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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시작

기사승인 2021.04.22  14:5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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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역사 알기 ㉜

시삭의 침공

이번 글에서는 남왕국 ‘르호보암’에 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르호보암’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열왕기상 12장 1-24절」과 「열왕기상 14장 21-31절」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역대기」의 평행 본문인 「역대상 10-12장」에 나타납니다.

「열왕기」의 기록만을 놓고 보았을 때, 「열왕기상 12장 1-24절」의 이야기는 남북왕국 분열의 시작점을 다룹니다. 따라서 ‘로흐보암’은 이 이야기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실제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닙니다. 그는 그저 남북 분단을 야기한 무능하고 포악한 왕으로 그려질 뿐입니다.

‘르호보암’의 치세에 관해 다루고 있는 「열왕기상 14장 21-31절」은 그에 대해 상당히 적은 내용만을 전해줍니다. ‘르호보암’에 대한 일반적인 정보와 함께 그의 시대에 우상 숭배가 성행했다는 점이 주를 이룹니다. 그나마 「열왕기상 14장 25-26절」에 나타난 이집트 왕 ‘시삭’의 침공 기록은 연대 추정이나 역사 재구성 작업에 도움을 줍니다.

여기서 ‘시삭’은 이집트 제22왕조의 시조인 ‘쇼셍크 1세(Shoshenq Ⅰ, 대략 주전 945-924년)’로 추정된다는 이야기는 이미 「이스라엘 역사 알기 ⑷ ‘이스라엘 역사 연대 추정을 위한 기준점’」에서 다루었습니다. 그 글에서도 언급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학자는 ‘시삭’과 ‘쇼셍크 1세’를 동일인물로 봅니다. 하지만 여전히 ‘시삭’은 ‘쇼셍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특히나 이스라엘 왕조의 시작을 주전 13세기로 보거나 심할 경우 주전 15세기까지 끌어올리는 학자들은 ‘시삭’을 ‘람세스 2세(Rameses Ⅱ, 대략 주전 1279-1213년)’나 ‘투트모세 3세(Thutmose Ⅲ, 대략 주전 1479-1425년)’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열왕기」에 나타난 연대에도 맞지 않는 과도한 주장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쉽진 않습니다. 저는 ‘시삭’이 ‘쇼셍크 1세’라고 봅니다.

먼저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기 위해 ‘쇼셍크 1세’의 침공에 대해 지난 글에서 다 다루지 못한 점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쇼셍크 1세’는 전통적으로 주전 945년에 이집트 제22왕조를 세운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집트는 제20왕조(주전 1186-1069년)부터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제21왕조(주전 1069-945년) 초기에는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제21왕조는 타니스를 중심으로만 활동한 것으로 보이며 상이집트에 대한 통치 권한을 잃었습니다. 이후 이집트는 각 지역의 원주민들을 중심으로 분열되기 시작합니다.

▲ 이집트 제3 중간기 ⓒ위키피디아

위의 지도는 이집트 제22왕조 이후 하이집트의 분열상을 나타낸 것입니다. 제22왕조를 세운 ‘쇼셍크 1세’는 리비아 출신으로 제21왕조에 이어 타니스 지역에서 왕조를 세웁니다. 그는 제21왕조와 혼인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리비아인이었지만, 제21왕조의 계승자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집트 제22왕조 시기에 리비아인들 사이에서 집단이 나뉘게 되고, 제22왕조와 지속적인 갈등 관계에 있던 리비아인 집단은 제23왕조(주전 818-715년)를 세웁니다. 또 지도에 나타난 메쉬웨쉬 집단도 리비아인들입니다. 이집트 제3중간기는 하이집트 대부분을 리비아인들이 차지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를 리비아인 시기(Libyan Period)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쇼셍크 1세’가 즉위하던 주전 945년에 분열된 이집트의 모습은 위의 지도와는 조금 달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21왕조의 영토는 이미 타니스 중심의 일부 지역으로 축소되어 있었고, 제22왕조는 이를 잇고 있기에 이들의 영토는 하이집트의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이집트 제21왕조는 ‘솔로몬’과 동맹 관계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쇼셍크 1세’는 이 동맹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열왕기상 11장 40절」에 따르면 ‘여로보암’은 ‘솔로몬’을 피하여 이집트 ‘시삭’에게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여로보암’이 의탁했던 이집트 왕이 ‘쇼셍크 1세’가 맞다면, 그는 ‘솔로몬’의 적을 받아들이고 보호한 것입니다.

‘쇼셍크 1세’는 ‘솔로몬’ 통치 시기에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향한 침공을 감행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통치 초기부터 분열되어 있던 하이집트의 상황은 그가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그는 자신의 통치 말기인 주전 925년경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침공을 단행합니다. 「열왕기상 14장 25절」에 따르면 이때가 ‘르호보암’ 5년이었습니다.

‘쇼셍크 1세’가 ‘솔로몬’ 시대에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침공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솔로몬’ 통치 시절의 강한 군사력을 꼽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카르낙에서 있는 ‘쇼셍크 1세’의 비문에 나타난 점령지 목록과 주전 10세기의 고고학 유적들을 보면, ‘솔로몬’ 통치시기로 추정되는 때에 이스라엘에는 수많은 요새가 건설되어 있었습니다. ‘쇼셍크 1세’의 침공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유적 중에는 파괴되었으나 재빨리 복구된 흔적이 나타나는 유적도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런 요새가 ‘솔로몬’에 의해 건설된 것이며, 빠른 복구 체계도 ‘솔로몬’ 시기에 완성되었다고 봅니다.

이런 의견을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는 이유는, 하이집트도 평정하지 못한 ‘쇼셍크 1세’가 이스라엘 왕국 분열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에 눈을 돌렸다는 점에 있습니다. ‘쇼셍크 1세’의 침공 시기로 보이는 유적 중에는 경미한 파괴의 흔적만 간직한 것들도 있습니다. 이는 ‘쇼셍크 1세’의 군세를 막아볼 여력이 부족하여 일찌감치 항복한 성읍들의 존재를 보여줍니다. 그 대표적인 지역이 ‘므깃도’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남북왕국은 분열 이후 군사력이 나뉘었기 때문인지, 분열 직후부터 서로 간의 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인지, ‘쇼셍크 1세’의 군세를 막아내지 못할 정도로 세력이 약화됩니다. 만약 남북왕국이 분열 초기부터 전쟁을 치렀다고 본다면, 「열왕기상 12장 21-24절」에 나타난 예언자 ‘스마야’의 선포는 실제 사건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는 「열왕기상 12장 24절」에 나타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역사가의 첨가로 보입니다.

‘쇼셍크 1세’가 팔레스타인 원정은 단행한 이유는 몇 가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그가 과거 이집트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Rameses Ⅱ, 주전 1279-1213년)’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을 침공했다는 것입니다. 므깃도에서 발견된 ‘쇼셍크 1세’의 비문은 그가 이런 욕망을 가졌다는 주장을 뒷받침해 줍니다.

▲ 세숑크 비문 파편 ⓒC. S. Fisher, The Excavation of Armageddon, OIC Ⅳ

위의 사진은 므깃도에서 발견된 ‘쇼셍크 1세’ 비문의 파편입니다. 아마 윗줄은 ‘예물을 바치는 자의 주’라고 적힌 것으로 추정되는데, 작은 파편이다보니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습니다. 아래에 원 안에 적힌 글자 중 왼쪽은 ‘쇼셍크 1세’의 왕명인 ‘세텝 엔 라(Setep en Ra, 라에게 택함 받은, 라의 현현인 눈부신 자)’이고, 오른쪽은 본명인 ‘쇼셍크’입니다.

이와 함께 학자들이 ‘쇼셍크 1세’의 팔레스타인 원정 이유로 꼽는 것은, 이스라엘 왕국 분열로 인해 발생한 ‘해안 도로(해변길, via Maris)’ 이용의 어려움입니다.

▲ 해변길 왕의 대로 ⓒ위키피디아

이집트 헬리오폴리스에서 아람 다메섹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주전 13세기부터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앞선 이집트 제3 중간기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었듯이 이집트 제22왕조가 가진 이점 중 하나는 해안 도로를 통한 무역로를 이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맴피스에서 출발하는 ‘왕의 대로(King’s highway)’를 이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해안도로는 제22왕조에겐 중요한 무역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의 내부 분열과 그에 따른 분쟁들, 외부에서 발생한 독립을 위한 분쟁들은 해안 도로를 사용하는데 어려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열왕기상 4장 21-24절」을 보면 ‘솔로몬’이 가사를 비롯한 블레셋 지역을 통치했다고 말하는데, 「역대하 11장 5-10절」에 나타난 ‘르호보암’의 성읍 목록을 보면 가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이때 남왕국에서 독립한 것으로 보입니다.

학자들은 「역대하 11장 5-10절」에 나타난 성읍 목록이 실제 ‘르호보암’ 시기의 성읍 목록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이 성읍들은 헤브론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서쪽과 남쪽을 둘러싼 형태로 나타나고 있으며, 블레셋과 에돔 지역이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만약 ‘솔로몬’이 블레셋과 에돔 지역까지 모두 정복했다는 기록이 사실이라면, 왕국 분열 이후 각 지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남왕국의 영토는 상당히 축소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역대하」에 나타난 ‘르호보암’의 건축이 ‘쇼셍크 1세’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르호보암’의 성읍 건축은 이집트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광범위하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헤브론과 예루살렘을 방비할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따라서 「역대하 11장」에 나타난 ‘르호보암’의 건축 사업은 실제로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의 재위 초기에 일어난 사업이 아니라 ‘쇼생크 1세’의 침공 이후에 남왕국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 건축 사업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역대하」에 기록된 내용은 시간 순서상 배열이 잘못되어 있다고 봅니다.

‘쇼셍크 1세’가 팔레스타인 원정을 단행한 데에는 위에서 언급한 이유를 포함하여 더 복합적인 원인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가장 단순한 이유로 하이집트를 평정하는 일보다 분열되고 혼잡한 팔레스타인 지역을 평정하는 일이 더 쉬워 보였기에 이를 단행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이유에서였건 ‘쇼셍크 1세’의 팔레스타인 원정은 분열 왕국이 시작될 당시 이스라엘 남북왕국 모두의 국력이 상당히 약해졌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르호보암의 왕위 등극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열왕기」의 기록에서 ‘르호보암’은 그의 왕위 등극과 남북왕국 분열 사건 속에 주로 나타납니다. 그의 치세에 관한 기록은 상당히 적은 내용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르호보암’의 왕위 등극 과정에서 조금 이상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2장 1절」에 따르면 ‘르호보암’은 왕위에 오르기 위해 세겜으로 향합니다. 세겜 회집에 ‘여로보암’이 참석했다는 몇몇 구절(왕상12:2f,12)은 「열왕기상 12장 20절」에 나타난 ‘여로보암’이 돌아왔고 공회에서 그를 초청했다는 구절과 충돌하기 때문에 열왕기 역사가의 첨가로 보입니다.

‘르호보암’이 세겜에서 이스라엘의 대표들을 만나 왕위를 인정받으려고 했다는 점은 그의 아버지 ‘솔로몬’의 왕위 등극 때에는 볼 수 없던 모습입니다. 전체 이스라엘의 총회에 참석하여 왕위를 인정받은 사람은 ‘사울’ 뿐인데, 그는 미스바 총회에서 왕위를 인정받았습니다(삼상10:1-27). 

‘다윗’의 경우 이스라엘 대표들에게 왕위를 인정받은 후에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는 했습니다. 나중에 더 살피게 되겠지만, ‘다윗’은 ‘사울’의 사후에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오릅니다(삼하2:1-7). 이후 ‘다윗’의 유다 지파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다스리는 나머지 11지파는 7년 반 동안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이스보셋’의 죽음 이후 ‘다윗’은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데, 이때 ‘다윗’은 이스라엘의 대표들이 모인 총회에 소집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대표들 스스로가 ‘다윗’이 있는 헤브론으로 가서 ‘다윗’을 왕으로 인정합니다(삼하5:1-5).

‘솔로몬’의 경우는 이런 과정이 전혀 없습니다. ‘솔로몬’은 자신을 지지하는 제사장 ‘사독’과 예언자 ‘나단’에 힘입어 왕자의 난을 일으켰고 기혼에서 왕위에 오릅니다. 왕위에 오른 이후 ‘솔로몬’은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숙청 작업을 진행합니다(왕상2:13-46).

‘다윗’과 ‘솔로몬’에 대해서는 이후에 더 살펴봐야하겠지만, ‘르호보암’은 왕위를 인정받기 위해서 세겜으로 향했으나 결국 그곳에서 왕위를 인정받지 못합니다. ‘르호보암’은 유다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지파 연합에게 왕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유다 지파만의 왕이 됩니다.

「열왕기상 12장 1-20절」에 나타난 ‘르호보암’의 모습은 상당히 어리석고 무능해 보입니다. 만약 그가 지파 연합의 이상 징후를 느꼈기에 아버지 ‘솔로몬’과 다르게 스스로 세겜으로 향하여 왕위를 인정받으려고 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하겠다는 대답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르호보암’ 스스로 이상 징후를 깨닫고 세겜으로 간 것이 아니라면,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에서 왕권이 얼마나 약화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르호보암’은 이스라엘 지파 대표들의 호출에 응하여 세겜으로 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역으로 생각하자면, ‘솔로몬’이 상상 이상으로 철권통치를 펼쳤음을 알게 합니다. ‘르호보암’은 아버지 ‘솔로몬’만큼의 통치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왕위를 인정받기 위해 세겜으로 걸음을 옮겨야만 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솔로몬’의 철권통치와 더불어 생각해볼 점은, 어떤 방식이 이스라엘의 올바른 왕위 등극 절차였는가 하는 점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구약성경은 북왕국 전승을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남왕국 출신들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이들은 ‘다윗’ 혈통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점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역대기」는 ‘다윗’ 혈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고, 「역대기」보다 덜 하긴 하지만, 「열왕기」 역시도 ‘다윗’ 혈통이 남왕국의 왕위를 이어가는 점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렇기에 「열왕기상」에서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는 장면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진행됩니다. 오히려 「열왕기」는 ‘다윗’ 혈통이 왕위를 이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며 복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북왕국은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계속해서 왕조가 바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북왕국에서 왕조가 바뀔 때마다 「열왕기」는 그들의 죄를 언급합니다.

하지만 왕정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왕은 총회의 인정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다윗’은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기 때문에 이런 절차를 무시했지만, 결국 무력을 통해 다른 지파 대표들의 승낙을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기 위해 지파 연합의 승인을 받는 최소한의 절차를 지켰습니다. 이는 어쩌면 일부 학자의 설명처럼 ‘다윗’이 이스라엘 지파 총회의 조약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증거일 수도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다윗’의 혈통이 무조건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사상은 대부분의 지파에서는 갖고 있지 않던 사상으로 보입니다. ‘다윗’이 아니더라도 특정 혈통이 아무 조건 없이 왕위에 오른 것은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한 남왕국에서만 벌어진 일입니다. 북왕국에서는 특정 혈통이 4세대 이상 왕위를 유지한 일이 없습니다.

왕위 계승과 관련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솔로몬’과 ‘다윗’에 대해서 살펴본 이후에나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스라엘의 남북분열을 특정 개인의 잘못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는 점은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에 의해 자행된 이스라엘 백성의 과도한 노역은 분열의 계기가 되었을 수 있습니다. ‘르호보암’의 무능한 행태는 분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혈족에 의한 무조건적 왕위 계승 형태 자체가 당시 전체 이스라엘 사회에서 합의되지 않은 방식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라진 베냐민 지파

「열왕기상」에 나타난 남북분열 사건 속에서 이상한 점을 하나 더 살펴보려고 합니다. 「열왕기상 11장 31-39절」에는 예언자 ‘아히야’가 ‘여로보암’에게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아히야’를 통해 ‘여로보암’에게는 이스라엘 10지파를 맡기고, ‘다윗’의 자손에게는 오직 한 지파만을 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왕상11:31f,35f).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도 이미 같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열왕기상 11장 13절」을 보면 ‘다윗’과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의 아들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이상한 점은 너무나 쉽게 발견됩니다. 이스라엘은 12지파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로보암’이 열 지파를 다스리게 된다면, ‘르호보암’은 두 지파를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오직 11지파만이 나타납니다.

여기에서 빠진 지파가 베냐민 지파라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2장 21-24절」에서 ‘르호보암’이 북왕국을 공격하려고 할 때,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용사를 모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진술 역시도 앞선 진술과 충돌됩니다. 「열왕기상 12장 19-20절」에는 ‘온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하였다고 말하면서, 유다 지파 외에는 다윗의 집을 따르는 자가 없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학자는 베냐민 지파가 이미 유다 지파에 종속된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하나의 지파로 다뤄졌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를 따로 언급하는 구절이 너무 많습니다. 또 오래전부터 베냐민 지파가 유다 지파에 종속되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물론 왕정 시대가 시작되면서 지파의 지리적 경계가 모호해진 모습이 엿보이기는 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파에 의한 구분보다는 지역으로 구분하는 경향도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해도 베냐민 지파가 이미 사라져 없어졌고 유다 지파에 편입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 베냐민 지파가 이미 유다 지파에 편입되었다고 말하기에 무리가 있는 점이 ‘다윗’ 시대에 있었던 7년 반 동안의 왕국 분열기에 북왕국의 중심은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또 ‘다윗’이 왕국을 통일한 이후 반란을 일으켰던 ‘세바’는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습니다(삼하20:1-22).

「열왕기상 12장 16절」을 보면, 세겜에서 ‘르호보암’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은 이스라엘 대표들은 ‘세바’가 외쳤던 표어, ‘우리는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으며,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를 똑같이 따라 외칩니다(삼하20:1 참고). 이는 베냐민 지파를 중심으로 일어난 반란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히야’의 신탁에서 베냐민 지파가 사라지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베냐민 지파의 위치가 유다와 에브라임 사이였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남북왕국의 분단 경계선은 베냐민 지파 위에서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경됩니다. 그래서 베냐민 지파는 분열왕국 시대에 어느 왕국에 속했다고 말하기에 모호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열왕기상 12장 21-24절」에 나타난 형제간에 서로 전쟁하지 말라는 ‘스마야’의 선포는 역사가에 의해 첨가된 내용으로 보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만약 남북분열 직후 베냐민 지파가 남왕국에 편입되었다면, 이는 ‘르호보암’이 ‘여로보암’보다 먼저 발 빠르게 베냐민 지파 지역을 점령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르호보암’에 관해 살펴보면서 발견되는 문제들은 ‘르호보암’에 관한 기록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여로보암’에 대한 기록은 물론이고 ‘다윗’과 ‘솔로몬’ 시대까지도 살펴봐야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 제기된 문제들은 이후 ‘다윗’과 ‘솔로몬’에 대해 살펴보면서 다시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르호보암’의 통치 연대는, 그의 재위 5년이 ‘쇼생크 1세’의 팔레스타인 원정 시기인 주전 925년이기 때문에 주전 929년에서 913년까지이며, ‘르호보암’은 17년간 왕위에 있었습니다. 다음에는 ‘여로보암’에 대해서 살펴보게 될 것인데, 우선 그의 통치 연대부터 말씀드리자면, ‘여로보암’도 ‘르호보암’과 거의 같은 시기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여로보암’의 즉위 시기도 주전 929년이며, 그의 아들 ‘나답’이 즉위한 주전 908년까지 22년 동안 북왕국을 통치했습니다.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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