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성경은 일상세계에서 작동되고 있는가?

기사승인 2021.04.13  15:59:19

공유
default_news_ad1

- 성서의 ‘격의(格義)해석’과 그리스도교의 ‘격의문화’

[미리 읽어 두기]

‘격의(格義)해석’이란 용어는 일부 독자에게는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격의해석’은 ‘격의불교’ 즉 인도불교가 처음 중국에 전래하자 중국인이 불교의 개념과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하자 서진(280-316)과 동진(317-420)시대 사이에 불교를 도교와 유교사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을 ‘격의불교’라고 한다. 이는 번역이 어려워 ‘중국어 발음을 차용하여 ’격의불교(格義佛敎, GeYi Buddism)’이라고 한다.

필자는 이 개념을 차용하여 성서해석이 서구 학문적 전통에서만 해석된 그리스도교 성서해석의 전통을 ‘격의해석’이라고 부르며, 서구에서 만들어진 ‘교리체계와 신학체계’에서 형성된 그리스도교 문화는 한국을 포함한 피선교국의 종교적 심성에 안착하지 못한 ‘격의 그리스도교문화’라고 칭하기로 한다.

종교적 인간과 초월적 힘과의 교류여부에 따라 사라지는 신과 살아있는 신이 존재한다

종교의 역사는 신(적) 존재와 종교적 인간과의 교류와 단절의 역사이다. 종교적 인간은 초월적인 힘을 가진 신 혹은 신적 존재에게 다양한 종교의례로서 호응하며 영성교류를 한다. 그러나 초월적 존재와 종교적 신성이 종교적 인간과 교류하지 못하면 그 신성한 힘은 공명(共鳴)할 터전을 상실하여 살아있는 신으로서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종교적 인간과 초월적인 힘의 공명으로 그리스도교, 불교와 같은 보편성을 가진 세계 종교가 있는 반면, 유대교와 힌두교, 도교 등과 같은 특정 민족과 특정 지역에서 신앙되는 종교도 있다. 한편 한국은 무교의 다양한 신령, 조화주(造化主), 교화주(敎化主), 치화주(治化主),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예수 그리스도, 한울님, 일원상, 태을천존 등 무수한 신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지구촌에서 보기 드문 종교지형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역사의 부침 속에 종교의 신은 종교적 인간과의 소통 여부에 따라 그 힘이 강화되는 신과 그 힘이 약해지는 신도 있으며,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신도 있다.

불과 50여 년 전인 중국의 문화대혁명(1966-1976) 기간에는 낡은 사상(舊思想), 낡은 문화(舊文化), 낡은 풍속(舊風俗), 낡은 관습(舊習慣)을 청산하자는 파사구(破四舊)라는 문화적 구호로서 표면적으로 구시대의 문화를 청산하자는 정치운동이 발생하였다. 이때 주된 표적은 중국 전역에 산재한 종교성지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국가 차원의 종교사무국을 두고 종교성지를 복원함으로써 ‘신마저 부활’하고 있다. 이런 배경에는 장구한 역사적인 신성한 힘이 유물론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중국인들의 종교적 심성에 부응하는 신들은 부활하는 하나의 좋은 사례로 볼 수 있다. 북한도 남북통일이 된다면 숨죽이고 죽은 듯하던 신들이 역사 지평에 역현(力顯)하리라는 것은 쉽게 예측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로마 제국이 멸망 후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에 나오는 신들은 문학적 소재, 영화의 주제와 예술작품으로 역사에 남겨져 있지, 종교적 신앙의 대상으로 남겨져 있지 않다. 그리스 로마의 신전 신들은 인간의 상상력을 동원한 허구의 신들에 불과하기에, 정치체제와 국가의 흥망에 따라 그 신적인 권위가 소멸하여 신화 속의 신은 박물관에 소장된다. 즉, 종교적 인간이 신화적 사유로 창조된 상상력의 신적 존재와의 교류현상과 실재하는 영적 존재와의 교감에 의해 종교적 인간과 호응하는 종교현상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변찬린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자.

로마인들과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모든 예술, 과학, 문화, 종교의 근거가 모두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체계 위에 그것이 다 꽃 피고 있는 거에요. 우리가 그리스 철학을 볼 것 같으면, 헤시오도스라는 사람이 『신족보』라는 책을 썼어요. 거기에 볼 것 같으면, 제우스 신과 올림푸스 열두 신이 어떻게 태어나는 과정을 다 기록해 놓지 않았어요?

그러면, 이 성경 속에는 과연 신화가 있을 수 있느냐? 제가 알기로는 성경 속에는 신화가 없어요. 로마나 그리스에서 형성된 신화와 성경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그리스인들이나 로마인들이 세운 신화체계, 제우스 신을 중심으로 해서 올림푸스의 열두 신, 그리고 무수한 신들이 인간과의 관계를 기록한 것이 신화인데, 그 사람들은 그때 그런 신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떤 그리스와 로마인들의 탁월한 예술과 문학적인 상상력에 의해서 인간의 의식 구조가 만들어 낸 것이지, 제우스나 올림푸스의 열두 신이 이 우주에 존재했던 신들이 아니에요.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느냐? 오늘날 그리스나 로마의 신화 속에 등장하는 제우스를 믿는 신자는 한 사람도 없어요. 로마 제국과 그리스 제국이 멸망함과 동시에 그 신화는 붕괴되어, 오늘날 서양의 문학적인 면에서는 신화 형식의 줄기가 아직도 있을 수 있지만, 제우스의 신상이나 그런 곳에 가서 예배를 보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그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우주에 실존했던 신이 아니고,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서 만들어낸 신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든지, 불교나 유교나 도교나 마호메트교나 힌두교라든가, 또는 자이나교라든가, 모든 종교 기독교라든가, 이것은 우주의 실재했던 어떤 신들과의 교감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종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없어질 수 없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힌두교에는 인도의 수억의 신자들이 있고, 지금도 중동의 모든 지방은 다 그것이 마호메트교가 아니에요? 또, 중국이 아무리 모택동을 동원해서 공자를 비판시키는 운동을 일으켜도, 중국의 의식 구조 속에서는 공자의 사상을 몰아낼 수 없는 거에요. 모든 종교가 살아남는 것은 그것이 어떤 존재했던 신들과 구체적인 교감 속에서 이루어진 것인데, 그리스나 로마에 존재했던 신화 속에 있던 신들은 실재했던 신들이 아니고,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신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 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종교적인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 변찬린, 『성경강의테이프』, 1979년 8월 26일

그럼 성서에 등장하는 야훼 하나님, 말하는 뱀, 사탄, 모세가 행한 애굽에서 행한 10개의 기적과 홍해의 기적, 예수가 행한 오병이어의 기적, 부활과 승천 등은 그리스·로마 신화와 같은 문학작품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 그리스도교인에게 이런 질문은 불경스러운 질문일지도 모른다. 성서라는 종교문헌은 폭넓은 이해의 범주가 있다. 보수전통문자주의자들이 주장하듯 성서는 성령의 감동으로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는 무오한 종교문헌이라고 이해하는가 하면, 다른 세계경전에 보이지 않는 예수의 신성화의 특성이라고 말하는 성령잉태와 부활과 승천마저 신앙하지 않는 그리스도교 신자도 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교인들은 성서는 그리스·로마 신화와 같은 인간의 상상력의 부산물인 문학작품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성서가 문학적 형식과 신화적 소재와 표현을 구비하고 있더라도 그리스도교의 종교문헌이며, 그 신은 신앙대상이며, 예배를 받는 초월성과 내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신은 역사(歷史)에서 역사(役事)하고 계신다고 신앙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에게 성서라는 종교문헌이 인간의 상상력과 구성력에 의해 만들어진 희랍적 신화에 바탕을 둔 신화체계에 의해 성서가 해석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스도교의 성서해석의 역사전통은 아직 ‘격의해석’에 불과하다

성서해석의 역사는 성서가 헬레니즘에 의해 해석된 역사이다. 살아있는 신(적) 존재와 인간의 교류역사가 기록된 성서가 인간의 문학적 상상력에 기반을 둔 신화체계와 그리스와 로마 철학 체계에 의해 해석된다.

세계적인 가톨릭 신학자인 한스 큉은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을 빌어 원시 그리스도교의 유다계 묵시문학 패러다임, 고대 그리스도교의 보편적 헬레니즘 패러다임, 중세 패러다임, 종교개혁의 개신교 복음 패러다임, 이성과 진보에 정향된 근대 패러다임이란 범주로 고찰하며, 오늘날은 탈교파 일치운동 패러다임이 될 것이라 예견하고 있다.(1) 대표적인 개신교 교회사가인 하르낙은 역사시대의 복음을 사도시대의 그리스도교, 가톨릭으로 발전해가는 그리스도교, 그리스 가톨릭시대의 그리스도교, 로마 가톨릭시대의 그리스도교, 개신교시대의 그리스도교 다섯 시대로 구분하고 있다.(2)

▲ 한스 큉, 이종한 옮김, 『그리스도교』, 분도출판사, 2002.

예수와 사도시대를 지나 서구철학의 영향 아래서 형성된 교리체계와 신학체계는 화이트헤드가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헬레니즘 철학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서구 그리스도교는 예수회, 선교사 등 직업 종교인에 의해 선교가 전개되었다. 한국을 포함한 피선교국은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성서의 진리’가 선교 지역의 종교인의 심성에 바탕을 둔 새로운 해석을 통해 선교된 것이 아니고 서구신학에 의해 해석된 교리체계와 신학체계가 준거가 되어 해당 선교국의 종교적 심성과 종교문화를 재단하고, 심지어 선교지역의 종교문화를 환원론적으로 재해석하여 왔다. 한마디로 성서해석은 완결되었고, 그 토대위에 형성된 신학과 교리체계에 표준삼아 ‘신학의 토착화’를 추구한 것이다.

한스 큉과 하르낙이 말한 그리스도교 문화의 시대구분을 거시적인 역사적 안목으로 관찰할 때 변찬린이 1970년대 선언한 그리스도교 문화와 이를 지탱한 성서해석과 신학적 교리는 ‘성서로 성서를 해석한 역사’가 아니라 성서를 헬레니즘으로 해석한 역사라고 인식은 타당성을 가진다. 또한 이런 성서해석의 토대 위에 형성된 그리스도교 문화는 성서의 본질과는 상당한 괴리를 나타낸다고 지적한다. 변찬린은 『성경의 원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예수가 승천하고 사도들이 순교한 후 진리의 정맥은 지하깊이 스며들고 역사의 지표에는 연원을 잃은 온갖 교파들이 백강(百江)의 흐름처럼 아집과 독선의 탁류(濁流)를 일으키면서 도도(滔滔)히 흘러갔다.

생명수의 뿌리를 잃고 온갖 교리로 절단된 삽목(揷木)들이 나라와 민족과 풍토와 습관에 따라 심어지기 시작했다. 성경의 진리가 로마에 이식되면서 부터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곡해되고 헬레니즘과 혼음한 후 기독교(가톨릭) 라는 옷을 입고 서양화된다. 모든 고등종교는 동양에서 발아(發芽)되어 정과(正果)를 맺었다. 성경도 동양의 심성 속에 계시된 평화의 문서인데 피묻은 서양의 가위로 오리가리 재단(裁斷)되어 사과(邪果)를 맺고 있다.(중략) 그리하여 성경과 기독교를 동일시하는 착각이 2천 년 동안 지속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먼저 이 엄청난 미망과 허위와 독단을 타파해야 한다.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上』, 한국신학연구소, 2019, 9-10.

역사적으로 유교와 도교의 발상지인 중국의 세계관에 들어온 인도불교의 정착과정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도불교가 중국에 전래하였을 때 불교의 핵심사상인 ‘공(空)’사상은 중국인에게 어떤 과정을 거쳐 이해되고 수용되었을까? 실용적인 중국인에게 ‘공’사상은 그대로 이해할 수 없는 사상이었다. 당시 중국인들은 불교는 황노학(黃老學)의 일종이며, 노자가 부처가 되었다는 노자불타설(老子佛陀說), 노자가 인도로 가서 석가모니로 다시 태어났다는 노자화호설(老子化胡說) 등의 이야기가 생겨났다는 것은 당혹스런 세계관이 출현한 것에 대한 중국인 나름의 방어기제의 표현이다.

『모자이혹론(牟子理惑論)』에서는 모자가 기존의 유교와 도교 등의 종교적 언어를 빌어 열반(涅槃)은 무위(無爲), 선정(禪定)은 청정무위(淸淨無爲) 등으로 해석하였다. 또한 불교의 오계(五戒)를 유교의 오상(五常), 즉 불교의 오계(五戒)를 유교의 오상(五常) 같다고 이해하게 했다. 불살생(不殺生)을 인(仁)으로 불투도(不偸盜)를 의(義)로, 불사음(不邪淫)을 예(禮)로, 불망어(不妄語)를 지(智)로, 불음주(不飮酒)를 신(信)으로 이해하게 한다. 인도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었을 때 불교라는 세계관은 도교적 세계관과 유교적 세계관에 의해 해석된 ‘격의불교’ 시대를 걸쳐 일정한 기간이 지난 후 중국불교인 ‘선불교’와 다양한 종파불파가 탄생한다.

▲ 니니안 스마트 엮음, 김한영 옮김, 『지도로 본 세계 종교의 역사』, 갑인공방, 2002, 76.

변찬린은 사변적인 인도불교가 실용주의적 사고를 하는 중국에 전래할 때 ‘격의불교’를 통해 수용된 역사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하고 있다. 지금의 그리스도교의 전통은 성서의 순수성과는 괴리를 가진 ‘격의 성서해석’에 바탕을 둔 ‘격의 그리스도교 문화’에 불과하다. 그는 성서텍스트가 헬레니즘적 격의해석 수준에 머물러 있기에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추론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인식에 따라 변찬린은 “성경은 성경으로 풀이한다”라는 원칙을 가지고 성서해석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성서해석에 착수한다.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그가 열두 사도에게 마가의 다락방에서 너희들이 기도하고 있으면, 내가 약속한 성령을 내리겠다, 그래서 사도들이 일심으로 기도해, 예수가 승천한 다음에 50일 만에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뜨거운 불을 받고서,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그때부터 초대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도들이 복음을 들고, 로마로 이제 가게 됩니다. 제일 처음에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에 제일 처음에는 갈 생각은 없었어요. 그가 제일 처음 선교의 목적지는 아시아였습니다. 소아시아나, 인도나 말하자면 동양, 왜냐면, 동양이라는 것은 모든 종교의 발상지에요. 어떤 종교든지 서양에서 난 종교는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성령이 말렸어요. 동양에 가지 말고 마케도니아 쪽으로 행하라. 그래서 선교의 방향이 로마로 향했다는 것입니다.

로마에 가서 사도들이 살았을 때는 이 복음이 순수하게 증거되었는데, 열 두 사도가 순교한 다음에는 이 복음 속에 잡것이 섞여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래서 콘스탄틴 대제 때 가서는 기독교가 공인되는데, 그렇게 공인되는 것은 기독교의 진리가 자기 마음에 옳아서 공인한 것이 아니고, 기독교도인들의 수가 점점 불어나니까, 기독교도들을 잘못 건드리면, 정치를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자기의 어떤 정치적인 야심 때문에, 기독교를 공인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그릇이 비어 있으면, 빈 그릇 속에는 다른 온전한 것을 담을 수 있는데, 그릇이 꽉 찰 것 같으면, 다른 것이 들어갈 여유가 없어요. 마찬가지로 로마제국은 그리스의 철학 사상을 배경으로 해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고 있을 때에요. 그러니까 그들이 히브리 사상인 성경을 순수하게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없었어요. 말하자면 자기들의 문화와 자기들의 사고구조를 가지고 있었기때문에, 기독교의 이것이 그들에게 들어가자면, 헬레니즘의 어떤 결탁이 있어야만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거에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이것은 좀 다른 예인데, 뜻은 같은 거에요. 불교가 제일 처음에 인도에서부터 히말라야 산맥과 티벳을 넘어 그때에는 교통이 없을 때입니다. 지금도 티벳은 넘기 힘들 때인데, 지금부터 수 천 년 전에 티벳을 넘어서 중국에 오자면, 그것은 목숨을 내건 길이에요. 그런데, 구한말에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서 구마라습(鳩摩羅什)이라는 아주 위대한 승려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중국어로 번역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그때 금강경이라든가, 법화경이라든가 그런 위대한 경전이 출간되게 되었는데, 중국에서는 인도적인 불교의 사상을 도저히, 중국인의 심성을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었어요. 불교의 사상을 한마디로 말하면, 공(空)사상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행무상, 제법무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보이는 것, 이것은 가상이라는 거에요. 다시 말하면 유심조.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지, 본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진리의 근본은 텅 비어 있다는 거에요. 그런데 이 중국인, 중국 사람들은, 한족들은 굉장히 실적인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은 사변적이고, 관념적인 인도의 아리안족 같은 그런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아주 실질적인 사람들이에요. 그러면, 이 실제 본래 현상 세계라는 것이 불교에서 공이라고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불교가 제일 처음에 중국에 전래될 때에, 어떤 옷을 입고 시작하는가 하면 장자와 노자와 주역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삼현학(三玄學), 현학(玄學)이라고 하는데, 노자의 『도덕경』을 볼 것 같으면, 무(無)의 사상이 나와요. 이것은 공자의 사상에서는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럼, 모든 우주의 근본을 무(無)로 보는데, 이 무(無)라는 것이 공(空)사상과 비슷합니다. 인도의 불교의 공사상을 해명할 때, 노자와 장자가 말한 무 사상을 끄집어내어서, 노자와 장자와 주역의 사상을 가지고, 불경을 다시 해석하는 거에요. 그래서 그것을 전문적인 종교 용어로 무엇이라고 하냐면, 격의(格義)라는 것입니다.

성서는 그리스·로마신화와 같은 신화체계가 아니다

유대인의 종교적 세계인 ‘TANAKH’(타나크, 구약성서)와 예수의 역사적 생애, 그리고 예수 공동체에서 편집된 신약성서라는 종교문헌은 신화체계에 바탕을 둔 헬레니즘에 의해 해석된다. 성서의 종교세계가 신화적 체계에 바탕을 둔 헬레니즘에 의한 이천 년의 해석학적 전통이 그리스도교의 성서해석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성서의 해석학적 전통은 ‘격의 성서해석’의 시대이고 이로 인해 형성된 그리스도교 문화는 ‘격의 그리스도교 문화’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현실진단은 희랍적 이원론에 의해 해석된 서구신학이 성서가 말하는 세계와 동떨어진 해석학적 거리를 바탕으로 기복신앙과 자본신앙에 함몰된 그리스도교 문화가 성서의 세계관과는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종교문헌에 담긴 정신과 이에 바탕을 둔 종교문화의 종교적 거리가 괴리가 심할 때 종교 역사에서는 새로운 종교적 인물 혹은 새로운 경전해석을 통해 ‘혁신과 개혁’의 기치를 내세운다. 즉 종교문헌의 창조적 해석이 소멸되며, 경전의 황금률이 실천되지 못하는 종교문화가 횡행할 때 새로운 종교개혁으로 그 종교적 생명을 혁신시키기거나 혹은 그렇지 못할 경우 역사에서 그 종교적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 그리스도교 성서의 역사에서 아브라함, 모세, 예언자와 선지자, 예수, 바울 등이며, 유교계통에서는 공자, 맹자, 주희, 왕양명, 불교계통에서는 나가르주나, 달마, 도교계통에서는 노자, 장자, 구겸지, 왕중양 등을 들 수 있다. 한국에서는 원효와 의상, 최치원, 퇴계와 율곡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어찌하여 기독교의 원효, 기독교의 고운, 기독교의 퇴계와 율곡은 없는가?”라는 변찬린의 반문은 한국의 역사적 학맥을 창조적으로 계승한다는 역사적 자의식을 가지고 『성경의 원리』를 저술하였다는 언설로 이해되어야 한다.

변찬린은 성서가 헬레니즘 사상에 의해 재해석되어 성서의 진리가 그 성격이 바뀌었다고 진단한다. 다시 말하면 서구신학의 성서이해의 가장 밑바탕에는 헬레니즘적 사유로 성경이 ‘격의해석’된 바탕 위에 만들어진 것이 서구 교리체계라는 것이다. 그의 안목으로는 한국의 그리스도교 문화는 서구 그리스도교의 전시장에 불과한 식민식학과 사대 그리스도교라는 인식이 강하였다. 그는 “서양의 신학은 성경의 산에 입산하여 도라지와 더덕 몇 뿌리를 캐 가지고 산삼으로 착각한 신학이었다”고 하면서 “이미 서양에서는 한물간 사상을 소개하면서 그것이 새 사상인 양 선전하는 〈신학 오파상〉들이 주름잡고 있는 것이 한국 신학의 현주소이다”라고 한국 신학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이런 인식은 종교문헌 자체를 연구하고 해석하고 실천하던 한국 경전해석의 전통을 상실하고 그리스도교 문화가 한국에 전래한 이후 서구의 신학체계와 교리체계를 수입하는데 열중하여 ‘신학의 토착화’를 전개한 당시 한국 신학의 실정을 고발하고 있다. 신학계뿐만이 아니라 역사학계, 종교학계를 포함해 인문학은 학문제국주의에서 탈피하여 ‘우리 학문’을 하여야 한다.

변찬린은 『성경의 원리』와 『성경강의테이프』에는 저명한 서구 신학자의 신학(3)을 이해한 바탕 위에 특히 그 가운데 현대 신학 연구의 창시자인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의 ‘비신화화’와 알타이저의 사신신학(死神神學)에 집중되고 있다.

불트만은 문서전승보다는 구두 전승이 선행했음을 밝혀내고, 4대 복음서의 전승은 역사적 문서가 아닌 신앙 공동체의 체계임을 주장한다. 특히 신약성서의 ‘비신화화’를 통하여 과학적 사고에 물든 현대인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그가 복음서에서 신화를 제거한다는 것은 신화가 당대인과 이해될 수 있도록 해석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신화적 언어가 당대인과 소통가능한 언어로 재해석하는 해석학적 과정을 ‘비신화화’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신약성서의 세계관과 과학적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관을 구성하고 있기에 신약성서의 초자연적인 이적과 기적 현상은 추방되거나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 이면에는 성서는 신화적 표현양식을 가진 종교문헌이라는 선이해가 깔려있다.

그러나 변찬린은 성서는 신화적 영역을 탈피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한 종교적 인간의 이야기를 담은 종교문헌으로, 신화적 양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문헌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는 이미 40여 년 전에 이미 성서를 신화체계로 인식하는 관점을 비판하며, 상징체계임을 강조한다. 심지어 엘리야데의 『샤머니즘』과 프레이저의  『황금의 가지』만 읽어보았어도 성서를 신화적이라고 보는 관점은 허구라고 지적한다. 신학자가 해석하지 못하는 것은 ‘기적’적인 사건이고 ‘신화’적인 사건으로 치부하는 성서해석의 오류임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성경의 원리』 출간 후 첫 성경강의모임에서 이 부분에 대해 구약의 노아 가정에서 발생한 사건(4), 신약의 ‘오병이어 기적’(5)에 대해 상세하게 ‘신화적 사건’이 아님을 논증하고 있다. 그는 희랍적 이원론에 의한 해석으로 신학과 교리의 체계를 구축함으로 말미암아 ‘성서의 진리’가 훼손되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성경도 로마에 가면서부터 이 성경 속에 있는 사상은 점점 이것이 퇴색되어 가면서, 여기에 점점 헬레니즘의 사상이 가미되어, 여기에서부터 성경이 잘못되어 가는 거에요. 그래서 지금 서양 신학자들이라는 것이, 이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인 영향을 받아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이 스콜라 철학까지도 성경을 해석한 사람들이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아우구스티누스나, 중세의 카톨릭의 이념적인 초석을 세운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사람, 토비즘이라고 그러지요. 그와 같은 신학체계는 성경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와 로마에서 시작되는 스콜라 철학에 의해서 성경을 다시 해석하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있는 그 진리의 순수성을 잃어버리는 거에요.

(중략)

오늘날 성경을 모든 사람들이 이 성경은 신화의 체계로 구성되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에덴동산에 있었고, 에덴동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 나무가 있었고, 또 여러 나무가 있고, 거기에는 네 강이 흐르고, 뱀이 아담과 하와를 꾀었다. 이것을 서양 신학자들은 그것을 어떤 하나의 신화체계이다. 인간의 의식 구조가 어떤 신화의 형식을 따가지고 지은 문서이다.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를 풀다가 풀지 못하면, 다 신화로 돌려 버려요. 그래서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독일에서 볼트만이라는 사람은 성경의 비신화화라고 해서 성경에서 풀지 못하는 것은 다 빼어 버리니까, 마지막에 성경에 남는 것이 몇 줄이 없어요. 한동안 그 사상이 풍미하다가, 요새는 끝났지 않아요! 성경을 그와 같이 신화 양식으로 해석하는 사상이 어디에 나왔는가 하면, 로마와 그리스 신화 체계에서 나온 것입니다.

(중략)

불트만이라는 사람이 성경을 비신화한다고 하면서, 온갖 일을 벌일 때, 루마니아의 학자인 엘리야데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인류학이나 종교학에 있어서 세계적인 학자, 시카고 대학의 교수인데, 그 사람이 쓴 『샤머니즘』이라는 책이 있어요. 아주 탁월한 명저입니다. 그 샤머니즘을 볼 것 같으면, 고대 인간들의 의식 구조 속에서 그 샤머니즘의 의식이 어떻게 형성되면서, 인간의 엑시타스 현상이나 트랜스 현상, 입신 현상, 황홀경에 이르는 현상, 그와 같은 현상이 어떻게 이루어지면서, 그것이 어떻게 상징화되면서, 인간에게 나타나는가? 인간 사고의 원초적인 구조를 밝힌 것이 『샤머니즘』이라는 명저에요. 그런 것을 볼 것 같으면, 성경을 비신화화 한다고 해서, 성경에서 엉터리 같은 것을 다 빼어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영국의 옥스퍼드에 있는 프레이저라는 사람이 『황금의 가지』라는 위대한 명저를 18세기에 썼는데, 그런 책 한 권을 읽었더라도, 종교라는 것이 어떻게 샤머니즘에서 시작되어 전래된 기초적인 발전 양식도 알았을 거에요.

- 변찬린, 『성경강의테이프』, 1979년 8월 26일.

신화적 영역을 탈피한 역사적 인간의 담론의 장인 성서의 역사는 신화의 세계가 아닌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한 종교적 인간의 이야기를 담은 종교문헌이다. 그런데 서구 성서해석의 역사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구도의 문서로서의 생명성이 사라지고 신화적인 문서로 이해하는데서 ‘격의 성서해석’으로 인한 ‘격의 그리스도교 문화’가 주류가 됨으로 인해 성서의 정신과는 동떨어진 신앙현상을 보이고 있다.

성경은 당대인과 관계를 맺고 실천되어야 하는 생활경전이다

성서라는 종교문헌은 당대인과 관계를 맺고, 일상생활에서 재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변찬린은 강조한다. 변찬린은 ‘성경을 상징으로 푼다’는 방식을 제시하며, 성서를 죽은 문서가 아닌 현존하는 인간에게 살아있는 구도의 문서로서 되살려 놓았다. 그에게 있어 성서는 중동의 신화나 문학작품과 같은 신화체계가 아닌 상징체계의 문서이며,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현재 우리가 실천해야 할 과제로서 이해하고 있다. 성서가 현대인과 소통되지 못하고 하나의 신화와 같은 문학작품으로 이해될 때 성서를 바탕으로 형성된 그리스도교의 종교문화는 인간과 교류하지 않고 하늘나라에 홀로 좌정하고 있는 ‘격절신(隔絶神, Deus otiosus)’에게 종교의례를 하는 것이며, 성서는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빌미’삼아 인간의 종교적 영성을 병들게 하는 종교문헌으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지금 그리스도교 문화는 성서의 본질과는 상당한 해석학적 거리를 가진 ‘격의성서해석’이며, 이를 토대로 만들어진 그리스도교 문화는 ‘격의그리스도교문화’에 불과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신앙현상이다.

우리는 성경을 현존 인간과 ‘관계성’이 있으며, 이를 ‘발현성’이 있는 실천문서로서 읽어야 한다. 성서를 포함한 세계 경전은 현존하는 인간이 역사적 지평에서 실천하고 재현되어야 할 종교적 황금률이다. 성경의 사건을 오늘날 재현하여 실천하는 것은 우리에게 남겨진 역사적 과제이다.

미주

(미주 1) 한스 큉, 이종한 옮김, 『그리스도교 : 본질과 역사』, 신학 텍스트 총서, 분도출판사 2014.
(미주 2) 아돌프 하르낙, 오흥명 옮김, 『그리스도교의 본질』, 한들출판사, 2007.
(미주 3) 이호재, 『한밝 변찬린(한국종교사상가)』, 문사철, 2017, 74-80.
(미주 4)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中』, 한국신학연구소, 2019, 66-75.
(미주 5)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下』, 한국신학연구소, 2019, 126-132.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