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그 나라를 누리는 법

기사승인 2021.06.10  16:12:05

공유
default_news_ad1

- 하늘나라의 복음(출애굽기 15,22-27; 마태복음 4,23-25)

▲ 예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신다는 소식은 멀리 시리아 지역에까지 퍼졌다. ⓒGetty Image

하늘나라의 복음이란 말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란 말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고, 이것은 타당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늘나라의 복음이란 말을 기피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늘이란 말은 상징성이 풍부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땅과 함께 사용할 때 그렇습니다.

땅은 하늘을 이고 살아가지만, 하늘을 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 없는 땅은 있을 수 없습니다. 창조 이전의 땅은 하늘이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생명이 없었습니다. 땅은 하늘이 열리고서야 비로소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땅이 되었습니다. 하늘나라의 복음도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갖가지 힘들이 인간의 삶을 왜곡시키고 인간을 사회적으로 신체적으로 병들게 하고 인간의 삶은 뭇 생명들을 위협하고 땅을 아프게 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늘을 잊은 탓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복음은 하늘이 있음을 상기시키고 바로 그러한 현실을 깨닫게 합니다. 하늘을 우러르게 하고 이 땅의 현실을 바꾸는 삶의 방식으로 초대합니다. 땅을 떠난 하늘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는 이 땅을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이 잡힌 후 그의 뒤를 이어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는 사람이 가는 곳이라기보다는 사람을 향해 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세례 요한은 광야의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사유방식을 바꾸고 삶의 방식을 돌이켜 그 나라에 부합하는 삶을 살라고 합니다. 그 삶은 사람을 사랑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삶입니다. 공감하고 행동하는 삶입니다. 억압과 강탈을 멈추는 것입니다. 불의를 고발하고 정의를 추구합니다. 그러한 삶이 하늘을 아는 삶입니다.

땅의 세력들이 이러한 삶을 쉽게 수용할 리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저항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세례요한을 가둔 것은 하늘나라가 가까이 오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끝내 그는 목숨을 앗겼습니다. 그러나 땅의 세력은 하늘나라가 가까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뒤를 잇고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십니다. 모든 병자들을 고치십니다. 이것은 예수의 사역을 총괄하는 말들입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정말 기쁜 소식입니다. 그렇지만 세례요한의 경우에서 보듯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는 소식일 수는 없습니다. 짓밟히고 빼앗기는 사람들, 그러한 행위에 가책을 느끼는 사람들, 선을 추구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하늘나라가 기쁜 소식임은 당연합니다. 하늘나라는 누구도 배제하지 않지만 누구나 그 나라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며, 그 나라는 그렇게 사는 사람들에게만 열리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예수에게서는 세례 요한에게서 볼 수 없었던 일이 더해집니다. 바로 치유입니다. 예수께서는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주셨습니다.

갈릴리를 넘어 시리아 지역에까지 예수 소문이 퍼져 사람들은 갖가지 질병과 고통으로 앓는 사람들을 그에게 데려왔습니다. 천형으로 일컬어지던 병에 걸린 사람들도 데려 왔습니다. 예수께서는 사회적인 ‘질병과 장애’들뿐만 아니라 신체적인 질병과 장애들까지 고치는 것이 하늘나라의 요구임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늘나라는 이러하므로 기쁜 소식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께서 처음 계획하셨던 나라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건강한 세상을 기획하셨습니다. 그 세상의 실현이 인간의 탐욕에 의해 오랫동안 지연되어 왔는데, 세례 요한과 예수가 그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언하니 신음하는 세상에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예수와 함께 이 땅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신체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치유의 희망과 기쁨을 주셨고, 또 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건강한 자들에게 의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몸과 맘이 건강할 수 있는 조건들을 하늘나라는 채워줍니다. 우리는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고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주님을 의지하고 사는 자들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몸과 맘을 건강하게 하셔서 우리가 하늘나라에 부합한 삶을 살게 되기를 빕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자기를 치유하는 자로 나타내셨습니다. 예수께서 치유자로 오신 것도 이와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 완전히 출애굽 했을 때였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컸을 그들의 기쁨과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사흘길을 갔는데도 먹을 물이 없었습니다. 겨우 마라라는 곳에 이르러 물을 발견했지만 써서 마실 수 없었습니다. 사흘이나 물을 마시지 못했는데도 먹을 수 없을 만큼 썼다면 그 물이 얼마나 쓴 물이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 속에서는 원망이 치솟아 올랐습니다. 출애굽의 기적도 홍해를 건넌 기적도 그들의 기억에 없습니다. 지금의 고통이 그들을 견딜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모세는 무척이나 당황하고 그런 그들이 야속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이 호소를 들으시고 그 물을 고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마라는 쓰다는 뜻을 가졌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이름을 들을 때마다 자신들의 행동을 기억하고 씁쓸해 했을 것 같습니다. 동시에 쓴 물을 단 물로 바꿔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고 감사드릴 것 같기도 합니다. 자연을 고치심으로 사람을 살리신 하나님입니다.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고난 속에 있고 고통당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고치시고 바르게 하시고 그들에게 기쁨을 선물하십니다. 자연의 치유라고 할 수 있는 이 사건은 그것을 듣는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될 것입니다. 쓰디 쓴 물을 생명의 물로 바꾸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그렇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마칠 때에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먹을 것 마실 것이 없어서 하나님께 불평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불뱀들을 보내 그들을 벌하셨습니다. 더 큰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은 모세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했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청동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걸게 하고 뱀에 물린 자들이 그것을 보면 낫게 하셨습니다. 조금 의미가 다를 수 있겠지만, 여기서도 하나님은 치유자가 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치유자로 시작하셨고 치유자로 마치셨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생명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세력, 그것이 사회적이든 자연적이든, 그것으로부터 생명을 구하시는 치유자 하나님입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에 의해 이렇게 이 땅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우리를 고치시며 그 나라에 부합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합니다. 그 나라의 소식이 참으로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되기를 빕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우리의 사회가 되기를 빕니다. 건강한 땅에서 건강한 몸과 맘으로 그 나라를 함께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