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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왕국의 실제 모습은 무엇이었나

기사승인 2021.05.27  16: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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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역사 알기 ㉟

초기 왕정의 시대

이제 ‘사울’, ‘다윗’, ‘솔로몬’에 의해 통치된 이스라엘 초기 왕정 시대를 살펴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솔로몬’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을 다루기에 앞서 이스라엘의 왕정이 어떻게 시작되고 발전되었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왕정이 시작된 직접적인 이유에 관해서는 ‘사울’에 대해 살펴볼 때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이번 글에서 생각해보고자 하는 점은 왕정이 시행된 방식입니다.

「사무엘하 5장 4절」과 「열왕기상 11장 42절」에 따르면 ‘다윗’과 ‘솔로몬’은 각각 40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40이라는 상징적인 숫자(노아의 홍수 40일, 출애굽 40년 등)로 기록된 이들의 통치 기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조금 거부감이 들긴 합니다. 하지만 통치 기간이 기록되지 않은 ‘사울’을 포함하여 세 사람의 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기간은 대략 100년 가까이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주전 1029-930년경).

‘사울’에서 시작되어 ‘다윗’과 ‘솔로몬’에 의해 다스려졌던 이스라엘은 ‘르호보암’ 시기에 북왕국과 남왕국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르호보암’ 직전까지 이스라엘은 하나의 단일 국가이고 통일 왕국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표현은 이스라엘의 남북분열을 전제하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초기 왕정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이스라엘 초기 왕정 시대를 재구성할 때 약간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이 시기는 지금까지 살펴본 어떤 왕들의 역사보다 더 많은 분량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사울’에 관한 기록은 「사무엘상 8-31장」과 「역대상 9-10장」에 나타납니다. ‘다윗’은 「사무엘하 1장-열왕기상 1장」과 「역대상 11-29장」, ‘솔로몬’은 「열왕기상 1-11장」과 「역대하 1-9장」에 나타납니다.

상당히 많은 분량의 기록이 구약 성경 안에 남겨져 있어서 이 시기에 관한 많은 연구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벗어나서 살펴보았을 때, 이 시기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가 절망스러울 정도로 없습니다. 이스라엘 외부에 있는, 이집트와 같은 타국의 자료에서 초기 왕정 시기 이스라엘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없습니다.

또 이스라엘 지역 내부의 유적들은 성경의 기록과 조금 동떨어진 현상을 보여줍니다. 주전 10세기 즈음에 이스라엘 일부 지역이 요새화 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이 건축 흔적은 ‘르호보암’ 시대 이후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부 학자들은 ‘솔로몬’ 시절의 건축 기술이 있었기 때문에 ‘르호보암’ 시절에 요새 건설이 가능했다고 말하지만, 이는 성경을 바탕으로 한 추측일 뿐입니다. 초기 왕정 시대에 관해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바와 같이 ‘다윗’과 ‘솔로몬’에 의한 특별한 활동을 확인할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성경과 고고학적 자료가 충돌하는 현상은 더 앞선 시대에서도 발견됩니다. 저희가 출애굽 사건을 다루면서 조금 더 살펴보긴 하겠지만, 고고학적으로 출애굽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집트에서 살고 있던 대규모 집단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곳에 정착하였다면, 정착 이후에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지층에서 이전의 생활 양식과 다른 양식의 흔적이 발견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대부분 지역에서 청동기 이후부터 철기 초기까지 그런 변화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청동기 시대 특정 도시가 파괴된 흔적은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도시가 파괴된 이후 그들의 생활 양태가 파괴 이전과 달라진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주전 13-12세기 경에 파괴되었던 도시들, 대표적으로 므깃도와 같은 도시는 파괴 이후 재건되는데, 이전의 생활 양식을 그대로 이어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는 새로운 인구의 유입으로 인해 도시가 재건된 것이 아니라, 특정 이유로 인해 도시가 파괴되었다가 원래 구성원들이나 이들과 밀접한 이들에 의해 재건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이와 대조적인 모습은 우리가 블레셋 지역이라고 알고 있는 해안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전 13-12세기에 가나안 땅에 유입된 해양 민족은 해안 평원 지역에 정착합니다.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토기는 이전까지의 가나안의 형태가 아닌 에게해나 동부 지중해의 형태를 띱니다. 이는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인구가 유입되었음을 보여줍니다.

▲ 블레셋 토기 ⓒ위키피디아

출애굽에 관해서는 다양한 가설이 존재하고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살펴볼 것입니다. 다만 고고학을 중심으로 연구하는 최근의 많은 학자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 이후 가나안에 정착한 사람들이 아닌, 본래부터 가나안에 정착해 있던 사람들이라고 본다는 점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초기 왕정 시대보다 몇 백년 앞서는 출애굽 이야기를 언급한 이유는, 이들이 출애굽 집단인지, 원래부터 이스라엘에 정착해 있던 집단인지를 판단하는 일이 초기 왕정 형성 과정을 살펴보는 데 있어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전승 자료들과 현대 고고학적 연구 자료의 충돌은 이스라엘 초기 왕정 시기를 연구하는데 어려움을 줍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성경을 무시하고 고고학적 자료만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반대에 있는 학자들은 고고학적 자료를 빼고 성경만으로도 충분히 이 시대를 재구성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선택을 하는지는 온전히 해석자의 몫으로 남겨져 있기에 이 시기에 대해서는 상당히 신중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글이 정확히 그 중간에 위치해서 초기 왕정 시대를 재구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최대한 양쪽의 생각을 살펴보며 초기 왕정 시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단일 국가 혹은 지파 연합

「창세기」에서 「여호수아」까지 성경이 이야기하는 이스라엘 각 지파는 씨족 중심으로 뭉쳐진 집단들입니다. 마치 우리나라 조선 시대에 왕이 없다는 가정하에 8도가 각각의 지역 대표를 가진 상태에서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있는 형태입니다. 고조선에서 출발한 하나의 혈통이 지역에 따라 나뉘어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고고학적 판단에 따르면 이스라엘 각 지파는 각자 사는 지역을 중심으로 뭉친 집단들일 뿐이지 이들이 하나의 혈통을 잇고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들은 어쩌면 유럽연합(European Union)처럼 개별 부족들이 동맹을 맺고 있는 형태였을 수도 있고,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처럼 동맹 이상의 연합체를 구성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초기 왕정이 어떤 방식으로 시작되었는지 여러 가지 가설이 있습니다. 성경과 전혀 상관없이 단일 부족사회에서 왕정으로 발전했다는 가설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12지파 전승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들이 성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야곱’의 혈통을 잇고 있는 단일 민족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씨족이나 지역에 따라 나뉜 부족 집단의 연합체에서 출발하여 왕정 체계를 구축하게 되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이어지는 지파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단일 국가를 구성하고 하나의 왕조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듭니다. 이들은 원래 하나의 씨족에서 출발한 형제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이들이 하나의 씨족에서 출발한 집단이 아니라, EU와 같은 방식으로 연합하였다가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게 되었다면,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이들이 단일 국가를 구성하고 그 국가를 다스리는 왕을 선출하였더라도, 이들은 기본적으로 각 지역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결속이 그리 단단하지는 않았을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사무엘상 10장」에 나타난 ‘사울’의 왕위 등극 장면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0장 27절」에는 어떤 불량배라고 표현되는 이들이 나타납니다. 이들은 미스바 총회에서 ‘사울’이 자신들을 구원하지 못하리라고 말하며 ‘사울’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이들은 「사무엘상 11장」에서 ‘사울’이 암몬을 물리치는 모습을 보면서 그를 왕으로 인정합니다.

▲ 초기 왕정 시대 이스라엘 ⓒ위키피디아

이들은 ‘사울’을 왕으로 선택하였지만, 그 후에도 지파 연합체의 형태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울’ 시기와 ‘다윗’ 초기까지도 이스라엘을 단일 왕국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도상에는 하나의 거대 국가가 형성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12지파 연합체의 형태를 따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왕이 지파 연합체의 승인을 받고 왕위에 오르는 일이 필수 조건이었는지 분명하진 않지만, 지파 연합의 승인을 거치는 모습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울’과 ‘다윗’ 모두 지파 연합의 승인을 받아 왕위에 오릅니다. 이들은 ‘르호보암’ 때에도 왕위 계승에 관여했습니다. 일전에 살펴본 세겜 총회가 그 당시까지도 남아 있던 지파 연합의 흔적을 보여줍니다.

‘사울’이 왕이 되었던 시기, 지파 연합체가 단일 국가 체제를 선택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지파 연합체를 유지하면서 군사적 위기를 대처하기 위한 영웅적 왕과 상비군을 필요로 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사울’의 죽음 이후 이런 체계에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사무엘하 2장 7절」을 보면,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위에 등극하는 장면이 나타나는데, ‘다윗’은 ‘유다 족속이 내게 기름을 부어 그들의 왕으로 삼았다’라고 말합니다. 이 흐름 속에서 유다 지파는 다윗이 왕이 되어 다스리고, 나머지 지파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다스리게 되었다는 인상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사무엘하 3장 1절」은 유다 지파와 이스라엘의 싸움이 아니라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무엘하 2장 12절」 이하에 나타난 이스라엘과 유다의 전쟁을 살펴보면, ‘이스보셋’은 유다 지파를 제외한 전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막상 전쟁에는 베냐민 지파만이 참여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사무엘하 3장 17-18절」을 보면, ‘사울’의 군사령관이었으면서 ‘이스보셋’을 왕위에 올린 인물인 ‘아브넬’은 ‘이스보셋’ 몰래 이스라엘 장로들과 만납니다. 그곳에서 ‘아브넬’은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윗’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고 언급합니다.

「사무엘하 5장 1-5절」에는 ‘이스보셋’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으로 와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장면이 나타나는데, 이 서사 속에 ‘이스보셋’에 관한 언급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지파 대표들은 ‘사울’과 마찬가지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운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분명 한동안 유다 지파만을 다스렸습니다. 그래서 ‘이스보셋’이 나머지 지파 전체를 다스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지파 대표들의 언급 속에서 ‘이스보셋’을 왕으로 인정했다는 언급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또 ‘이스보셋’은 그의 아버지 ‘사울’과 같이 전체 이스라엘에서 군사를 소집하지 못했습니다.

「사무엘」에는 너무나 다양한 전승들이 뒤섞여서 나타납니다. ‘사울’을 좋은 왕으로 그리는 전승이 있는가 하면, ‘사울’을 미치광이로 그리는 전승도 있습니다. ‘사무엘’을 중심으로 한 예언가 집단이 핵심적으로 나타나는 전승도 있습니다.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때로 좋은 왕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악한 일을 범하는 왕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런 다양한 전승이 모여있는 데다 이런 전승이 편집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사무엘」에 나타난 이야기들이 초기 왕정 형성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고 확신 있게 말하기엔 어려움이 있습니다. 「사무엘하 3장 17-18절」에 나타난 ‘아브넬’과 이스라엘 장로들의 회동 이야기도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올라야 한다는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첨가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승들 속에서 조금씩 나타나는 지파 연합의 모습을 무시할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다윗’ 초기까지 지파 연합이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면, ‘이스보셋’은 이들로부터 왕위를 인정받지 못한 왕이며, 일부 베냐민 지파를 다스렸던 왕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지파 연합이 요구했던 왕은 자신들의 연합체를 훼손하지 않는 상태에서 전쟁을 잘 수행할 수 있는 영웅과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다윗’을 왕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흐름을 따르지 않고 혈통에 의한 왕위 계승 방식을 시행한 사람이 ‘이스보셋’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왕위에 있던 2년은 전체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던 시기가 되며,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가 각각의 왕을 세웠던 시기가 됩니다.

▲ 이스라엘 12지파 ⓒ위키피디아

일부 학자들은 지파 연합체라 불리는 연합의 실체나 장로들의 모임 자체를 회의적으로 바라보기도 합니다. 이들이 모이는 장소 자체에도 일관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사기」와 「사무엘」 모두 등장하는 총회 장소는 미스바입니다(삿20:1; 삼상7:5; 10:17).

미스바는 사사 ‘입다’가 살면서 야훼에게 예배드린 장소이기도 하고(삿11:11,34), 「사사기」의 마지막 이야기에서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지파가 총회를 연 장소이기도 합니다(삿20:1). 지도에는 미스바의 위치가 나타나 있지 않는데, 미스바는 벧엘에서 남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베냐민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의 경계 부근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왕위가 확정된 곳은 므낫세 지파에 속한 길갈이었습니다(삼상11:14). 길갈은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 ‘여호수아’가 열두 돌을 세운 장소이기도 합니다(수4:20). 또 ‘르호보암’이 이스라엘 지파들로부터 왕위를 인정받기 위해 간 곳도 므낫세 지파에 속한 세겜이었는데(왕상12:1), 이곳은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스스로 왕위에 올랐던 곳이기도 합니다(삿9:6).

다양한 전승들 속에서 이들이 중요하게 여긴 장소는 모두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것은 그들의 실체를 모호하게 만드는 작용을 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여러 전승이 지파 연합 또는 지파 총회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은 그러한 모임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들 연합이 단일 국가로 결속하는 일은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이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다윗’을 비난하는 이들이 존재했습니다. ‘사울’의 친족인 ‘시므이’는 ‘압살롬’과의 전쟁으로 인해 도피하는 ‘다윗’을 저주합니다(삼하16:5-14).

‘압살롬’과의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세바’라는 베냐민 지파 사람이 등장하여 다윗에게 반기를 듭니다. 그가 외친 구호,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는 ‘르호보암’의 왕위 등극에 반대하는 이스라엘 10지파에 의해 반복되기도 합니다(삼하20:1; 왕상12:16).

베냐민 지파와의 갈등은 ‘사울’ 왕조와 ‘다윗’ 왕조의 갈등으로 볼 수 있지만, 이 갈등 가운데 나왔던 구호가 ‘르호보암’ 시대에 다시 반복되었다는 점을 본다면, 이들의 결속이 그렇게 단단하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왕정 체계의 발달

「사무엘상 8장 10-20절」에는 ‘사무엘’이 말하는 왕의 제도와 이를 받아들이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 장면은 이스라엘 지파 연합이 왕정 국가 체제를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하는 모습을 담고 있기에, 이스라엘이 처음부터 제대로 된 왕정 체계를 갖춘 단일 왕국에서 출발했다는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사울’의 모습에서 보이는 이스라엘의 초기 왕정은 제대로 된 왕정 체계라고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또 이런 형태가 왕정 체계를 갖추어 발전해 가는 과도기적 단계에서 보인 모습으로 생각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스라엘 지파 연합이 처음 생각했고 원했던 왕정 자체가 이런 형태였을 것이라고 봅니다.

‘사울’이 왕으로 선출된 이야기 속에서 이스라엘의 왕정이 어떤 형태로 시작되었는지 몇 가지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우선 왕으로 뽑힌 인물은 자신들을 다스릴 사람이 아니라 외부의 침략을 막아낼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다음으로 지파 총회에서 선출된 왕이라 할지라도 이를 반대하는 집단이 있었고, ‘사울이 잠잠했다’라는 표현(삼상10:27)은 선출된 왕에게는 그 집단을 제재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첫 왕이었던 ‘사울’에게 주어진 가장 큰 권한은 군사 소집령을 발동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각각의 전투를 치를 때마다 ‘사울’은 이스라엘 전역에서 군사를 소집합니다(삼상11:7; 13:2; 14:52; 15:4; 17:2; 24:2). 심지어 ‘사울’은 ‘다윗’을 죽이러 쫓아갈 때도 자신의 사병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을 소집하여 군사를 모읍니다(삼상23:8; 26:2).

‘사울’에게는 상비군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삼상13:2,16). 그의 사촌 ‘아브넬’은 군사령관으로 세워집니다. 하지만 매 차례 전쟁을 치를 때마다 ‘사울’이 다시 백성 중에서 군사를 모았다는 점이나 사촌을 군사령관으로 세운 점을 본다면, 사울의 상비군은 최소한의 인원으로만 구성되어 있었고 가족 중심으로 운영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사울’이 제대로 된 왕정 국가를 이루었다고 말하기 어려운 다른 이유는, 이 시기에 국가의 수도가 존재하지 않았고, 행정 조직의 흔적이 성경 안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런 국가 행정 조직의 흔적은 고고학적으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본래 살고 있던 기브아에 계속 머물면서 국지적으로 발생하는 전쟁에 참여합니다. ‘사울’ 당시 제사장이었던 ‘사무엘’도 본래 자신이 활동하던 지역에 머물면서 활동합니다.

▲ 예루살렘의 다윗상 ⓒ위키피디아

위의 사진은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 조각상입니다. 「사무엘상 16장」의 이야기에 따라 ‘다윗’이 수금을 타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번뇌를 가라앉히기 위해 수금을 타기도 하고 무기 드는 자로 세워지는데, 그렇다고 ‘다윗’이 ‘사울’과 함께 지내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의 집에서 살면서 때때로 ‘사울’에게 와서 수금을 탔을 뿐입니다(삼상18:2 참고).

또한 ‘사울’과 ‘다윗’ 시기까지는 세금을 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세금을 받는 관리는 ‘솔로몬’ 때에 등장합니다(왕상4:7-19). 이는 ‘사울’과 ‘다윗’의 정복 지역과도 연결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시기에는 세금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이 타국의 도시를 점령한 것은 그 지역으로부터 지속적인 세금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단순히 약탈을 위한 전쟁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무엘상 15장」에 나타난 ‘사울’의 아말렉 침략과 약탈은 그가 자신의 상비군을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의 이런 행위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게 된 원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사울’보다는 왕정체계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보입니다. 혈통에 의한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기 위한 전승은 ‘다윗’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또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스라엘 지파 연합의 결속은 단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단일 왕국으로 묶기 위한 노력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법궤를 자신의 성으로 옮기려고 했던 일이나,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우려고 했던 노력은 단일 국가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기 위해서 행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열왕기」는 예루살렘 성전 건축의 공을 모두 ‘솔로몬’에게 돌리고 있지만, 「역대상 28-29장」은 ‘다윗’이 성전 건축에 대한 밑준비를 모두 마쳤다고 말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실제로 ‘솔로몬’ 때에 세워졌는지, ‘다윗’ 때에 세워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성전 건축에 관한 이야기는 ‘다윗’ 시대에 처음 등장합니다(삼하7:11-13). 「열왕기」는 ‘다윗’ 때에 성전을 건축하지 못했고, ‘솔로몬’ 시대에야 성전이 건축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학자의 표현처럼 ‘솔로몬’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완벽한 왕정 체계의 전형을 보여주기에 오히려 현실성과 신빙성이 떨어지는 면이 있습니다.

‘솔로몬’이라는 인물은 분명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인물일 것이지만, 그가 행했다고 전해지는 모든 일이 다 ‘솔로몬’이 행한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성전 자체는 확실히 ‘르호보암’ 이전에 건축된 것으로 보입니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모든 전승에서 끊임없이 나타나고 고고학적으로도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르호보암’ 이후로 성전 건축과 관련된 인물은 아무도 없습니다. ‘요시야’ 시대에 성전 수리 작업이 한 번 이루어졌을 뿐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왕정 이데올로기 형성을 위해 ‘다윗’ 또는 ‘솔로몬’ 시대에 건축되었을 것입니다. 이는 주전 12-11세기 예루살렘이라는 도시가 수도의 역할을 했다기보다, 행정이나 특정한 기능을 위해 존재한 도시였다는 고고학적 증거와도 연결됩니다.

‘다윗’ 때에는 행정적인 면도 조금 더 발전합니다. ‘사울’은 가족 중심의 상비군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다윗의 상비군은 그보다 더 확장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 ‘다윗’ 시대에 행정 조직 체계가 시작되는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삼하8:16-18). 이는 ‘솔로몬’ 시대에 더 확장됩니다(왕상4:1-19).

‘다윗’이 이러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과 그것이 결실을 맺지 못하고 분열 왕국으로 이어졌다는 점을 보면, ‘다윗’과 ‘솔로몬’이 다스린 이스라엘은 여전히 단일 왕정 국가의 체계가 완성되지 않았으며, 이 위대한 왕들의 시대가 지금 우리의 생각처럼 화려하지는 않았고 단일 국가를 이루기 위한 과도기적인 시기였을 수 있다는 점을 알게 합니다.

‘다윗’과 ‘솔로몬’은 이스라엘에 단일 왕정 국가를 세우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인물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다스렸던 이스라엘이 「사무엘」과 「열왕기」가 보여주는 것처럼 엄청난 국력을 과시했다거나 화려한 국가를 이룩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들의 통치 시기에는 여전히 각각의 지역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지파들이 존재했으며, 이들 연합이 완전히 하나로 결속되어 있었다고 보기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 성경을 중심으로 초기 왕정 시대를 살펴볼 수밖에 없지만,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문자 그대로 믿으면서 ‘다윗’과 ‘솔로몬’에 대한 환상을 조금 내려놓지 않는다면, 이들이 다스렸던 시기의 역사를 바르게 바라볼 수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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