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고뇌와 은총의 변증법

기사승인 2021.07.05  16:28:08

공유
default_news_ad1

- ‘베르나노스’의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베르나노스는 자연에서 한 순간도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매 순간 초월과의 만남을 일궈낸 예술가이다.” - 프랑수아 모리아크

1. 베르나노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베르나노스의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1936, 동명의 영화는 로베르 브레송 감독이 1951년 연출함)는 20세기 종교문학의 정수로 ‘초자연을 절묘하리만큼 자연스럽게 제시’하고, ‘교회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라고 상찬받는 형이상학적 밀도가 짙은 작품이다. 베르나노스는 이 소설을 통해 1930년대 프랑스 사회의 반교권주의와 무신론이 번져 가던 불신의 시대를 날카로운 시각으로 들춰내며 그 시대 교회의 부패와 관료주의 등을 비판하고 있다.

베르나노스는 이를 위한 도구로 너무나 나약하지만, 쉽게 무너지지 않는 고결한 인간 본성을 지닌 시골 신부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신부는 아이처럼 맑고 순수한 영혼을 지녔고, 그의 일기는 신부의 숭고한 영혼의 기록이 된다. 일기 속 글자 한 자 한 자에는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세상 모든 죄악을 용서하는 위대한 믿음이, 더불어 인간적인 고뇌가 깃들어 있다. 줄거리는 이렇다.

신을 향한 믿음이 사라져 가던 시대, 프랑스의 어느 작은 시골 마을 본당에 부임해 온 한 젊은 신부는 가난과 욕망, 육체적 정신적 나태에 어그러진 마을의 모습을 목격하고, 깊은 고뇌에 빠져든다. 그리고 ‘악’과 싸우기 위한 용기와 힘, 의지를 얻기 위해 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신부는 일기 쓰기를 통해, 신앙에서 멀어지고 여러 죄악에 빠져 고통받는 영혼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독과 자기 연민까지도 깊숙이 들여다본다. 썩어 가는 포도주와 딱딱한 빵만으로 이루어진 자기 학대와도 같은 식사, 다른 사람들보다 연약한 신체, 세상 물정 모르는 순박함과 그로 인해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모함당하는 데에서 오는 외로움 등. 더 이상 기도를 하지 못하고 자살의 유혹까지 겪는 신부의 섬세한 내면 성찰은 비단 신앙만이 아닌, 인간의 숭고함을 보여 준다. 주제는 소설의 첫 부분에 잘 나와 있다. 생바스트 언덕에 올라간 신부가 시골 마을을 본다.

“내 본당은 여느 본당과 같다. 모든 본당들이 서로 비슷하다. (중략) 내 본당은 권태에 먹혀들고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하고많은 다른 본당들과 마찬가지다! 권태가 본당 모두를 우리 앞에서 아귀아귀 먹어 대는데도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언젠가 우리도 그에 걸려들어 몸속에서 암세포를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그것을 속에 지니고도 아주 오래 살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런 생각들이 어제 길을 걷는 중 든 것이다. 가슴 가득 들이켜면 증기처럼 복부 깊은 곳까지 퍼져 내려가는 는개(안개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생바스트 언덕에서 본 마을은 문득 11월의 을씨년스러운 하늘 아래 너무나 푹 짓눌려 가라앉은 채 비참하게 보였다. 마을 위 사방으로 수증기가 피어올랐고, 마을은 탈진한 가여운 한 마리 짐승 마냥 물기 어린 풀숲에 그냥 누워 있는 것 같았다. 마을 전체라고 해 봐야 얼마나 작은지! 그런데 바로 이 마을이 내 본당이다. 내 본당이건만 나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채 마을이 밤의 장막 속으로 가라앉으며 시야에서 사라져 가는 것을 슬프게 지켜보고 있었다 …. 좀 더 지체했더라면 전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말이다. 마을의 고독과 나의 고독을 이토록 통렬하게 느낀 적이 여태 없었다. 안개 속에서 쿨럭이다가, 겨드랑이에 가방을 끼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어린 목동에 이끌려 축축한 목초지를 가로질러 향내 나는 훈기 도는 외양간으로 곧 돌아갈 가축들 생각이 났다 ….  마을 또한, 큰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진흙탕 속에서 수많은 밤들을 보낸 후, 있음 직하지도 않은, 감히 꿈꾸어 보기도 어려운 어떤 안식처로 자신을 안내할 주인을 기다리는 듯 보인 것이다.

아, 물론 나 역시 이런 생각이 나 스스로도 정말 진지하게 여기기 힘든 허황된 것임을, 그저 꿈같은 것임을 잘 알고 있다 …. 마을은 짐승들처럼 어린 소년의 목소리를 듣고 몸을 일으킬 수 없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제저녁 어떤 성인(聖人)이 마을을 향해 그 이름을 불렀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권태로 파 먹히고 있다고 위에서 말했다. 물론 이 말을 이해하자면 약간은 수고를 해 보아야 한다. 금방 납득이 가는 말은 아니기에 그렇다. 권태, 그것은 일종의 먼지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 먼지를 우리 모두는 오가면서 들이마시는데 하도 입자가 고운지라 이에 걸려도 바드득거리지 않는다. 그러나 1초라도 오가는 걸음을 멈추면 이 먼지는 얼굴과 양손을 포함해 우리를 완전히 덮어 버린다. 이런 재의 비를 털어 내려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세상은 마냥 설쳐 대는 것이다.”(8-9)

앞부분에 소설의 전체 주제가 다 나와 있는데, 프랑스 북부 특유의 늦가을, 11월의 음습한 풍경이 본당 주임직을 막 맡은 사제의 본당에 대한 가슴 절절한 사제적 사랑과 그것의 실현이 너무나 어려워 보이는 현실 사이의 간극이 잘 나타나 있다. 이후 소설은 이 연약한 사제가 어떻게 그의 연약함과 미숙함, 또한 어리숙한 사랑으로 마을 사람들을 변화시켜 가는지를 보여 준다. 필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은 소제목으로 인용한다. “신선한 짚여물을 소에게 갖다주고 나귀 털을 빗겨주라!”

▲ 토르시의 본당 신부와 시골 신부

2. 신선한 짚여물을 소에게 갖다주고 나귀 털을 빗겨주라

이 소제목은 시골 신부의 대선배이자 영적 지도자 격인 토르시의 본당 신부의 권고이다. 어떻게 보면 사제직에 관한 권고인 이 말은 시골 신부의 앞으로의 삶을 잘 예고한다. 결국 진흙탕 속에서 수많은 밤을 헤매며 감히 꿈꾸어 보기도 힘든 어떤 안식처로 자신을 안내할 주인을 기다리는 가여운 가축들은 마침내 그를 인도할 목자를, 나아가 메시아를 시골 신부를 통해 역설적으로 만나게 된다.

사실 신부를 맞이한 마을의 시간, 곧 계절은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시작에 잘 그려져 있듯이, ‘11월 25일’ 무렵이다. 곧 겨울로 건너가는 늦가을로, 교회의 절기로는 12월 25일 성탄을 향한 4주간의 대림절의 시작점이다. 그리고 신부가 마을을 찾아온 대림절로부터 시작하여 성탄절을 지나, 다시 주님의 고난이 시작되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2월까지의 기록은 신학적 메타포이다. 이 3개월 동안의 짧은 직무 수행 중 신부가 겪은 고통과 고뇌의 기록은 성자 예수의 오심과 수난, 그리고 죽음과 겹쳐진다.

아무튼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마을에 부임해 온 이 신부는, 세상 물정 모르는 순박함과 타협을 모르는 곧은 성격 때문에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한다. 그의 마음을 몰라주는 마을 사람들은 신부를 모함하고 비난의 눈길을 보내기 일쑤다. 따라서 신부는 일기 쓰기를 통해, 신앙에서 멀어지고 여러 죄악에 빠져 고통받는 영혼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독과 자기 연민까지 깊숙이 들여다본다.

말기 위암으로(신부는 아직 모른다) 쉽게 음식물을 섭취하지 못해 썩어 가는 포도주와 딱딱한 빵만으로 이루어진 자기 학대와도 같은 식사, 다른 사람들보다 연약한 신체,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는 외로움 …. 신부는 더 이상 기도를 하지 못하고 자살의 유혹까지 겪는다. 하지만 그는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거룩한 사랑, 그리고 이 사랑에서 비롯된, 세상 모든 죄악을 용서하는 위대한 믿음으로 결국 “이 모든 것이 은총”임을 깨닫고 숨을 거둔다. 너무나 나약하지만, 쉽게 무너지지 않는 고결한 인간 본성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일본의 가톨릭 작가 엔도 슈사쿠가 가장 영향을 받은 소설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의 『바보』(문학과지성사, 2020) 속 주인공 가스통은 일본으로 건너간 신부의 쌍둥이 형이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는 백작부인과 샹탈, 신부의 친구 뒤프레티와 그의 동반녀, 마지막으로 소치는 소녀 세라피타 등을 살펴보자. 이것은 사제와 마을 사람들의 관계, 나아가 교회와 세상의 관계이다. 그리고 그 관계에는 구원과 사랑이라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흔적으로 남아 있다.

1) 백작부인의 구원

▲ 신부를 만난 다음 날 세상을 떠난 백작부인

먼저 신부가 부임한 마을의 백작부인이다. 그녀는 어린 아들을 제 품에서 잃어버리고 평생을 슬픔 속에서 살아왔다. 남편의 외도에도 무심하며 딸 샹탈에게도 무관심하다.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이다. 그런 백작부인이 샹탈 양의 문제로 찾아온 신부와 논쟁 끝에 드디어 신선한 짚여물 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털을 빗겨주는 어린 목동의 고귀하고 섬세한 손길을 느끼게 된다. 신부에게 준 편지가 그 변화를 잘 보여 주고 있다.

“편지도 한 장 있었다. 아래와 같다. 이상한 편지다.

신부님, 신부님께서 저를 어떤 상태에 둔 채 가셨는지 신부님은 상상치 못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심리적 문제는 신부님 관심 밖이리라 싶습니다. 무어라 말씀드릴 수 있을지요? 그 조그만 아기에 대한 절망적 추억이 저를 모든 것에서 별리하여 무서운 고독 속에 몰아넣어 두고 있었는데 이제 다른 어린아이 하나가 이 고독에서 저를 끌어내 준 것 같이 생각됩니다. 제가 신부님을 이처럼 어린이로 취급한다 해서 새삼 감정 상하는 일이 되지는 않겠지요? 신부님은 정녕 어린이시니까요. 좋으신 주님께서 신부님을 그대로, 또 영원히 지켜주시기를!

저는 신부님이 무얼 하셨고 어떻게 하셨는지 새삼 모르겠습니다. 아니 외려 이제는 그 일에 대해 생각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되었습니다. 저는 체념이 가능하리라곤 생각지 않았습니다. 기실 이번에 저를 찾아온 것은 체념이 아니었습니다. 체념이란 제 성격에는 맞지 않는 것이고 그에 대한 제 예감이 저를 속인 적은 없습니다. 저는 체념해 저린 것이 아니라 행복합니다. 저는 이제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내일 저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저는 여느 때처럼 ×신부님께 고해하러 가겠습니다. 저는 정말 성실하게, 그러면서도 할 수 있는 대로 조심성 있게 고해하겠습니다. 그래야겠지요? 이 모든 것이 정말 단순할걸요! ‘저는 11년 전부터 나날이 매시간 희망을 거슬러 의도적으로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씀드리면 다 말씀드리는 것이 될테니까요. 희망! 바람 불고 쓸쓸하고 무섭던 어느 3월 밤에 그것은 내 두 팔에 안겨 죽었습니다…. 내 뺨 위로, 나만이 아는 부위에 나는 그것의 마지막 숨결을 느꼈더랬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제게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얻어 온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입니다. 진정 제 것인, 나만의 것인 희망, 사랑이라는 단어가 사랑받는 자와 다르듯, 철학자들이 같은 이름으로 운위하는 것과도 다른 희망이 말입니다. 내 살의 살과도 같은 희망, 제대로 형언할 수가 없군요. 제대로 표현하자면 아주 어린 아이의 말을 할 줄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일들을 바로 오늘 저녁 신부님께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럴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기는 이리 말씀 나누고 나면 저희는 다시는 이 이야기를 하지 않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영원히 말입니다! 이 말이 평화롭게 느껴집니다. 다시는 영원히. 이 단어를 쓰면서 저는 아주 조용히 발음해 봅니다. 그랬더니, 그 말은 제가 신부님으로부터 받았던 평화를 놀랍게, 그리고 숭엄하게 표현해주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나는 이 편지를 내가 지닌 『준수성범』 책(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안에 끼워 두었다. 원래 어머니가 지니셨던 낡은 책으로…”(244-246)

2) 샹탈을 구원으로 부름

▲ 집을 찾아온 신부와 대화하는 샹탈

이러한 백작 부인의 딸인 샹탈은 어머니의 무관심, 아버지와 가정교사의 불륜 속에 방황하고 있었다. 때마침 새로 부임한 신부를 찾아온 샹탈은 가정과 아버지와 교회를 저주한다. 대화 중에 신부는 의미 없이 샹탈의 주머니 속 편지를 내놓으라 했는데, 샹탈은 들킨 듯이 편지를 내놓는다. 그 부분을 찾아서 읽어 보자.

“편지는 저기, 내 탁자 위에 있었다. 내가 호주머니에서 다른 종이 한 다발을 꺼내면서 무심코 그것도 꺼냈던 것이다.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편지 생각은 더 이상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신이 쓴 편지를 내놓으시오.’라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나로 하여금 부르짖게 했던 저 거역할 수 없던 충동에 속한 무언가를 지금 새삼 내 깊은 곳에서 되찾아보려면 엄청난 집중과 의지의 노력이 필요하기까지 하다. 나의 그 말들은 과연 실체 입 밖에 나온 것일까? 확실히 모를 일이다. 두려움과 가책에 경황이 없어진 아가씨가 자기 비밀을 내게 감추는 것이 불가능해졌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제풀에 그만 그 편지를 내게 내민 것은 아닐까. 나머지는 내 상상력에서 나온 대로일 것인지 ….

나는 그 편지를 읽지 않고 막 난롯불에 던져 넣었다. 나는 그것이 타들어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불길에 뚫린 봉투에서 편지지 한 귀퉁이가 비어 나와서 금방 시꺼멓게 되었다. 글씨가 그 검은 바탕 위에서 일순간 하얀빛으로 드러났는데, ‘영원히 안녕….’ 이라는 문구를 똑똑히 보았던 것 같다.

위통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끔찍하게 또 시작되었다. 돌바닥에 드러누워 짐승처럼 끙끙거리며 뒹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해야 할 지경이다. 내가 어떤 고통을 견디고 있는지는 하느님께서나 홀로 아실 일이다. 하지만 그분이 그걸 정녕 아시는지?”(205-206)

이후 신부는 샹탈의 어머니를 찾아가 샹탈에 관해 이야기했고, 백작부인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 부분은 앞부분에 설명했는데, 백작부인을 만나 그녀의 고민을 우연찮게 해결해 준 것이다. 그리고 이제 샹탈은 그의 어머니가 변화된 모습을 보고 신부를 찾아와 논쟁한다.

“‘인생이 저를 실망시켜도 상관없어요! 저는 복수를 할 겁니다. 악은 악으로 갚겠어요.’ ‘바로 그때 아가씨는 하느님을 뵙게 될 겁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아, 물론 제 표현도 서투르고, 아가씨도 아직 어리니, 하지만 요컨대 저는 아가씨께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가씨는 세상을 등지고 길을 떠나는 것이라고. 왜냐하면 세상은 반항이 아니라 수용이고, 그것도 우선 거짓의 수용이기 때문이죠. 그러니 아가씨가 가고 싶은 한껏 앞으로 나아가 보세요. 언젠가 장벽이 무너지고 하늘이 모두 벌어져 열릴 것이니까요.’

‘신부님은… 마구잡이로… 막 말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양순한 자들이 지상을 차지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가씨 같은 이들은 그들과 그걸 두고 다투지 않을 겁니다. 가져보았자 그걸 가지고 어찌할 바도 모르니까요. 진정한 약탈자는 천국만을 약탈합니다.’ 아가씨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어깨를 들먹거렸다. ‘뭐랄까…. 신부님께 욕으로라도 응수하고 싶어요. 신부님은 저를 제 뜻과 달리 이리저리 맘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제가 원하면 저 자신을 저주하고 지옥에라도 갈 겁니다.’

저는 영혼을 걸고 아가씨를 책임지겠습니다.’라고 나는 무심결에 대답했다. 그녀는 부엌 수도에서 손을 씻고 있었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고선 일하느라고 벗어 두었던 모자를 조용히 쓰고는 천천히 나를 향해 다시 왔다. 내가 그녀 얼굴을 그토록 잘 알지 않았다면 나는 그 얼굴이 고요해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 입 귀퉁이가 약간 떨리는 것을 보았다. ‘신부님께 흥정 하나를 제안합니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신부님이 제가 생각하는 그런 분이시면….’

‘저는 마침 아가씨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이 내 안에서 보고 있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마치 거울에 비춰보듯 말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운명도 아울러 보고 있고요.’ ‘신부님이 어머니께 이야기하실 때 저는 창문 너머에 숨어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 얼굴이 너무나 … 너무나 부드러워지더군요! 그 순간 저는 신부님을 증오했어요. 아, 물론 저는 귀신도 기적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아마도 어머니는 잘 알고 있었겠지요! 어머니는 미사여구를 우습게 여기셨어요. 무슨 비결을 가지신 건가요? 그래요, 안 그래요?’

‘그것은 잃어버린 비밀입니다.’ 나는 말했다. ‘아가씨도 그것을 찾아냈다가 또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아가씨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전해 내려갈 겁니다. 왜냐하면 아가씨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이 세상이 있는 한 존속할 것이니 말입니다.’ ‘네? 어떤 부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하느님께서 친히 움직여 놓으신 부류, 그리고 모든 것이 성취되기 전까지는 결코 멈추지 않을 부류 말입니다.’”(352-354)

이제 샹탈은 구원으로 불림을 받았다. 그 응답은 소설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그녀의 어머니와 같이(또는 달리) 샹탈도 영원한 안식을 이생에서 누릴 것이다.

3) 뒤프레티의 회복과 동반녀

루이 뒤프레티는 신부의 신학교 동급생으로 건강상의 이유로 사제직을 포기하고 환속한 이다. 소설의 마지막은 뒤프레티가 신부의 임종을 지켜보고 토르시의 본당 신부에게 신부의 마지막을 설명한 편지로 끝난다. ‘릴, 19××년, 2월 ××일’에 쓴 편지이다. 중간 부분부터 인용해 보자.

“잠을 이룰 수 없었던 새벽 4시쯤 조심스레 그의 방에 가보았는데 제 불쌍한 친구가 의식을 잃고 방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그를 침대로 옮겼습니다. 아무리 조심을 했다지만 이렇게 환자를 옮긴 일이 그에게 치명적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는 이내 크게 피를 토했습니다. 저와 동서(同棲)하고 있던 사람은 의학 공부를 심도 있게 한 사람이어서(사실은 아동 결핵 요양원 청소일인데, 약간의 허영심이 엿보인다, 필자 주) 그에게 필요한 간호 조치를 해주고 그의 상태에 대해 제게 정확히 일러 줄 수 있었습니다. 예측은 더없이 암담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토혈이 그쳤습니다. 의사를 기다리는 동안 저희들의 그 가여운 친구는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굵은 땀방울이 이마와 양 뺨에서 흘러내리고, 약간 벌어진 눈꺼풀 사이로 겨우 보이는 그의 시선은 크나큰 고뇌를 표출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의 맥박이 급속히 약해져 감을 확인했습니다. 이웃집 사람이 당번 신부인 생트오스트르베르트 본당 보좌 신부에게 알리러 갔습니다. 임종하는 친구는 자기 묵주를 원한다는 것을 손짓으로 알려 주었으므로 저는 그의 바지 주머니에서 그것을 꺼내 주었고 그는 그때부터 그 묵주를 가슴 위로 꼭 모아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기를 얼마 후 그는 기운을 차린 것 같았는데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였으나 분명 저에게 사죄경(赦罪經)(1)을 청했습니다. 그의 얼굴은 보다 더 평온해졌고 미소까지 띠었습니다. 사안에 대한 합당한 판단은 저로 하여금 그의 요청에 너무 성급하게 응하도록 허락하지는 않았지만, 인정으로 보나 우정으로 보아서 그것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신부님을 전적으로 안도시킬 수 있는 올바른 감정으로 그 직무를 수행했다고 믿는 바임을 덧붙여 말씀드립니다.

사제가 여전히 당도하지 않았기에, 임종하는 이를 위해 교회가 베푸는 위로를 제 가엾은 친구가 받지 못할지도 모를 것 같다는 유감을 그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는 제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것같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자신의 손을 제 손 위에 얹으며 제 귀를 그의 입에 가까이 대라는 분명한 눈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러더니 그는 매우 느리기는 하지만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여기 아주 정확히 옮겨 적었다고 믿습니다. ‘아무러면 어떤가? 모든 것이 은총이니.’ 그런 후 그는 바로 숨을 거두었다고 생각합니다.”(409-411)

사실 뒤프레티는 허영심에 눈먼 환속 신부이다. 청소부 일을 하며 노동에 지친 그의 동반녀에게 라틴어를 가르쳐 학업을 이수시키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녀가 자신과 같은 격을 갖춘 귀부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편지 속에 나와 있듯, 그녀의 소개도 약간 과장이 깃들어 있다. 신부에게는 이웃집 사람이라고 소개하라고 한다. 아무튼 이러한 그에게 신부는 사죄경을 요청했고, 그의 허영심과 교만을 ‘은총’으로 감싸 안아 준다. 따라서 뒤프레티는 비록 시한부 인생이지만(이것은 그는 모르고, 동반녀는 안다), 그는 다시 제대로 된 사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석 달간 이 될지, 칠 일이 될지는 모르지만, 죽은 친구 신부처럼 또 다른 어느 시골에서 사제직을 수행하다가 죽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렇게 죽음과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로 이어지는 것이다. 지금도 어느 누군가에게는 ‘잃어버린 비밀’로!

여기서 더 살펴볼 이가 뒤프레티의 동반 여성이다. 그녀는 신부의 마지막 수난 자리를 지켰다. 지난날 아동 결핵 요양원에서 청소부를 하며 아이들을 돌보던 바로 그 손길로 신부를 보살피는 것이다. 그녀는 성모 마리아의 환생이다. 그 부분을 찾아 읽어 보자. 신부를 병간호하며 속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다.

“그래요. 다리로 서 있을 수도 없고 옆구리가 쿡쿡 결려서 아무것도 못 할 만큼 아프게 되면 저는 한구석에 혼자가 숨어서 –웃으실지 모르겠지만- 즐거운 일, 기운을 돋워 주는 일들을 떠올리는 대신에 제가 알지는 못하지만, 저와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을 생각한답니다. 그런 사람들은 많고도 많죠. 땅덩어리는 넓지 않습니까!

비를 맞으며 신발을 끌고 헤매다니는 거지들, 집 잃은 아이들, 병자들, 달을 보고 소리를 지르는 정신병원의 미친 사람들, 그리고 또 얼마든지 많이 있지요! 나는 그들 사이로 살그머니 기어들어가 몸을 자그마니 움츠려 봅니다. 살아 있는 사람뿐만이 아니죠. 우리처럼 힘들어 하다가 죽은 사람들, 또 장차 태어나 괴로움을 당할 사람들도 있지 않겠어요…? 그네들은 모두 말합니다.

‘왜 이런 일을 겪지? 왜 고통을 겪어야 하지?’ 저도 그들과 함께 같은 말을 하는 것 같고 그들 소리가 정말 들려오는 것 같아요. 그건 나를 흔들어 위로하는 커다란 속삭임같이 느껴져요. 그런 순간 저는 제 처지를 백만장자의 처지하고라도 바꾸고 싶지 않아요. 행복하다고 느껴지니까요. 어쩌겠어요? 자연히 그렇게 되어서 왜 그런지 이유도 따져 보지 않습니다. 저는 엄마를 닮았어요.’

(중략) 나는 어머니가 불평하는 걸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두 번 결혼을 다 주정뱅이하고 했으니 얼마나 불운입니까! 제 아버지가 더 고약했지요. 정말 아귀 같은 사내아이 다섯을 데리고 있는 홀아비였어요. 어머니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뚱뚱해지셨어요. 피가 전부 지방이 되고 말았어요. 그건 그렇다 하고, 어머니는 또 이런 말씀도 했어요. ‘아낙처럼 참을성 있는 것은 없단다. 여자는 그저 죽을 때나 드러눕는 법이다’”(398-400)

따라서 신부는 이제 불의의 희생자가 아니라, 스스로 수난에 봉헌된 자로서 자리매김한다. 그녀는 신부의 마지막 자리에서 만나 영적 교통 속에서 신부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피에타(Pietà)!(2)

▲ 신부와 뒤프레티의 동반녀의 관계는 성모와 예수의 관계이다

4) 세라피타, 구원자이자 구원받는 자

▲ 세라피타, 구원자이자 구원받는 자

세라피타는 첫 영성체 준비반에서 조숙하고 대담한 자태로 신부를 응시하고 교태와 의도적 불손함으로 신부를 곤경에 빠트리곤 했던 악동 소녀이다. 그러나 신부는 하필 이 소녀의 집 가까운 갈바 진흙 벌에서 그만 과로와 병으로 쓰러져 근처에서 소 떼를 돌보던 소녀에게서 구원받는다.

마을 곧 본당 사람들이 목동의 부름을 들은 짐승처럼 그리 쉬 일어서지 못하듯이 사제도 세라피타의 구체적 부축과 손길을 받아서야 쓰러져 있던 진흙탕에서 겨우 벗어나게 된다. 손을 내밀어 잡아주기까지 하는 목자의 실제 역할을 이 소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사제에게 수행한다. 어쩌면 세라피타는 그간의 고약함을 벗고 돌연 그 이름 세라피타에 일치하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세라핌(Seraphim, 이사야 6:2의 스랍)이라는 말은 현재 거의 천사와 동의어처럼 쓰인다. 그런데 신부를 구완하는 소녀의 자세는 피에타의 성모의 자세 –무릎으로 아들의 몸을 떠받치고 있는- 를 연상시키면서, 하느님의 보화 역할을 한 세라핌에 어원을 둔 세라피타의 이름과 지금 수행하는 행위의 일치성을 내밀한 방식으로 공고히 한다.(3)

늘 거룩함을 들먹이는 그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 악동 소녀에게서 ‘교회의 모성’을 구현하고자 한 작가의 신학적 의도는 이처럼 세미한 것들 속에서 놀랍게 구현되는 것이다. 소녀가 몰골사납게 쓰러진 신부를 향해 내민 작은 손, 그러나 일상의 가혹함에 시달린 갈라지고 거친 손이 그토록 거룩한 소명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세라피타는 신부의 구원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파피타는 또한 신부에 의해 구원받는 자가 된다. 신부를 구출한 이 아이는 온 동네 사람들에게 만취해 쓰러진 신부를 보았노라고 거짓말을 지껄이게 되고 아이는 그 거짓말을 자책하며 신부를 피한다. 신부에게서 달아나지만 그래도 여전히 목동의 역할을 하고 있는 세라피타를 신부는 기다린다. 끝내 성당으로 잃었던 귀한 손수건을 되찾으러 돌아온 세라피타, 그리고 거짓말을 한 자벌책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강하게 졸라매고 있는 노끈을 본 신부는 그것을 당장 끊으라고 명하며 주머니칼을 소녀에게 내민다. 이렇게 하여 세라피타는 구원받는다. 차책을 넘은 자학에서 해방을 이루는 것이다. 때로는 신부의 구원자로, 때로는 신부에게 구원받는 자로 세라피타는 신부와 연결된다.

3. 신학적 구조

책의 서두에 신부는 생바스트 언덕을 오른다. 길을 걷다가 이 언덕에 이르러 본당을 바라보며 어떤 성인(聖人)이 그 이름으로 마을을 불렀다는 생각한다. 생바스트(Saint-Yaast) 언덕은 프랑스 고유명사의 음가로는 ‘거룩함(Saint)’의 의미와 ‘광대한 넓은, 거대한(vaste[vast])’이라는 단어와 중의적 함의를 지닌 ‘확대(Yaast[va:st])’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곧 장음화된 동음이의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룩함이 확대되는 것, 곧 본당과 마을을 넘어 사람들을 향한 보편적 사랑의 확대라는 주제와 관련된다. 곧, 신부는 작은 시골 본당을 떠나 마지막 임종을 맞게 되는 대도시 릴에서도 여러 사람을 만난다. 암 선고를 하게 된 라빌 의사, 카페의 노동자 손님들, 뒤프레티와 그의 동반자 여인 등.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며 때로는 구원받으며 영적 동반자가 된다.

결국 소설은 사제와 시골,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구원이라는 메타포로 그려주고 있다. 때로는 구원자가 되며, 때로는 구원받는 대상이 되는 고뇌와 은총의 변증법인 것이다. 그 결과는 바로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의 이면에는 순수함이 깃들어 있다. 1935년 베르나노스는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고 후원하던 한 친구에게 편지를 썼는데, 여기에 그 내용이 잘 드러나 있다.

“아름답고도 친근한 한 작품을 쓰기 시작했네. (중략) 막 본당 사목을 맡은 젊은 신부의 일기일세. 이 신부는 열성이 지나쳐 고생을 사서하고 동분서주하며 온갖 놀라운 계획을 세우지만 물론 다 실패할걸세. 그러고도 어리석은 이들, 사악한 이들, 나쁜 놈들의 농간에 계속 걸려들겠지. 그래서 그가 정말로 패배하고 다 잃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바로 그때, 천주를 섬기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만큼 그는 그분을 섬긴 것이 될 거야. 신부의 순수함이 이 모든 것을 눌러 이기고, 그는 암으로 조용히 죽어 갈 걸세.

나는 이 작은 마을이 우리나라의 ‘압축판’이길 원하네. 거기엔 백작이 있고 부면장이 있고, 잡화상이 있고 아이들도 있어 그들 모두를 실제 보는 듯하네. 그리고 그들 가운데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 모를뿐더러 서로도 모르는 몇몇 아주 귀한 영혼들이 있다네. 그네들은 자기들도 알지 못한 채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서로 만날 걸세.”

소설 속 신부의 마지막 일기는 이렇다.

“내 영혼의 한 자락은 무감각하게 되었고 최후까지 그러리라 생각한다. (중략) 이 투쟁도 이제 끝이 났다. 이 싸움이 어떤 것이었던지도 더 이상 알 수 없다. 나는 나 자신과, 이 가련한 껍질과 화해했다.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일은 생각보다 쉬울 것이다. 은총은 자기 자신을 잊는 일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 안에서 모든 교만이 사라져 버린다면 은총 중의 은총은 자기 자신을 예수그리스도의 수난 지체(肢體) 중의 그 어느 지체처럼 사랑하는 일일 것이다.”(408-409)

이렇게 시골(세상)을 사랑했던 사제(교회)의 모습이 너무나 가슴 아리게 그려져 있다. 글 쓰는 가톨릭 신자 베르나노스의 깊은 영성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의 신학적 구조를 조잡하지만, 도식으로 그려보자.

4. 권태와 무기력, 그것을 넘어서는 관심

이 글의 마지막에 언급할 것이 있다. 바로 ‘권태와 무기력’이다. 이것은 코로나의 팬데믹 상황을 지나는 오늘 우리 한국의 개신교인들에게도 해당이 된다. 사실 이 소설은 제국주의 시대와 양차 대전 사이에 쓰였다. 기독교의 논리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 노예제와 자본주의의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시대, 그럼에도 성서에 그려진 천국보다 더 풍요로운 세상이 구현된 시대, 그러나 교회가 할 일이라곤 없고 또 먹히지도 않는 탈 기독교 과정에 접어든 20세기 초반 서구의 보편적 상황에 주인공은 절망한다.

이것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감염병 상황에 이기적으로 대처한 개신교의 모습으로 이제 탈 기독교의 과정은 20세기 초반 유럽의 상황보다 더 급속도로 한국 땅에서 진행된다. 교회를 아귀처럼 먹어 대는 이 권태와 무기력, 교만과 이기심은 바로 교인들의 권태이자 시대적 무기력이다.

그러나 소설 속 병약한 젊은 신부는 이 절망과 권태를 이기고자 버텨낸다. 그리고 힘에 부친다. 영혼에 대한 절절한 사랑으로 버텨내지만 때로는 견디기 어렵다. 그럼에도 신부는 자신의 죽음으로 완성된 신의 은총에 감사한다. 이렇게 권태와 무기력을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넘어서려는 신부의 모습 속에 진정한 사목(목회)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학식과 교양을 과시하는 신부는 언제나 개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 솔직한 심경이다. 세련된 사상을 가까이 자주 접한다는 것은 요컨대 시내에서 멋진 외식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배고픔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 코앞에서 멋진 나들이 저녁 식사를 하지는 않는 법이다.”

프랑스어로 된 가장 아름다운 작품 중 하나인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에 관해 그리스도 중심으로 역사를 새롭게 해석한 바젤 대학의 가톨릭 신학자 한시 우르르 폰 발타사르(Hans Urs von Balthasar, 1905~1988)가 연구서를 쓴 바 있다. 캐나다 퀸즈 대학교의 우크라이나 출신 슬라바 쿠쉬니르(Slava Kushnir)는 베르나노스를 실존 철학에서 정신분석 이론까지를 잇는 서양의 지성사 속에 위치시키면서, 인간 정신의 인류학자로, 키르케고르, 도스토옙스키, 가브리엘 마르셀, 마르틴 부버, 폴 틸리히, 칼 융, 멀치아 엘리아데, 질베르 뒤랑(이미지와 상상력의 사회학, 상징 인류학, 신화학으로 알려진 프랑스의 학자), 에르히 뉴만(융의 제자로, 신화의 출현 과정을 개인과 집단의 의식 발현 과정으로 이해한 그의 관점은 후대의 신화학, 발달 심리학, 여성학 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계보에 놓고 살핀다.

깊이 있는 신학, 교회사적 지식, 수도원과 신비주의에 대한 다양한 정보, 생소한 교회 전통과 용어, 20세기 초 사회정치 사상 등이 서사시처럼 전개되고 있는 이 책은 번역본을 읽으면서도 불어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그럼에도 신학과 역사에 대한 30쪽이 넘는 대화는 물론이고 “이것 보게나!”로 시작되는 토르시의 본당 신부의 욥의 친구 같은 설교도 10쪽에 이른다. 스릴러나 액션처럼 숨 막히는 빠른 전개를 보여 주는 정유정류의 현대 소설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읽어 내기 힘든 소설이다. 그러나 좋은 작품을 놓친다는 것은 인생에서 적자이다.

은퇴 후, 빛 바랜 이 책을 다시 곱씹으며 읽게 되면, 글자 한자 한자가 추억과 후회, 그리고 벅찬 감격으로 남을 것 같다. 부러운 것은 신부의 3개월 동안의 사목을 통해 구원한 사람들을 생각해 볼 때, 필자의 3년, 30년 목회가 은근히 부끄러워진다. 그런 측면에서 어느 시골 신부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미주

(미주 1) 사죄경(forma absolutionis)은 고해성사를 집전하는 사제가 참회자에게 죄를 사(赦)하는 뜻을 표시하는 형식으로, 초대교회에는 공적인 표시에 의하여 죄의 용서를 받았으므로 일정한 사죄경이 없었다. 사죄경은 중세기에 이르러 사용되었는데 이는 성사 집전 사제가 하느님께 참회자의 죄를 용서해 주기를 비는 기도형식이었다. 스콜라 철학의 융성기에 와서 사죄경은 “나는 당신의 죄를 사합니다.”라는 단언적인 형식으로 대치되어 서방교회에서 이 형식을 사용해 왔는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전례 개혁의 결과 다음과 같이 변경하여 사용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용서하기를 바라며, 나도 그분의 권한을 가지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의 죄를 사합니다. 아멘.” 이 사죄경은 개별고백을 한 참회자에게 개별사죄를 해주는 형식이다.
(미주 2) 이탈리아어로 슬픔, 비탄을 뜻하는 말로 기독교 예술의 주제 중의 하나이다. 주로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떠안고 비통에 잠긴 모습을 묘사한 것을 말하며 주로 조각작품으로 표현된다.
(미주 3) 정영란,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서두 묘사를 중심으로 살펴본 베르나노스의 이미지 연구」, 『프랑스학연구』 62(2012.11.15.), 255.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