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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야웨 신앙의 적자(嫡子) 국가인가

기사승인 2021.05.06  15:4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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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역사 알기 ㉞

이스라엘 연대 추정을 위해 연재를 시작한 이후, 전체적인 윤곽만으로는 정확한 연대 추정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 알기 ⑹」에서 「이스라엘 역사 알기 ㉝」까지 28주에 걸쳐 분열 왕국 시대 이스라엘의 왕들에 대해 알아보았고, 그들의 연대를 추정해보았습니다.

지난 글에서 분열 왕국의 시작점인 ‘여로보암’까지 다뤘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이스라엘 분열 왕국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아래에서 다뤄지는 연대는 성경에 나타난 연대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지난 글들을 통해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 분열왕국 연대표 1

가나안 정착 이후 이스라엘은 지파 연합의 형태로 존재했습니다. 그러다 이들은 왕을 필요로 하였고, 지파 총회를 거쳐 처음으로 세운 왕이 ‘사울’이었습니다. ‘사울’, ‘다윗’, ‘솔로몬’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살펴보게 될 것이지만, 지금까지 다룬 내용 속에서 왕위 계승에 대한 문제만 짧게 보려고 합니다.

왕국 분열의 문제는 ‘솔로몬’ 재위 후반에 발생합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과도한 노역을 시켰습니다. 지파 연합의 대표들은 이에 반발했지만, ‘솔로몬’은 아마도 이런 반발을 강하게 제압했거나 적절하게 억눌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억눌렸던 지파 연합의 분노는 ‘솔로몬’ 사후 그의 아들인 ‘르호보암’이 왕위에 올랐을 때 분출됩니다. 이들은 동족 간 노역을 지속하겠다는 ‘르호보암’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파 총회를 통해 새로운 왕 ‘여로보암’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습니다.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지파 총회의 결정에 따라 정통성을 이어받은 왕입니다. 반면 지파 총회의 결정에 불복한 ‘르호보암’과 유다 지파는 자신들만의 국가를 세웁니다. 그리고 빠르게 베냐민 지파를 점령하여 자신들의 국가로 편입시킵니다. 우리는 남왕국이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잇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나라의 이름 자체만 보아도 어느 쪽이 정통성을 잇고 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북왕국의 이름이 이스라엘이었고, 남왕국의 이름은 유다였습니다.

남왕국의 불복으로 인해 발생한 국가 분열은 이스라엘에 다양한 어려움을 가져옵니다. ‘솔로몬’ 시절 점령했던 주변국들은 독립을 이루었고, 군사력과 경제력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그래도 남왕국에 비해 북왕국의 상황이 조금은 나았습니다. 북왕국은 10개 지파 연합체였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남왕국보다 앞섰습니다. 지리적으로도 북왕국은 여전히 이집트로 이어지는 무역로인 ‘해안길’과 ‘왕의 대로’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이점과 함께 북왕국은 수도 이전이나 종교 제의 개혁과 같은 ‘여로보암’의 노력으로 인해 조금씩 국가의 틀을 갖춰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은 그의 아버지만큼의 능력은 없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아사’가 모반을 일으켜 ‘나답’을 죽였을 때, 북왕국 백성들은 ‘바아사’를 왕으로 인정합니다.

이와 반대되는 상황은 ‘바아사’의 아들 ‘엘라’ 때에 나타납니다. ‘시므리’는 ‘엘라’에게 반역하여 모반을 일으키고 왕이 되었는데, 북왕국 백성들은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오므리’를 왕으로 세웁니다. 이를 알게 된 ‘시므리’는 성에 불을 지르고 그 안에서 자결합니다.

‘오므리’가 왕이 된 후 북왕국은 눈부신 발전을 이룹니다. 그는 사마리아로 수도를 옮긴 후 국제 관계 활성화에 힘을 쏟습니다. 당시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의 거대 동맹 체계는 ‘오므리’의 능력이 특출난 이유도 있었겠지만, 아시리아라는 거대한 적으로 인해 강제된 동맹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북왕국은 ‘오므리’의 아들 ‘아합’ 때에 영토 국가의 틀이 완성되었고, 주변 국가들을 속국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북왕국이 이렇게 발전하고 있을 동안 남왕국은 ‘아비얌’, ‘아사’의 통치를 거치며 여전히 도시 국가로 남아있었습니다.

위의 연대표를 보면, 북왕국과 관련된 주변국의 자료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왕국과 관련된 자료는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쇼생크 1세’의 침공은 ‘르호보암’ 옆에 표시하기는 했지만, 실제 ‘쇼생크 1세’의 비문이나 토판에는 남왕국을 하나의 국가로 인식하지도 않으며, ‘쇼생크 1세’가 점령한 지역 목록에 남왕국의 지역은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남왕국은 스스로를 국가라고 인식했을지는 모르지만, 주변국으로부터 하나의 국가로 인정받지 못할 정도로 작은 국가였다는 사실입니다.

남왕국이 북왕국과 대립하는 동안 국가의 발전을 이루기 어려운 이유는 분명합니다. 지속된 전쟁으로 인해 국력이 소모되었음은 물론이고, 지리적으로 남왕국은 블레셋(서), 에돔(남), 모압(동), 북왕국(북)이 사방을 둘러싼 형태였습니다.

남왕국이 국가적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부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비얌’과 ‘아사’ 시절에 관한 기록에는 종교 정책에 관한 내용만이 나타납니다. 남왕국은 종교를 통한 결집 외에 국가를 발전시킬 방법이 없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남왕국의 상황은 ‘여호사밧’ 때에 조금 나아집니다. ‘여호사밧’은 북왕국 ‘아합’과 사돈 관계를 맺고 친선 외교를 시행합니다. 「열왕기」의 기록만으로 본다면 친선 외교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남왕국이 북왕국의 속국이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아합’이 남왕국의 왕정을 인정해주었기 때문에 이 시기를 북왕국에 의한 통일 왕국 시기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합’ 사후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북왕국의 왕이 되었는데, 그는 병으로 인해 요절합니다. 이후 ‘아합’의 자손이 없었기 때문이었는지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합’의 사위인 남왕국의 ‘여호람’이 북왕국의 왕위에 오릅니다. 남북왕국의 ‘여호람’이 동일인물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역사 알기 ㉖ ‘여호람, 예후 반란의 원인’」 에서 다루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여호람’은 북왕국의 데릴사위로 일시적으로 북왕국 왕위에 올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여호람’은 이를 무시합니다. 그는 남왕국에 있던 자신의 형제들, 남왕국 왕위 계승자들까지도 죽인 후 자신이 남왕국의 왕위에 오릅니다.

‘예후’에 의한 반란은 이런 배경에서 벌어졌을 것입니다. 그의 반란은 유다 지파가 또다시 이스라엘을 차지하려던 계획을 막기 위해서 일어났으며, 그렇기에 그가 남왕국의 왕자들까지도 죽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후’의 반란은 ‘아합’ 때에 있었던 왕실의 부패가 하나의 원인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여호람’에 의한 남북왕국 강제 병합도 큰 이유였을 것입니다.

북왕국의 모든 백성은 유다 지파에 의한 강제 병합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예후’의 편에 서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예후’가 반란을 일으킨 시기는 ‘여호람’이 아람과의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후 자신의 아들 ‘아하시야’에게 왕위를 물려줬던 시기입니다.

‘예후’가 통치하던 시기 북왕국은 ‘아합’이 쌓아놓은 왕국의 영광을 많이 상실합니다. ‘아합’ 때에 맺었던 국제 관계가 대부분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약 100년간 ‘예후’, ‘여호아하스’, ‘요아스’, ‘여로보암 2세’를 거치며 북왕국은 다시 과거의 영광을 회복합니다. 특히 ‘여로보암 2세’ 때에는 ‘아합’ 시절 못지않은 국력을 갖췄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후’ 혁명으로 인해 남왕국은 거의 붕괴 상태에 몰립니다. 다윗 혈통에 의한 세습제를 중요하게 여기는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를 사람이 없어서 ‘여호람’의 아내이자 ‘아합’의 딸인 ‘아달랴’가 여왕의 자리에 오릅니다. 만약 ‘아달랴’에 의한 통치가 안정적으로 길게 이어졌다면, 남왕국도 왕조가 바뀌는 역사가 벌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호야다’를 중심으로 한 제사장 집단의 반란으로 인해 다시 다윗 혈통에 의한 세습제가 이어집니다.

‘요아스’ 초기 남왕국은 반란을 주도했던 제사장 세력에 의해 국가 운영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아스’는 성전 개혁 등을 통해 국가적 변화를 꾀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노력은 이어지는 ‘아마샤’, ‘웃시야’, ‘요담’ 때에 빛을 보게 됩니다. 이들이 통치하던 시기 남왕국은 영토 국가의 틀을 갖추게 됩니다. 비록 북왕국에 비해 100년 정도 늦었지만, 남왕국도 하나의 국가로 자리잡게 된 시기입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해 「열왕기」는 상당히 빈약한 정보만을 전해줍니다. 상당한 연대 상의 오류가 나타날 뿐만 아니라 ‘웃시야’는 ‘아사랴’라는 이름으로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웃시야’와 ‘요담’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에서 공동통치가 이루어졌다는 중요한 자료가 됨에도 불구하고 「열왕기」는 이들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이 시기에 남왕국은 상당한 영토 확장을 이루었고, 「열왕기」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지만, 생각보다 대단찮은 내용처럼 넘어가 버립니다. 어쩌면 이들이 이룩한 남왕국의 발전상이 과거 ‘다윗’과 ‘솔로몬’을 넘어선 발전이었기 때문에 침묵하는 것일 수도 있고, 이들이 이룬 것을 이미 ‘다윗’과 ‘솔로몬’에게 돌려놓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역사 알기 ⒇ ‘어떤 왕도 다윗과 솔로몬의 업적을 넘어서면 안 된다?’」 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분열왕국 연대표 2

연대표가 너무 길어져서 주전 740년을 기준으로 두 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여로보암 2세’ 이후 북왕국은 격동의 시기를 맞이합니다. 1년 동안 ‘스가랴’, ‘살룸’, ‘므나헴’으로 이어지는 왕이 세 번 바뀌는 상황도 벌어집니다. ‘므나헴’ 이후 약 20년간은 아시리아의 거센 침공이 이어졌습니다.

제국을 이룬 아시리아는 내부 문제들로 인해 한동안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을 침공하지 않았습니다. ‘아수르니라리 5세’는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의 국가들과 조약을 맺고 친선 외교를 펼쳤습니다. 하지만 그의 뒤를 이은 왕 ‘디글랏빌레셀 3세’는 무력에 의한 통치 정책을 펼칩니다. 친선 외교가 아니라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을 속국으로 만드는 정책을 펼칩니다.

북왕국의 마지막 왕 ‘호세아’는 아시리아의 속국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시리아에 보내는 조공을 멈춥니다. 북왕국의 경제 상황이 조공을 바칠 여력이 없었던 것인지, 아시리아의 내부 상황을 보고 반란을 일으킬만하다고 여겼는지 조공을 바치지 않습니다. 그로 인해 북왕국은 멸망하게 됩니다.

사마리아 침공은 ‘살만에셀 5세’ 때인 주전 722년에 시작되었는데, 그가 갑작스럽게 죽자 그의 아들인 ‘사르곤 2세’가 이를 이어받아 주전 720년에 사마리아가 함락됩니다. ‘살만에셀 5세’의 기록과 ‘사르곤 2세’의 기록에서 둘 다 자신이 사마리아를 함락했다고 적고 있는 점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저희가 일반적으로 북왕국 멸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때문에 저도 그런 표현을 씁니다만, 정확하게 북왕국이 멸망했다고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북왕국 왕정이 무너지고 아시리아의 직접 통치가 이루어진 것 뿐이지, 북왕국 백성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열왕기」는 북왕국이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이름과 정통성을 남왕국으로 가져옵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역사 알기 ⒅ ‘북왕국 이스라엘은 정말 멸망한 것일까?’」 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북왕국이 격동을 시기를 보내는 동안 남왕국 ‘아하스’는 친아시리아 정책을 펼칩니다. 북왕국이 멸망에 이르고 있는 순간에 남왕국이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는 철저하게 친아시리아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북왕국이 주전 720년에 멸망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히스기야’가 아시리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사르곤 2세’ 사후 아시리아의 내부 상황이 혼란스러울 것이라고 예상하여 독립을 선언했을 수 있습니다. 또 아시리아에 끊임없이 반기를 들고 있던 바벨론과 동맹을 맺고 함께 반란을 일으켰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히스기야’의 반아시리아 정책은 이어지는 왕인 ‘산헤립’의 침공으로 이어집니다. ‘산헤립’의 죽음은 남왕국이 한숨 돌릴 수 있는 상황이었겠지만, ‘산헤립’의 뒤를 이은 ‘엣살핫돈’의 군세는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는 다시 아시리아의 속국이 되어 친아시리아 정책을 펼칩니다.

주전 740년 이후 「열왕기」에 기록된 왕들의 평가를 보면, 외세에 의존했거나 속국의 길을 묵묵히 걸었던 왕들은 악한 왕으로 평가됩니다. 반면에 독립을 선언한 왕들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섰던 왕들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아시리아의 밑에 붙어있으면서 국가의 안정을 이룬 ‘므낫세’는 「열왕기」에서 최악의 왕으로 그려집니다.

이후 남왕국은 큰 변화 없이 아시리아의 속국이 되었다가 벗어났다가를 반복합니다. 그러던 중에 ‘요시야’에 의해 변화가 일어납니다. ‘요시야’는 제사장, 서기관 집단과 함께 강력한 국가 체계를 구축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흔히 ‘요시야’의 종교개혁이라고 불리는 정책은 종교에 국한된 정책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학자는 ‘요시야’ 시기에 「신명기」와 「열왕기」를 비롯한 역사서 작성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는데, 이는 서기관 집단을 통한 국가 역사 정리와 함께 왕조 정통성을 세우는 작업이었습니다. ‘요시야’가 이런 정책을 펼칠 수 있었던 이유는 아시리아의 국력이 많이 꺾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신흥 바벨론이 떠오르던 때입니다. 아시리아는 바벨론을 비롯한 속국들의 반란으로 국력이 약해져 있었습니다.

그때 아시리아와 동맹 관계에 있던 이집트 제26왕조의 ‘네카우 2세’가 아시리아를 돕기 위해 북진합니다. 이미 아시리아로부터 독립을 이룬 ‘요시야’는 ‘네카우 2세’의 진군을 막아섰으나 그 전쟁에서 죽게 됩니다. 아시리아를 돕기 위해 북진했던 ‘네카우 2세’는 다시 이집트로 회군하는 길에 ‘요시야’ 다음으로 세워졌던 왕 ‘여호아하스’를 폐위시키고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웁니다.

‘여호야김’은 이집트에 의해 세워진 왕이기 때문에 친이집트 정책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바벨론의 침공으로 인해 잠시 바벨론을 섬겼는데, 아마 이집트와의 공조 속에서 바벨론을 배신했을 것입니다. 「열왕기」가 ‘여호야김’ 시대에 바벨론의 침공을 이야기하면서 마지막에 이집트 왕이 자신의 나라에서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을 첨가한 이유가 그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남왕국은 바벨론의 속국이 되어 괴롭힘당하는 처지가 됩니다. ‘여호야긴’ 시절에는 ‘느부갓네살’을 막지 못하고 ‘여호야긴’을 비롯한 일부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갑니다. 이후 바벨론이 세운 왕 ‘시드기야’가 다시 바벨론에 대항하였다가 결국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이 파괴되며 남왕국도 멸망합니다.

한 가지 생각할 점은 남왕국 마지막 왕 ‘시드기야’에 대한 평가입니다. 실제로 남왕국에 마지막으로 왕위에 오른 사람은 서기관 사반의 손자 ‘그달리야’입니다. 열왕기를 기록한 역사가 집단이 다윗의 계보가 아닌 ‘그달리야’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점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시드기야’보다 ‘여호야긴’을 자신들의 왕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열왕기」의 마지막은 ‘여호야긴’이 바벨론에서 높임을 받았다는 이야기로 끝납니다. 이런 모습은 「에스겔」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은 연대를 표시할 때 ‘여호야긴’의 연호를 사용합니다. 이렇게 기록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열왕기」를 기록한 이들이 ‘에스겔’과 마찬가지로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1차 포로기에 끌려간 이들인지, ‘시드기야’ 때에 끌려간 이들인지는 확실하진 않지만, ‘여호야긴’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보아 ‘여호야긴’과 함께 끌려간 이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열왕기」가 ‘요시야’ 시절에 기록되기 시작했을 수 있지만, 결국 바벨론 포로기 때에 어느정도 완성되었을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역사를 문자 그대로 사실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는 불편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성경의 역사는 결국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일부 집단에 의해 기록된 내용입니다. 이들은 분명 신앙도 중요하게 여겼지만, 정치적으로 자신들의 견해에 맞지 않는 이들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으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들의 생각을 조금 뒤로 하고 이스라엘 분열 이후의 상황을 생각해보자면, 지파 연합체였던 이스라엘에서 과도하게 권력을 갖고 있던 유다 지파는 지파 총회의 결정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국가를 수립합니다. 그것이 남왕국입니다. 이들은 북왕국에 비해 늦은 발전을 이룹니다. 만약 북왕국이라는 방패가 없었고, ‘아하스’가 철저하게 아시리아에 무릎 꿇지 않았다면 남왕국도 북왕국과 함께 아시리아에게 망했을 것입니다.

아시리아에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은 남왕국은 북왕국을 사라진 나라로 만듭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정통성을 자신들이 가져옵니다. 북왕국에는 혼혈만이 남아있고, 제대로 된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남왕국 붕괴 이후에 바벨론에 끌려간 이들은 ‘시드기야’ 이후 남왕국에 남겨진 사람들까지도 제대로 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남왕국에 남겨진 이들은 ‘비천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합니다. 포로로 끌려온 이들만이 정통성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에스겔」이 하나님께서 바벨론으로 오시는 장면부터 시작하는 점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포로민들의 이런 생각은 나중에 「에스라」, 「느헤미야」에도 나타납니다.

「열왕기」가 보여주는 분열 왕국의 역사는 남왕국이 훌륭한 국가로 나타나고 북왕국은 악으로 가득 찬 국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고고학적 증거들과 함께 두 나라의 역사를 조금만 더 살펴본다면, 어떤 집단을 배제하면서 자신들만 정통성과 권위를 가지려 하는 특정 집단의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성경의 역사는 겉에 드러난 문자를 통해 우리의 신앙을 키우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역사를 조금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집단 간의 갈등을 보게 되고, 이런 집단들의 잘못된 모습 또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점 또한 우리의 신앙에 올바른 방향을 가르쳐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분열왕국 왕들의 초상

위의 그림은 1553년 프랑스 리옹에서 출간된 ‘기욤 루이예(Guillaume Rouillé, 1518-1589년)’ 위인전기 모음집 Promptuarii Iconum Insigniorum에 수록된 왕들의 삽화입니다. 북왕국의 ‘시므리’와 ‘살룸’, 남왕국의 ‘르호보암’과 ‘여호아하스’는 이미지를 구할 수 없어서 공란으로 놓았습니다. 작가가 초상들마다 어떤 의미를 담아서 그렸겠지만, 저는 특별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겠습니다.

인터넷에서 분열 왕국 왕들을 검색하면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되는 이미지라 한데 모아봤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보시면 됩니다. 순서에 따라 나열된 초상들이기 때문에 북왕국과 남왕국 왕들이 같은 선상에 있다고 해서 재위 연대가 같은 것은 아닙니다.

다음에는 간단하지는 않겠지만, ‘솔로몬’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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