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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존 멕켄지 캐나다 선교사, 한국 선교의 씨앗이 되다

기사승인 2021.04.10  16: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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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독립운동을 지원한 캐나다장로회의 용정 제창병원 ⑴

▲ 캐나다장로교의 한국 선교의 씨앗이 되었던 윌리엄 존 멕켄지 선교사 ⓒhttps://ucceast.ca/32175-william-j-mackenzie

어린 시절부터 『빨간 머리 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무대 “프린세스 에드워드 아일랜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어느 날 꿈처럼 아련하고 신비로운 그 세계가 뜨거운 감동과 함께 나의 삶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그 환상적인 무대가 다름 아닌 1895년 6월 24일 소래에서 사망한 캐나다선교사 맥켄지가 자신의 한국선교 비전을 마지막으로 밝히고 떠나온 곳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요, 그의 한국선교 후원을 책임진 목사와 교우들이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맥켄지의 유지를 받들려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 그리어슨, 던칸 맥레, 푸트 세 사람 다 그 지역 사람들이었고 그들을 파송하고 후원한 메리타임 지역의 교회들이 바로 “프린세스 에드워드 아일랜드”를 중심으로 한 노바스코샤와 뉴브런스윅에 있었기 때문이었다.(1)

한국에 온 초기 캐나다 선교사들이 『빨간 머리 앤』의 배경이 되는 지역에서 왔다는 사실이 나에게 묘한 감회를 일으켰다. 나의 신앙의 뿌리 일부가 태평양 건너에 있는 그들에게 잇대어 있다는 것 그리고 120여 년 전의 그들이 21세기를 살고 있는 나에게 빚을 주었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웠다. 아름다운 곳에서 온 아름다운 사람들의 헌신을 “섭리”의 눈으로 보며 캐나다장로회의 한국선교 123년이 되는 해에 작은 글로서나마 깊은 감사를 표현하고 싶었다.

특별히 용정에 제창병원을 세워서 조선인 디아스포라들에게 인술을 베풀며 조선독립운동을 지원해준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과 교우들의 헌신적인 사랑을 조금이나마 알리고자 묵상하며 졸필을 들었다.

캐나다장로회의 한국 선교 시작과 10년의 역사

캐나다장로회 매리타임 연회가 한국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맥켄지(김세, William JOHN McKenzie) 죽음 이후였다. 실제로 메리타임 연회의 선교위원회는 1893년 10월, 맥켄지가 한국으로 떠나기 직전에 그를 초청하여 한국 선교에 대한 비전을 들었으나 그의 선교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0월 26일 그는 트루로 지역 교회 성도들의 격려와 위로를 받으며 밴쿠버로 떠났다. 그리고 11월 12일 밴쿠버에서 배를 타고 조선으로 왔다. 그는 일기에 “하나님, 이제부터는 한국이 내가 받아들일 땅이 되게 해주소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오랫동안 한국에 머물며 일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죽음이 나를 삼킬 때,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큰 나팔소리가 울릴 때까지 내 유골을 그들과 함께 썩게 하소서.”라고 자신의 심정을 기록하였다.(2)

그는 선교사 모펫의 소개로 1894년 1월에가 황해도 장연군 송천(솔내)에 와서 거주하며 열심히 전도하였다. 그는 한국인과 동일한 수준의 열악한 초가집에 거주하며 조선식 허술한 식사와 모국 캐나다와 다른 한국 기후에 시달렸다. 그러나 성도들과 함께 노동하며 교회 건축을 하고 남녀학교를 세우며 교육과 목회를 겸하여 섬기는 중에 과로로 말라리아 열병과 일사병에 걸렸다. 그는 고열과 망상과 불면에 시달리다 6월 24일, 소래교회 건축봉헌을 하루 앞둔 날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가 보낸 마지막 편지에 감동을 받은 캐나다장로회 총회 해외선교위원들이 위원회로 모였고 그들은 “한국 선교 사업에 참여하고자 하는 계획을 해외선교위원회 동부 분과가 연구하여 다음 회의에 보고하도록” 하는 발의를 만장일치로 합의하였다.(3) 그리하여 캐나다장로회 총회 의사록에 “한국”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맥켄지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캐나다장로회 총회가 한국 선교에 대한 안건을 다음해로 미루면서 매리타임 지역교회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시들해졌다. 그 후 소래교회 신도인 서경조가 사인을 하고 소래교회 성도들의 이름으로 보낸 편지가 캐나다장로회에 도착하여 어느 잡지에 실리자 ‘선교사를 기다리는 현지 교우들의 간절한 호소’에 메리타임 지역교회들은 다시 한국선교를 거론하며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1897년 2월 23일 해외선교위원회 정기모임에 참석한 캐나다장로회 여신도회해외선교회(WFMS) 대표가 한국 선교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한국선교에 대한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와 공론화되었다. 그러자 총회해외선교위원회는 한국 선교 문제를 총회에 보고하여 총회에서 가부를 결정하도록 위임하였다. 3년에 걸친 기도와 찬반토론 끝에 1897년 메리타임연회에서 111대 25로 한국선교를 가결하였다.

1898년 2월 해외선교위원회는 그리어슨(구례선,Robert Grierson)과 푸트(부두일, William Rufus Foote)의 지원을 받아들이고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그 후 4월에 던칸 맥레(마구례, Duncan M. McRae)를 세 번째 한국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한국 선교의 개척자로서 1898년 7월 20일에 메리타임을 출발하였다. 8월 14일 요코하마에 도착하였으며 24일에 나가사키에서 히고마루 호를 타고 9월 8일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그들이 도착한 1898년 9월은 조선장로회사기에 의하면 선교사공의회시대(1893~1900)(4)로 분류되고 있는 시대이다.

그들은 10월에 미국 북장로회, 호주장로회, 미국 남장로회로 구성된 장로회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등록하여 캐나다장로회로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공의회에 의해서 부산과 원산 두 지역을 선교지로 제안을 받았다. 그들은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인 게일, 펜윅, 하디가 활동하였던 원산을 선교지로 택하였다.

그들은 원산에서 캐나다장로회선교사회를 조직하고 그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회로부터 세워진 교회와 사무 일절을 인수인계 받았다. 푸트는 원산, 그리어슨은 성진, 던칸 맥레는 함흥(5)에 선교지부를 열어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1899년 9월 역시 매리타임의 여신도들의 지원을 받는 트루로 출신의 루이스 맥컬리가 한국에 도착하여 한국 선교부의 귀중한 인력이 되었다.

해외선교위원회는 선교사들의 지원 보강 요청에 따라 1901년 10월 로브목사(업아력, A.F. Robb)와 그의 부인을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메리타임 지역 여신도들은 자력으로 1901년에 케이트 맥밀란(Kate McMillian), 1903년에 제니 로브 (Jennie Robb), 1905년에 캐서린 메어(Catherine Mair)를 한국에 파송하였다. 해외선교위원회는 1906년에 영(L. L. Young)박사를, 1907년에 로스목사(A. R. Ross)를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은 10년 동안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이라는 조선의 사회적 정치적 격변에도 불구하고 권서인들, 조선어 교사들, 조사들과 함께 함경남북도 일대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그 지역의 먼저 구원받은 성도를 찾아 그들과 함께 협력하여 지역사회 복음 증거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들은 학교와 병원을 세웠으며 도시를 중심으로 성경공부반과 여성을 위한 성경공부반도 따로 운영하였으며 농한기에 계절 성경학교를 열어 체계적으로 제자들을 양육하였다.

특별히 1907년에 헤이그밀사사건 실패와 고종 퇴위와 정미7조약으로 법률제정권, 행정권, 관리 임명권을 상실한 조선인들의 절망감, 자기 비하와 국권 상실에 대한 분노와 슬픔이 집단적 인 회개와 통성기도로 나타나 부흥운동으로 결집되었다. 성진, 함흥, 원산 등에서 교회는 절망에 빠진 한국인들의 피난처가 되었으며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복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였다. 1907년에 평양에서 시작된 대부흥운동은 원산, 함흥, 성진에서도 나타났고 그 결과로 캐나다장로회 선교회 산하 교회와 성도수가 엄청나게 증가하였다.

1899년 미국 북장로회로 부터 선교지역을 넘겨받을 때 총 14개 교회가 있었는데 1909년에는 134개의 교회로 늘어났다. 세례자 수는 63명에서 1,141명으로 늘어났고 총 교우 숫자는 308명에서 5,594명으로 증가 되었다. 그러나 선교사 숫자는 1899년에 선교사 부인을 포함하여 5명이었고 1909년에 선교사 부인과 여자 선교사를 포함하여 14명에 불과하였다.

1899년 당시 캐나다장로회 선교부 산하에 한국인 전도자는 1명도 없었으나 1909년에는 87명이 되었으며, 신학생도 1명도 없었으나 1909년에는 9명, 고등학생도 1명도 없었으나 1909년에는 110명으로 증가하였으며 초등학생은 15명에서 721명으로 늘어났다.(6) 선교 병원이 성진, 원산, 함흥에 세워졌으나 폭발적인 부흥으로 인하여 의사들조차도 순회전도에 밀려서 의료행위를 병원이 아닌 지방 순회전도활동에서 할 정도였다.

캐나다장로회 선교부는 선교활동을 시작하는 처음부터 선교사 인력난에 시달려 해외선교위원회에 선교사 인력 지원을 거듭 거듭 요청하였다. 그러나 캐나다장로회 총회 동부분과 해외선교위원회는 자신들만의 힘으로 새로운 선교사를 파송할 경제적 여력이 없어 서부 분과에 선교사 파송 건을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 멕켄지 선교사 신학을 공부한 ‘장로교대학’(Presbyterian College) ⓒhttps://ucceast.ca/32175-william-j-mackenzie

캐나다장로회와 남감리회 선교부의 함경도와 북간도 지역 분할에 대한 합의

장로회연합회와 감리회본부가 1900년대 초기 10년 사이에 결정한 가장 중요한 일은 선교현장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양 선교부가 선교 지역 분할에 동의를 한 것이었다. 캐나다 선교부와 남감리회 선교부는 함경도와 강원도 인접 지역에서 서로 겹쳐 있었다. 그들은 상회의 결정에 따라 교파적 경쟁을 피하기 위해 오랫동안 토론과 숙의 끝에 선교지역을 조정하였다. 캐나다장로회는 원산 이남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철수하기로 하고 27개 교회, 97명의 세례자들, 171명의 초신자들과 약 1,000 여 명의 신자들을 감리회 선교부로 이전하였다.

감리회 선교부는 기존의 선교 지역에서 함경도 원산의 이북 지역과 독원과 안변지방을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의 선교지역으로 인정하였다. 그 지역의 교회는 1개였고 교인은 20명에 세례자는 3명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원산을 양 선교부의 공통 선교 지역으로 정하였다.(7)

감리교 선교부는 함경도 지역 분할을 조정하는 중에 두만강 너머에 있는 북간도를 감리회 선교부 지역으로 양해해 줄 것을 계속 요청하였다. 그러나 감리회 선교부의 양해 사항을 몰랐던 그리어슨 선교사는 함경북도에 인접한 북간도가 당연히 캐나다장로회 구역으로 분할 된 것으로 이해하고 함경도에서 간도로 이주한 성도들의 요청에 따라 북간도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감리회 선교회에 그 지역에서 철수해 줄 것을 계속 요청하였다. 그럼에도 감리회 선교부가 철수하지 않자 그리어슨 선교사는 북간도 선교를 포기하고 그들의 요구대로 이전해 줄 5개 장로교회 명단을 감리회 선교부에 보냈다.

그런데 엉뚱한 반전이 일어났다. 1909년 6월 29일자로 감리회 선교부가 종전의 자신들의 주장과 다르게 북간도 지역을 캐나다 장로회에 구역으로 인정하고 감리회 선교부를 철수하겠다는 통고해 온 것이다. 그로서 북간도 지역 선교지 분할의 문제는 끝이 났고 북간도는 캐나다장로회의 선교지가 되었다.

캐나다장로회는 인력난에 시달리면서도 북간도를 위하여 적극적인 액션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1909년 가을 그리어슨 선교사는 곧 바로 자신의 조사인 김계안을 용정 상주 전도사로서 파송하여 북간도선교에 전념케 하였다.(8) 또한 그 자신도 1909년 12월에 맥리어드 선교사를 동반하고 용정과 간도에 있는 5개 교회를 순방하였다.

1911년 2월에는 조사 이동휘를 북간도에 보내어 1개월 동안 부흥사경회를 주도하게 하였다. 선교사 로브 (업아력)는 캐나다장로회 해위선교위원회에 “25만 명의 복음을 모르는 한국인들이 있는 한반도의 북쪽 지역은 거주 선교사를 필요로 합니다. 선교부의 지국이 가응한 빨리 그곳에서 열려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해외선교위원회 서부 분과가 한국에서의 활동에 협력할 것을 촉구합니다.”라고 보고하였다.(9)

푸트는 해외선교위원회 서부 분과 의장인 맥케이(R. P. Mckay) 박사에게 “만약 우리가 그 지역에서 선교를 하지 못한다면, 다른 선교부들이 그 지역을 주장하는 우리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에게 다른 선교부들이 말하고 있다” 고 강력하게 한국선교 협력을 촉구하였다.(10) 해외선교위원회 동부 분과의 제안과 현지 선교사들의 절박한 요청을 받아들인 서부 분과는 1909년에 한국 선교활동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고 캐나다장로회 총회의 허락을 받았다.

미주

(미주 1) 윌리엄 스코트,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 78.
(미주 2) 위의 책, 81.
(미주 3) 위의 책, 90.
(미주 4) 차재명,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 64.
(미주 5) 스코트,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 137쪽, 던칸 맥레는 함흥지역을 맡았지만 함흥 사람들이 외국인들에게 지나치게 배타적이어서 1905년에야 함흥에서 거주을 시작함.
(미주 6) 스코트,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 136, 137.
(미주 7) 위의 책, 150, 151, 152쪽 
(미주 8) 차재명,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 390.
(미주 9) 스코트,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 153.
(미주 10) 위의 책, 153.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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