸고 민영준은 농민군의 진압을 위해서 청의 군대를 빌릴 것을 강력히 요청하였고 고종은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청군을 허락하였다. 당일 밤, 민영익은 좌의정 조병세의 명의로 원세개에게 ‘청병’문을 전달하였다.

본국 전라도 관할의 태인과 고부 등 고을은 백성의 습속이 사나워 원래 다스리기가 어려운 곳이라고 일컬어졌습니다. 근래에 동학에 붙은 동비 1만여 명이 무리를 이루어 공격하여 함락된 고을이 10여 곳이나 되며, 지금 또 다시 북진하여 전주성을 함락하였습니다. 전일에 선발한 연군이 가서 진정시키려 했으나, 그 동비들이 끝끝내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연군이 패전하기에 이르러 잃어버린 병기도 많았습니다. 이 흉악한 무리들이 오래도록 소요하면 매우 염려스러울 뿐입니다. 더구나 한성과의 거리가 4백 수십 리에 불과한 곳까지 이르렀는데 그들이 다시 북진하도록 내버려둔다면 경기 지방이 동요할 것이니 손상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본국이 새로 조련한 각 군의 현재 숫자가 겨우 도회를 보호할 만한 정도인데다가 전투를 경험하지 못하여 적을 전멸하는데 쓰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흉악한 무리들을 번창하게 놓아둔다면 중국에까지 우려를 끼치는 바가 더욱 많을 것입니다.
임오년과 갑신년에 일어난 본국의 두 차례 내란을 보면 모두 중국의 군사가 와서 평정해 준 데 힘입었습니다. 이에 원군 문제로 귀 총리(원세개)를 번거롭게 하니 신속하게 북양대신(이홍장)에게 전보를 쳐서 몇 개 부대를 파견하여 속히 와서 토벌하도록 해주십시오. 아울러 본국의 각 군이 따라가서 함께 군무를 익히게 하여 앞으로의 방위 계책을 삼겠습니다. 흉악한 무리가 꺽어지면 즉시 회군을 요청하고 감히 계속 머물러 있어 대군이 밖에서 오래 머물러 있는 수고를 끼치지는 않겠습니다. 아울러 귀 총리에게 청하오니 속히 계획을 세워 이 급박함을 구제해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13)

‘청병문’은 왕과 민 씨 척족들의 탐학과 부정부패에 항거하는 백성을 동비, 흉악한 무리로 몰아붙이는 지지리 못난 왕의 변명과 자신의 안전을 도모코자 군사를 구걸하는 체통도 위신도 없는 구차한 왕의 모습을 보여준다. 민영준은 썩어빠진 고종의 권력에 편승한 자로서 자신의 기득권, 부귀영달을 보전하기 위해 무조건 청의 군사를 끌어와야 했다.

미주

(미주 1) 황현, 『매천야록』, 173.
(미주 2) 황현, 『매천야록』, 173.
(미주 3) 이윤섭, 『세계 속 한국 근대사 2』, 45-46.
(미주 4) 이윤섭, 『세계 속 한국 근대사 2』, 48-49.
(미주 5) 박종인, 『매국노 고종』, 186.
(미주 6) 혜당: 대동미를 관리하던 선혜청에 소속된 당상관의 호칭
(미주 7) 김흥식 엮음, 『전봉준 재판정 참관기』, 57-58.
(미주 8) 황현, 『매천야록』, 136.
(미주 9) 이윤섭, 『세계 속 한국 근대사 2』, 55-56.
(미주 10) 이윤섭, 『세계 속 한국 근대사 2』, 60.
(미주 11) 박종인, 『매국노 고종』, 190.
(미주 12) 이윤섭, 『세계 속 한국 근대사 2』, 61-62.
(미주 13) 이윤섭, 『세계 속 한국 근대사 2』, 62-63.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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