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누가 이스라엘의 왕을 결정했는가

기사승인 2021.06.03  15:17:16

공유
default_news_ad1

- 이스라엘 역사 알기 ㊱

솔로몬의 왕위 계승

지난 글에서 언급했지만, 초기 왕정 시대에 대해 살펴볼 때, 고고학적 자료는 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자료 자체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있는 자료들은 성경과 충돌되는 경향을 보이곤 합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글을 보면, 일부는 고고학적 자료를 성경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시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일전에 언급했던, ‘르호보암’ 시절 이후인 주전 9세기에 건설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요새들의 흔적을 보면서, ‘솔로몬’ 시절의 기술이 있었기에 이런 요새화가 가능했다는 식의 해석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반대로 고고학적 자료들을 통해 성경을 비판합니다. 어떤 학자의 표현처럼 ‘솔로몬’은 너무나 완벽한 왕으로 그려졌기에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보기도 합니다. 이들은 ‘솔로몬’ 뿐만 아니라 ‘다윗’의 이야기도 후대 역사가에 의해 과장된 이야기라고 판단합니다. 우리나라 조선 시대에 간행된 「용비어천가」가 극도로 과장되어 서술되어 있기에 신뢰도가 떨어진다고 판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윗’과 ‘솔로몬’의 이야기를 바라봅니다.

학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초기 왕정 시대를 설명해나가든지, 그들의 선택에 따른 결과물이겠지만, 분명한 점은 한 가지입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자료 중에서 이 시기를 설명하고 있는 가장 방대한 자료는 성경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중심으로 초기 왕정 시대를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솔로몬’ 시대에 관해서 성경을 살펴볼 때, 「열왕기」의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편이 좋다고 판단됩니다. 「열왕기」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이유는, 「열왕기」 안에 나타난 ‘솔로몬’의 이야기가 꼭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역대기」의 경우, ‘솔로몬’에게 부정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이야기는 삭제된 채 나타나지만, 「열왕기」에는 긍정적 언급과 함께 부정적 언급이 함께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런 극단적 언급들 속에서 ‘솔로몬’ 시대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열왕기」를 읽으신 분들은 ‘솔로몬’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는 부분에서 약간의 찝찝함을 느끼게 됩니다. 「열왕기상 1장」은 ‘솔로몬’의 왕위 계승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되는데, 그 내용이 지혜의 왕이자 이스라엘에 영광을 가져온 ‘솔로몬’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기에는 조금 아름다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왕위 등극은 아버지 ‘다윗’의 사후 영광스러운 대관식이 이루어지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의 측근들 안에서 파벌이 생겨나고 그 파벌의 권력 투쟁 속에서 ‘솔로몬’이 왕으로 등극했다고 말합니다.

‘솔로몬’의 왕위 등극은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위에 오른 일은 있었지만, 지난 글에서 살펴본 바대로 그가 모든 지파의 인정을 받은 왕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의 왕위 계승은 단일 혈족에 의한 왕위 계승이 처음으로 시행된 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이는 앞서 살펴보았던 지파 연합이 왕을 세웠던 방식이 깨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지파 연합이 왕을 세우는 방식이 지파 총회를 열고 지파 대표들의 의견으로 왕을 인정하거나(다윗의 경우), 하나님의 뜻을 물어서 왕을 선출하는 방식(사울의 경우)이었다면, ‘솔로몬’의 왕위 등극 과정에 지파 연합은 나타나지 않고, 형제의 난, 또는 권력 집단의 정쟁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생각해볼 문제는 혈족에 의한 왕위 계승이 이루어진 경험이 없던 이스라엘 초기 왕정 사회에서 장자에 의한 왕위 계승이 당연하게 여겨졌는가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이에 큰 관심이 없어 보이지만,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장자 계승을 상상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 시작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서 출발합니다.

「사무엘하 3장 2-5절」에는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들의 명단이 나타납니다. 명단 이후로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을 빼고 본다면, 맏아들은 ‘암논’이고 ‘압살롬’은 셋째, ‘아도니야’는 넷째입니다. 「사무엘하 5장 13-16절」에는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들의 명단이 이어지는데, 앞선 명단과 합쳐서 생각해본다면, 솔로몬은 ‘다윗’의 열 번째 아들입니다.

‘암논’이 ‘압살롬’의 남매 ‘다말’을 강간한 사건으로 인해 ‘다윗’의 맏아들이었던 그는 셋째인 ‘압살롬’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만약 이들에게 왕위 계승이 장자에게 이루어진다는 생각이 있었다면, 다음 왕위 계승권자는 ‘다윗’의 둘째 아들인 ‘길르압’입니다. 하지만 ‘길르압’은 「사무엘하 3장 3절」에서의 언급 이후에 사라져버립니다.

▲ 압살롬의 연회 ⓒ위키피디아

위의 그림은 이탈리아 출신이면서 프랑드르 화파(Flemish painter)에 속하는 ‘니콜로 드 시모네(Niccolò de Simone, ?~1677년경)’가 1650년경에 그린 ‘압살롬의 연회’입니다. 연회를 가장하여 ‘암논’을 초대한 후에 그를 살해하는 ‘압살롬’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만약 왕위의 장자 계승 원칙이 있었다면, ‘암논’의 죽음 이후 왕위 계승권자는 ‘다윗’의 둘째 아들 ‘길르압’이 됩니다. 하지만 그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전혀 언급되지 않기 때문에 그에 관한 정보는 알 수가 없습니다. 또 그는 왕위 계승에 관한 어떤 이야기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만약 ‘길르압’의 존재가 없고, ‘압살롬’이 ‘다윗’의 둘째였고, ‘아도니야’가 셋째였다면, 장자 계승 원칙이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다윗의 둘째 아들이 ‘길르압’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왕위 계승자는 맏아들이라는 생각을 하기에 생긴 오해이겠지만, 「사무엘」과 「열왕기」는 장자에 의한 왕위 계승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는 분열 왕국 이후의 왕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는 관성적으로 장자에 의한 왕위 계승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지만, 당시 이스라엘에서 왕위가 장자에게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다윗’과 ‘솔로몬’ 시대까지만 해도 카리스마적 지도자, 영웅적 지도자를 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백성이 아닌 선왕의 선택

‘암논’의 죽음 이후 ‘압살롬’이 ‘다윗’의 왕위를 노리기 시작했을 때, 그의 행동은 주목할만 합니다. 그는 아버지 ‘다윗’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습니다. 「사무엘하 15장 1-6절」은 ‘압살롬’이 성문 앞에 앉아 ‘다윗’을 대신해 재판을 해주면서 이스라엘 여러 지파 사람들의 마음을 훔쳤다고 말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잠시 후에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볼 문제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사무엘하」에 나타난 ‘압살롬’은 여러 지파 사람들의 환심을 사야 왕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고 행동했습니다. 「사무엘하 15장 12절」은 그의 행동으로 인해 백성 중에서 그를 따르는 이들이 늘어났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생각한다면 ‘다윗’의 넷째 아들 ‘아도니야’도 ‘압살롬’과 비슷한 방식을 취합니다. 「사무엘하 15장 1절」에 따르면 왕위를 노린 ‘압살롬’은 병거와 말을 준비하고 호위병 50인을 자신의 앞에 세운 상태로 성문으로 나아갑니다. 「열왕기상 1장 5절」에 나타난 ‘아도니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도 병거와 기병과 호위병 50명을 준비하였고 스스로 왕이 되리라고 선전하였습니다.

‘압살롬’과 ‘아도니야’가 자신의 사병을 대동한 이유는 백성들 앞에서 무력을 과시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아버지 ‘다윗’이 아닌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아도니야’의 이런 행동에 대해 ‘다윗’은 침묵합니다(왕상1:6). ‘다윗’이 ‘아도니야’의 행동을 질책하지 않았다는 말은 어느 정도 그를 후계자로 받아들였다는 암묵적 동의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압살롬’, ‘아도니야’와는 다른 방식을 취합니다. 정확하게는 ‘솔로몬’이 아니라 ‘솔로몬’의 어머니인 ‘밧세바’와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던 집단의 방식이었습니다. 이들은 민심을 얻기 위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선왕인 ‘다윗’에게 왕위 계승권을 인정받으려고 노력합니다(왕상1:11-31).

‘다윗’ 통치 후반기에 지파 연합과 지파 총회의 권력이 완전히 소멸되고 모든 권력이 왕에게만 집중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르호보암’ 시기 지파 총회가 다시 개최된 점을 본다면, 이들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오히려 ‘솔로몬’의 왕위 등극 과정이 초기 왕정 시대에 있어서 특이한 경우라고 봐야 합니다.

또 ‘밧세바’가 말하는 ‘다윗’의 맹세가 어떤 것인지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예언자 ‘나단’과 ‘밧세바’가 ‘다윗’을 설득하는 이야기 전체가 ‘솔로몬’의 왕위 등극을 정당화하기 위해 창작된 이야기인지, 실제로 ‘다윗’이 ‘밧세바’와 약속한 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약속이 다윗의 모든 신하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공인된 것은 아니라는 점만이 분명해 보입니다.

▲ 솔로몬의 왕위 등극 ⓒ위키피디아

위의 그림은 1777년 안드레아스 브루거(Andreas Brugger, 1737-1812년)가 독일 바트 부르차흐(Bad Wurzach)에 있는 성 베레나 성당(Pfarrkirche St. Verena)에 그린 프레스코입니다. 그림 속에서 솔로몬의 왕위 등극은 천상의 축하와 백성들의 환호 속에서 이루어지며, 솔로몬은 성전 모형도를 보며 성전 건축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열왕기상」에 나타난 솔로몬의 왕위 등극 장면은 이렇게 아름답진 않았습니다.

정적의 제거

‘솔로몬’의 왕위 등극 과정이 나타난 「열왕기상 1-2장」을 보면, 1장에서는 ‘솔로몬’의 역할이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솔로몬’이 행한 일은 죽임당할까 도망쳐서 제단 뿔을 잡았던 ‘아도니야’를 살려준 것뿐입니다. ‘솔로몬’의 적극적인 행동이 나타나는 때는 ‘밧세바’와 ‘아도니야’의 밀약이 성사된 후였습니다(왕상2:13-25). 그 이후로 ‘밧세바’의 역할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솔로몬’의 왕위 등극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열왕기상 2장 46절」의 마지막 문장은 조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은 ‘이에 나라가 솔로몬의 손에 견고하여지니라’로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이미 「열왕기상 2장 12절」에 나타난 구절로, 같은 이야기가 반복됩니다.

그래서인지 70인역 헬라어 성경은 이 구절을 다음 이야기의 시작으로 옮깁니다. ‘솔로몬’의 왕위 등극 과정에서 같은 구절이 반복해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다음 이야기를 여는 표현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실제 ‘다윗’이 죽기 전에 했던 이야기인지 알 수 없지만, 「열왕기상 2장 1-9절」은 ‘다윗’의 마지막 당부와 함께 ‘요압’과 ‘시므이’에 대한 저주가 나타납니다. ‘다윗’의 죽음 이후 「열왕기상 2장 13절」 이후에는 ‘솔로몬’이 자신의 정적들을 죽이는 이야기가 나타나는데, ‘요압’과 ‘시므이’의 경우에는 마치 ‘솔로몬’이 ‘다윗’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이들을 죽인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가장 큰 적대자였던 형 ‘아도니야’를 먼저 죽입니다. ‘아도니야’를 죽이는 상황 속에서 나타난 ‘솔로몬’의 말은 ‘아도니야’가 여전히 왕위를 노리고 있었음을 알게 합니다. ‘아도니야’가 그런 마음을 품고 있지 않았을지 몰라도, ‘솔로몬’은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또 여기에는 ‘요압’과 ‘아비아달’이 동조하고 있었습니다(왕상2:22).

‘솔로몬’이 제사장 ‘아비아달’을 추방하면서, 그를 향해 ‘마땅히 죽을 자’라고 말하는데(왕상2:26), 그것은 아마도 ‘아도니야’와 함께 왕위를 찬탈하려고 했다는 혐의였을 것입니다. 학자 중에는 ‘아도니야’가 ‘다윗’의 마지막 아내인 ‘아비삭’을 아내로 달라고 했던 행위가 왕위 찬탈을 위한 야심을 드러내는 일이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가 이를 용인했다는 사실을 함께 본다면, 그것이 꼭 왕위 찬탈을 위한 단계였는지는 모호한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압살롬’이 ‘다윗’으로부터 예루살렘을 빼앗은 이후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다윗’의 후궁들과 잠자리를 가졌던 모습을 생각해 본다면(삼하16:21f), 아버지 ‘다윗’의 마지막 후궁을 요구하는 ‘아도니야’에게도 비슷한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아도니야’의 본래 의도가 무엇인지 분명하진 않지만, 최소한 알 수 있는 점은, ‘솔로몬’의 왕위 등극 이후에도 ‘요압’과 ‘아비아달’이 ‘아도니야’의 편에 서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들은 ‘아도니야’와 함께 처형되거나 추방당하게 됩니다.

이후 ‘솔로몬’은 ‘다윗’의 유언에 나타난 두 번째 인물 ‘시므이’를 처형합니다. ‘시므이’는 ‘사울’의 친족입니다(삼하16:5). 따라서 ‘솔로몬’이 ‘시므이’를 처형했다는 이야기는 단순히 과거에 ‘다윗’을 저주했던 사람에 대한 복수로만 읽을 수 없습니다. ‘시므이’의 처형은 여전히 ‘사울’의 흔적을 쫓으려 했던 집단에 대한 ‘솔로몬’의 압력 행사로 읽어야 합니다.

‘솔로몬’이 자신의 정적들, 왕권 찬탈의 가능성을 가진 무리, 자신을 지지한 파벌과 대립하던 무리,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을 지지하는 무리를 제거한 후에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손에 견고해집니다. 마소라 본문의 마지막 구절은 솔로몬의 왕위 등극이 평화로운 합의 절차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무력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암시합니다.

‘솔로몬’의 철권통치(鐵拳統治)는 그의 왕위 등극 이야기에서부터 나타나 있습니다. ‘솔로몬’이 통치하던 시절 지파 연합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이유, ‘솔로몬’ 사후 그들이 다시 모였던 이유는 아마도 이런 ‘솔로몬’의 철권통치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재판하는 능력

글의 분량상 다음 글에서 이어서 살펴보게 되겠지만, 초기 왕정 시대에 ‘다윗’과 ‘솔로몬’의 역할은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영토 확장을 이루었다면, ‘솔로몬’은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을 더 이상 수행하지 않습니다. 

「열왕기상 9장 15-28절」에 나타난 ‘솔로몬’의 업적은 그가 넓은 땅을 점령했다는 느낌을 주지만, 이 지역들은 ‘다윗’ 때에 정복된 지역입니다. ‘솔로몬’은 적대국들과의 관계 속에서 요새 건축 작업을 합니다. 지난 글 「이스라엘 역사 알기 ㉟ ‘이스라엘 왕국의 실제 모습은 무엇이었나’」 에 ‘사울’과 ‘다윗’ 시절의 이스라엘 지도를 첨부했는데, ‘솔로몬’ 시절 이스라엘은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열왕기상 9장 10-14절」에 따르면, ‘솔로몬’이 두로 왕 ‘히람’에게 갈릴리 지역 성읍 20곳을 내어줍니다. 그렇다면 ‘다윗’ 시절의 지도에서 갈릴리 주변의 북부 지역은 이스라엘의 영토에서 빠지게 됩니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글에서 이어서 적으려고 합니다. 다만 ‘다윗’과 ‘솔로몬’의 차이점 중에서 한 가지, 재판에 관련된 부분만 잠시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무엘」이 그리고 있는 ‘다윗’은 전쟁에 능한 용사였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상황을 보면, 그의 재판 능력은 상당히 빈약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의 맏아들 ‘암논’이 이복남매 ‘다말’을 강간했을 때, ‘다말’은 이에 대해 고발하는 행동을 취합니다(삼하13:19). 하지만 ‘다윗’은 이 사건을 듣고 분노했을 뿐,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습니다(삼하13:21). 분노할 정도의 사건이 벌어졌고, 이를 인지했지만 ‘다윗’은 침묵합니다. 그의 판단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압살롬’은 이런 결과가 일어날 줄 알았기에 ‘다말’을 말렸는지도 모릅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압살롬’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행한 일은 왕을 대신하여 재판을 보는 일이었습니다. 「사무엘하 15장 3절」에서 ‘압살롬’은 재판을 청구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송사를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이는 ‘다윗’의 판단 능력을 부정하는 말인데, ‘다윗’에게 재판을 청하러 왔다가 ‘압살롬’의 판결을 들은 이들은 ‘압살롬’에게 마음을 뺏깁니다. ‘다윗’의 판결보다 ‘압살롬’의 판결이 사람들에게 좋아 보였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에 대해 살펴보면서 더 다루게 되겠지만, ‘다윗’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가족, 자신이 좋아하는 특정 인물들에게는 선하게 대하고, 약간이라도 적대 관계에 있는 이들에게는 철저하게 응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판단은 약간 치우친 면이 있었습니다.

이런 다윗과 대조적으로 ‘솔로몬’은 왕이 된 직후 하나님으로부터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받습니다. ‘솔로몬’이 꿈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 그의 지혜로운 재판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은 열왕기 역사가의 의도된 편집입니다.

▲ 솔로몬의 재판 ⓒ위키피디아

위의 그림은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년)’가 1617년경에 그린 ‘솔로몬의 재판’입니다. 그림의 원본은 벨기에 브뤼셀(Brussels)에서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습니다.

어떤 학자는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나 ‘스바 여왕’의 방문 이야기가 ‘솔로몬’을 칭송하기 위한 보기 좋은 이야기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는 그가 아버지 ‘다윗’과 구분된다는 점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다윗’이 가진 것이 무력이었다면, ‘솔로몬’은 지혜를 가진 왕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에 관한 이야기는 ‘다윗’과 ‘솔로몬’을 구분 지으며, 한편으로는 ‘솔로몬’을 칭송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지혜로운 왕이 왜 자기 백성에게 강제 노역을 시켜서 국가 분열의 원인을 만들었는지, 왜 이렇게 건축 사업에 몰두하여 성읍 20개를 두로에 넘겨야 할 정도로 국가 재정을 적자 상태로 만들었는지 등을 묻게 됩니다.

다음 글에서는 ‘솔로몬’이 펼친 정책들과 그가 이룬 것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그와 동시에 앞선 질문들에 성경은 어떤 대답을 들려주고 있는지, 또 우리는 어떤 대답을 찾을 수 있을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joey8100@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