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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 ❮3.13❯만세시위, 만주 독립운동의 도화선

기사승인 2021.06.05  17:2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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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정 ❮3.13❯만세시위를 일으킨 조선인 디아스포라와 순국열사들 ⑴

▲ ❮3.13❯반일의사릉 ⓒ이이소

5.18민주화운동 기념일! 6백여 명에 가까운 사망자, 3천백여 명이 넘는 부상자, 1천백 여명에 이르는 구속 및 고문 피해자들을 낸 광주 5.18민주화 운동의 피 끓었던 날로 말미암아 한국의 자유민주주가 후진하지 않고 꽃 피어 오늘에 이르렀다. 시뻘건 고통과 한으로 민주주의를 지켜 낸 피의 절규를 토하며 쓰러진 임들을 생각하며 하루 앞선 17일에 국립5.18민주묘지에 들려 참배하였다.

사진과 출생년도를 일일이 읽으며 300여기의 5.18영령들의 묘를 바라보는 마음에 눈물이 출렁거렸다. 꽃잎처럼 스러진 임들의 이름과 나이를 헤아리며 감동과 송구함으로 옷깃을 여몄다. 그러나 깨끗이 관리되고 있는 묘역과 조형물과 주변 경관과 코로나 거리두기와 우중에도 불구하고 발길이 끊이지 않는 참배객들을 보며 큰 위로를 받았다.

같은 순국열사라 해도 속해 있는 지역과 나라, 시대에 따라 국민적 관심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처사이련만 지난 주간 내내 북간도 용정 합성리 야트막한 언덕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잡초가 무성한 ❮3.13❯순국열사 묘역이 떠올리며 혼자 가슴앓이를 하였다.

잊혀진 용정 ❮3.13❯만세시위

1919년 당시는 여러 신문이 용정 ❮3.13❯만세시위를 조선의 독립운동으로 크게 기사를 다루었는데 지금은 그 독립운동이 어디에 속하는지 경계가 애매하다. 중국은 자국에서 일어난 모든 항일운동을 자국의 독립운동이라고 말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조선족의 독립운동이기에 무관심의 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북한의 용정 ❮3.13❯만세시위에 대한 인식과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 길이 없으나 남한은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는 기념하면서도 북간도 무장독립운동의 시원이 되는 용정(1) ❮3.13❯만세시위에는 그리 관심이 없어 보인다.

기회가 되는대로 ❮3.13❯반일의사릉(2)에 찾았는데 갈 때마다 마음이 안타까웠다. 묘역 바로 앞의 밭에 폐허가 된 거대한 비닐하우스 한 동이 쇠 파이프의 뼈대를 앙상히 드러내고 있었고 찢어진 넝마들이 방치되어 있어 마치 열사들이 무시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봉분의 잔디가 부분적으로 죽은데다 잡초들이 무성하고 묘지 영역이 그리 넓지 않아 보통 기념행사를 치를 때마 홍역을 치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나마 묘소가 유지된 것도 70년 동안 방치되었던 묘소를 열정을 가진 몇 분들이 고증을 통하여 찾아내어 개수, 수선한 결과라고 하였다. 그분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1999년에 ❮3.13❯만세시위 80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치루며 묘소가 성역화 되었고 ❮3.13❯만세시위의 의미가 재조명되었다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루는 동행하는 분께 ‘아래 한족의 밭을 사서 방치된 쇠파이프도 없애고 좀 엄숙하게 단장도 하고 좀 더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묘역을 넓히면 좋겠다.’는 말을 넌지시 꺼냈다. 그 분이 천천히 말을 곱씹으며 한 말이 소수민족으로 사는 조선족의 심중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 곳이 중국 한족열사들의 묘역이면 이대로 두었겠습니까? 벌써 화려한 치장을 했을 겁니다.”
“그렇지요. 이렇게 방치하는 못하지요. 그래도 항일 열사들을 기념하는 일이니 땅을 구입할 방법이 있지 않겠어요?”
그 분이 멈칫거리며 대답하였다.
“정치적으로 풀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루아침에도 구입이 가능할 겁니다.”

정치(政治)의 정(政)자도 모르는 나에게 그분의 대답은 ‘당신처럼 마음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진짜 힘과 뜻을 가진 사람이 인내심을 가지고 접근하면 풀어갈 수 있을 겁니다.’라는 말로 들렸다. 그 때부터 힘과 뜻있는 사람이 나타나길 기다리는 꿈을 꾸었으나 지금은 코로나로 가는 길이 열린 듯 닫혀 있어 묘역에 가서 넋두리하던 일마저도 못하게 되어 송구한 마음이 깊어진다. 조선의 무장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되어준 분들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3.13❯만세시위에 참여한 분들의 뒤를 따라가며 순국한 열사들의 이름을 불러 본다.

용정 ❮3.13❯ 만세시위의 모습들

최근갑은 『시련의 열매』 139쪽에서 ❮3.13❯용정시위 참여자와 규모에 대하여 말한다.

이날 3만여 명 동포들이 운집했던 것이다. 멀리는 200리 넘는 벽촌에서 하루 전에 룡정촌을 바리고 출발했고 80리 밖에 있는 소학교, 중학교 학생들도 밤을 지새우며 룡정촌에 다 달았다. 30리 밖에 있는 명동학교 300여명(3) 학생들은 군악대를 선두로 보무당당히 대회장에 들어서고 두만강 기슭의 정동중학교 사생들은 아침 일찍 떠나 제 시간에 대회장에 도착했다. 그 때 북간도 지역 거류 조선인은 27만 9,150명이었는데 그 가운데서 3만 명이나 룡정에 모여 이 운동에 참가했다.

김규철은 『길림조선족』 239쪽에서 용정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한다.

3월 13일, 날이 밝자마자 룡정촌은 들끓였다. 룡정, 연길과 원근 농촌의 반일군중과 학생들이 사면팔방에서 조수 마냥 룡정촌에 모여들었다. 덕신사, 지신사 등 각지의 수천 명의 군중들은 명동학교에 모인 후 이 학교 학생들을 선두로 호호탕탕하게 룡정으로 진출하였다. (…) 개산툰 정동학교의 사생 100여 명이 굉장한 악대를 무어가지고 일제히 대고, 소고를 울리고 ❮대한독립만세!❯, ❮일본 침략자는 물러가라!❯ 등 구호를 높이 부르며 하루 밤을 꼬박 걸어 아침 8시 남짓하여 룡정 대회장에 이르렀다. 대회장은 룡정촌 북쪽(지금의 기차역 남쪽)의 평탄하고 넓은 조밭에 설정되었다. 대회장은 벌써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그야말로 류례 없는 성황이였다. 달라자, 장인강, 동성용, 동불사, 의란구, 월청구, 화첨자, 위자구, 석현, 연길 등지에서 모여온 학생과 농민 3만여 명이 대회장에 운집하였는바 당시 룡정촌의 총인구를 훨씬 초과하였다.

장문호는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1: 개척』 470쪽에서 <3.13>에 모인 군중에 대하여 설명한다.

3월 13일은 룡정에 장이 서는 날이었다. 룡정시의 조선족들은 물론 국자가, 투도구, 대립자 등지의 남녀 학생들, 늙은이들, 어린이들까지 회장에 모여들었다. (…) 맹부덕(4)은 그13일 새벽부터 룡정의 거리마다 보초를 세우고 순라대를 조직하여 집집에 걸어놓은 태극기를 뽑아버리고 행인을 수색하였으며 룡정으로 들어가는 네 갈래의 대통로를 다 차단하여 군중들이 대회장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반일 격정에 들끓는 군중들은 군경들의 총칼에도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물밀 듯이 룡정촌에 밀려들었다. 정오가 가까워오자 회장에 모인 군중이 무려 2만여 명에 달했다. 그들 중에는 화룡현 명동학교, 정동학교의 교원과 학생을 중심으로 하여 조직된 320명의 ❮충렬대❯대원들과 국자가 도립중학의 조선족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1,000여 명의 자위단원들이 있었으며 훈춘과 안도지방에서 하루 앞당겨 룡정에 온 용사들도 있었다. 회의 장소는 상부지의 영신학교의 앞 공지였다.

김동섭과 임종섭은 일송정 제7기에 게재한 ❮유서 깊은 혁명의 마을, 금곡❯ 66쪽에서 <3.13>만세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종성 대안의 북쪽에 위치한 지신사, 덕신사, 용지사에 속한 마을에서 모인 사람들에 대하여 적고 있다.

3월 13일, 이날은 룡정촌의 장날이였다. 금곡사립원동(元東)학교 3학년 이상 학생들과 장동(長洞)의 창동(彰東)학교 3학년 이상 학생들은 명동학교에 집합하였다. 금곡, 영동, 장동 등 여러 마을의 청장년, 부녀들(5)은 날이 밝기 전부터 떠날 준비를 하였다. 그들은 장꾼으로 가장하고 마을을 나섰다. 덕신사와 지신사의 수천 명 군중은 명동학교, 원동학교, 창동학교(6) 학생들의 대렬을 따라 호호탕탕하게 룡정으로 출발하였다. 그 대오는 룡정에 이르자 평강방면에서 온 수천 명 대오와 회합해서 대회장으로 들어갔다. 회장은 룡정촌 천주교회당(7) 광장에다 정했는데 학생과 군중 3만여 명이 회장에 운집하였다.

양소전 외 3인은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165쪽에서 3월 13일에 모인 군중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날이 밝기 전에 룡정은 사람들로 들끓었다. 룡정, 연길과 원근 여러 향촌의 조선족민중과 학생들이 사면팔방에서 조수마냥 룡정촌으로 밀려들었다. 덕신사와 지신사 등지의 조선족 민중들은 명동학교 학생들을 선두로 하고 룡정으로 출발하였으며 룡정에서 평강으로 온 민중들과 회합하였다. 개산툰 정동학교의 교원들과 학생들도 악대를 선두로 주악을 울리고 반일구호를 높이 부르면서 장밤을 걸어서 아침 8시에 룡정에 당도하였다. 같은 시각에 대랍자, 장인강, 동성용, 동불사, 조양천, 차조구, 로두구, 명월구, 두도구, 의란구, 월청촌, 화첨자, 위자구, 석현, 연길 등지의 학생들과 군중들도 대렬을 지어 룡정으로 들어왔다.

용정 ❮3.13❯만세시위에 대한 진압

원 모임의 장소는 상부지 밖의 캐나다 장로회에 속한 영신학교 앞마당이었으나 11시 30분경에 두도구에서 오는 민중들이 대대적으로 밀려와 사람들은 원 자리에서 밀리고 밀려 500여 미터 떨어진 서전대야에서 모이게 되었다.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조선독립축하식이 대회장인 국자가교회 김영학 목사(8)의 사회로 거행되었다. 그가 ❮간도거류조선민족 일동❯의 이름으로 ❮독립선언포고문❯과 ❮공약삼장❯을 읽고 나자 유인물이 대회장 상공에 뿌려졌고 만세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이어서 류례군(조선독립운동의사부 팔도구지역 책임자. 철혈광복단 회원, 한족독립기성총회 의사부원), 배형식(조선독립축하식 부대회장, 한족독립기성총회 의사부원), 서성권(창동학교 교사, 한족독립기성총회 재무부원), 고동환(조선독립운동의사부 평강지역 책임자, 철혈광복단 회원)과 황지영씨가 차례로 일본제국주의 만행을 고발하여 규탄하였다.

축하식 행사가 끝난 후, 시위대는 오장기를 앞세우고 출발하였다. 그 뒤를 정동과 명동학교 학생들과 교원으로 구성된 300여명의 충렬대가 따랐다. 박문호, 채창헌, 최익선은 충렬대 지도자로 학생들을 보호하며 측면에서 지도하였다. 시위 대오는 “일제의 침략을 반대한다!”, “친일주구를 타도하자!”를 외치며 일본 간도총영사관으로 향하였다. 용정 상부지로 조수처럼 밀려오는 시위행렬에 아연실색한 중국군 맹부덕 퇀장은 발포명령을 내렸다.

오장기 기수였던 공덕흡이 쓰러지자 박상진, 김태균, 박문호, 채창헌, 최익선이 차례로 오장기를 일으켜 세우며 총탄에 쓰러졌다. 그 자리에서 10명의 열사가 순국하였고 3월 17일 장례식 전에 제창병원에서 4분이 순국하였다. 나머지 5분은 장례식 후에 순국하여서 ❮3.13❯만세시위로 총 열아홉 분의 열사가 순국하셨다. 뿐만 아니라 48명이 부상을 당하였고 94명이 체포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인구 25만여 명의 북간도 조선인 사회는 비탄과 분노에 잠겼으며 무장 투쟁 없이 조선독립이 불가하다는 의식이 공유되며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조선독립축하식으로 ❮3.13❯모임을 주도했던 ❮조선독립운동의사부❯가 그날로 ❮조선독립기성총회로 이름을 바꾸며 희생된 열사들을 위하여 17일에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4천여 명의 조선인들의 애도와 비분 속에서 열사들은 용정의 동남교외에 자리 잡고 있는 합성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며 묘 앞에는 ❮충렬자제공지묘❯(忠烈者諸公至墓)라고 새긴 비석이 세워졌다.

연변에서 발행된 독립신문에 장례식이 아래와 같이 보도되었다.

허청리(합성리)에 공동묘지를 정하고 제창병원으로 발인하야 나아갈 제 혹은 담군(擔軍)이 되고 혹은 집불하야 14의사의 소여는 천흡귀곡 중에 차제로 행진한다. 묘지에 지하야 야소교례식(9)을 집행할 새 상장(喪章)을 전한 우리 남녀는 4,000여 명이오. 또 차석에 래참한 영국인 남녀는 더욱 충혼의백을 조위하야 한감의 정을 크게 표한다. 14의사의 부형은 일국(一掬)의 루(泪)도 하(下)치 아니하고 회중에게 향하여 크게 말한다. 그네들의 말이 ‘나의 자제가 한국을 위해 낫다가 한국을 위해 죽었으니 가한(可恨)이 있으리오’ 한다. 회중은 큰 감동을 수(受)했다.(10)

❮3.13❯만세시위가 도화선이 되어 독립만세 시위의 불길이 전 만주에 들불처럼 퍼져나갔고 3월 13일부터 5월 1일까지 만주의 조선인들은 15개현에서 73 차례의 항일집회와 시위를 벌였으며 참가자 수는 무려 10만 5,850명이나 된다. 3월 13일부터 5월 중순까지 북간도에서만 54차의 집회와 시위가 있었으며 참가인원은 7만 6천여 명에 달하였는데 이는 당시 연변 거주 디아스포라 조선인구 25만4천여 명의 36.6%에 해당된다. 그 후 북간도에는 ❮대한국민회❯, ❮대한독립군❯, ❮북로군정서❯, ❮의민단❯등의 30개에 이르는 무장독립단체가 조직되어 활발하게 국내침공작전을 벌이며 무장독립운동의 시대를 꽃피웠다.

미주

(미주 1) 용정과 룡정 : 한국 측의 기록은 “용정”이지만 중국 조선족 측의 기록은 “룡정”이다. 본 글에서는 중국 자료를 그대로 인용할 때는 존중하는 의미에서 그대로 “룡정”으로 쓴다.
(미주 2) ❮3.13❯반일의사릉: 중국 역사가들은 민족주의자들의 저항운동은 반일운동으로, 공산주의자들의 저항운동은 항일운동으로 기록한다.
(미주 3) 300명의 숫자는 명동학교와 정동중학교 학생들을 합한 숫자이며 두 학교는 함께 “충렬대”를 조직하였다. 『륙도하』, 123쪽,
(미주 4) 맹부덕: 당시 맹부덕은 길림 육군 2려 10퇀 퇀장으로 ❮3.13❯만세시위를 저지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미주 5) 1919년 ❮3.13❯만세시위 당시 부녀들을 대대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곳은 교회 밖에 없었다. 그러나 20세기 처음 20여 년 동안 교회가 북간도 독립운동을 주도한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연변의 학계는 교회의 활동과 영향력에 대하여 일체 침묵하며 그 빈자리를 메꾸기 위하여 그 공로와 업적을 소수의 사립학교 설립자들과 조기 공산주의자들에게 돌리고자 그들의 공로를 지나치게 과장하였으며 어떤 경우에는 실제 년도를 일체 무시하는 방법으로 기술하고 있다.
(미주 6) ❮3.13❯만세시위에 참여한 창동학교가 2개다. 여기서 말하는 창동학교는 장동(長洞)의 창동(彰東)학교 이고 다른 창동학교는 와룡동에 있는 창동(昌東)학교이다.
(미주 7) 대회장소는 영신학교 앞마당이었다.
(미주 8) 김영학 목사: 연변지역 크리스천들 1919년 독립운동을 모색하기 위해 2월 18일과 20일에 걸쳐 모인 회합에서 연변지역을 5개구로 나누었으며 김영학목사는 리홍준, 박동원, 리성금과 함께 연길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3월 13일 조선독립축하식의 대회장을 맡아 행사의 사회를 진행하였다. 철혈광복단의 회원이기도 하였다.
(미주 9) 당시 캐나다장로회 선교병원인 제창병원에 순국자들과 부상자들을 모셨다. 대부분의 순국자들이 크리스천이었으며 장례예배는 캐나다장로회 교회가 주관하였다.
(미주 10) 최근갑, 『시련의 열매』, 145-146.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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