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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명령(민 9:15-23; 행 26:1-23; 요 9:1-11)

기사승인 2021.04.09  15: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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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절둘째주일(4월11일) 임시정부수립일

1.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 못 믿는가?

지난주 말씀을 통해 우리는 부활의 의미를 씨뿌림과 연결해 보았습니다. 곧 부활을 심오한 생명 과정의 순환 속에서 이해하였습니다. 이것은 해마다 봄이 되면, 겨울철 앙상한 가지에 꽃이 피고 파릇파릇한 새잎이 돋는 것을 보며 생명의 신비, 나아가 부활의 새 희망을 느끼는 것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지난주 우리는 이러한 부활 사건을 생명의 사건으로 보고, 구약 시대로부터 복음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종말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다양한 부활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먼저 구약 시대 부활의 모습은 애굽으로부터 압제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생명 사건’이었으며 신약 복음서는 이러한 부활의 생명 사건을 믿는 자가 있고, 반대로 의심하거나 놀라기만 하는 이들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부활 신앙은 선택과 결단의 문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요한계시록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세상 끝날 날에 심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생명과 심판의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부활 신앙을 가진 이들의 모습입니다. 먼저 사도행전 말씀을 통해 우리는 사도 바울의 부활 신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인들을 핍박하였던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아주 구체적인 변화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하는 복음 증거자의 삶입니다. 바울은 베니게 총독과 아그립바 왕 앞에서 담대히 주님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또한 복음서 말씀을 통해 우리는 제대로 보아야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마지막으로 구약의 말씀은 우리가 부활 신앙을 가지고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씀에 순종함, 곧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살아가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먼저 사도행전 말씀부터 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배경을 조금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24장에 보면,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을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다는 이유로 가이사랴 주재의 로마 총독 벨릭스에게 고발합니다(행 24:1). 바울은 차분하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합니다(행 24:10-21). 그러나 벨릭스의 우유부단한 조치로 바울은 가이사랴 감옥에 2년 동안 수감 됩니다. 이후 벨릭스의 후임으로 베스도 총독이 가이사랴에 부임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베스도에게도 바울을 고소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바울은 당당하게 유대인들의 거짓 고소에 반박합니다(행 25:8).

▲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 앞에 선 바울

특히 오늘 사도행전 본문 말씀은 헤롯 왕가의 마지막 왕인 아그립바 왕(헤롯 아그리파 2세)과 그의 누이이자 부인인 버니게(Bernice)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왔을 때의 일입니다(행 25:13).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아그립바 왕에게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왕은 바울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바울을 만난 아그립바 왕은 바울에게 스스로 변론해보라고 합니다. 그 변론의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의 주요 내용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행 26:1-3)

이렇게 서론을 꺼낸 후, 바울은 자신의 일생과 회심 과정, 그리고 전도 활동 등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행 26:4-7)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들에게 고소당하는 이유를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덧붙여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부활에 대한 신앙을 이야기합니다. 물론 그러한 신앙을 가지게 된 계기, 곧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 이유를 먼저 설명합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행 26:8-12)

열심 있는 유대교인인 바울이 예수 믿는 이들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을 만난 신비 체험을 이야기합니다.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 26:13-14)

▲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바울

여기서 ‘가시채를 뒷발질하기(to kick against the pricks)’라는 표현은 그리스 문화권에서는 ‘신께 대항하는 것은 부질없다’라는 의미입니다. 원래 ‘가시채’는 가축을 앞으로 몰기 위해 가축을 찌를 때 사용하는 날카로운 창이나 막대기를 말합니다. 그런데 고집이 센 가축들은 앞으로 가기는커녕 오히려 뒷발로 차는데, 말 그대로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축의 반항은 주인에게 더 고통스러운 자극을 가하도록 자초하는 일입니다. 곧 가축에게 괴로움만 더할 뿐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계속해서 하나님과 맞서 싸운다면 자신에게 고통만 초래할 뿐임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무튼 바울은 이렇게 묻습니다.

▲ 가시채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행 26:15-18)

바울을 일꾼으로 세우신다는 말씀이죠? 이렇게 자신의 신앙 체험을 이야기한 후에 이제 바울은 구체적으로 아그립바 왕에게 자신을 변론합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행 26:19-23)

복음의 핵심이 잘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다음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고 이 십자가와 부활을 이스라엘은 물론 이방인들에게 전하라!”

그러나 결국 아그립바 왕은 바울의 무죄를 인정하지만, 이미 바울이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직접 재판을 요구했기 때문에 바울을 석방할 수 없음을 이야기합니다(행 26:31-32). 아무튼 오늘 사도행전 말씀을 통해 부활 신앙은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 자체가 바울처럼 변하는 것입니다. 박해자에서 복음 전도자로, 율법을 준수하는 열심에서 주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 하는 열심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눈을 떠야 합니다. 눈을 뜨고 예수님을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복음서 말씀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2.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사실 요한복음 9장은 ‘맹인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맹인된 한 사람을 치유하셨기 때문입니다. 평생 빛을 보지 못했던 맹인은 예수님 덕분에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눈을 뜨게 된 맹인은 부모와 바리새인들에게 자기가 체험한 생생한 치료 사건을 증거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보신 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 9:1-2)”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3).”

장애에 대한 놀라운 인식입니다. 날 때부터 보지 못한 사람의 장애는 자기의 죄도, 그의 부모의 죄도 아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장애나 질병이 하나님의 진노나 율법을 어긴 대가, 곧 그 사람의 죄 때문이었다는 유대교의 인식을 뒤바꾸는 것입니다. 곧 오직 하나님께서 장애인을 통해서 하시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이 맹인에게는 예수님을 통해 눈을 뜨고, 예수님을 증거 하는 일로 나타납니다. 곧 예수님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만드신다는 의미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고치시는 예수님과 실로암 연못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요 9:4-7)

여기 중요한 이름이 나오죠? 바로 그 유명한 실로암입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눈을 뜨고 우리는 바울과 같이, 또한 이 맹인과 같이 주님의 부활과 사랑을 증거하도록 보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웃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요 9:8-11)

예수님의 이름이 나오죠? 그렇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가 눈을 뜹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가 승리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가 이전의 삶을 그대로 살도록 권합니다. 패배한 상태에 그냥 머물러 있기를 바랍니다. 죽음의 권세에 짓눌러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부활을 경험한 사람은, 새롭게 눈을 뜬 사람은 예수님에 관해 증언합니다. 예수님을 증언하도록 보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이 맹인이 그렇죠? “예수님 덕분에 보게 되었다.”라고 합니다. 바울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그 생명의 부활을 증거 합니다. 이렇게 부활 신앙은 이렇게 이전의 행동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으로 시작되고, 눈을 뜨고 보냄을 받는 것으로 진행이 됩니다.

3.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세 번째 부활 신앙은 말씀에 대한 순종, 곧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준행하는 삶에서 완성됩니다. 구약의 말씀이 그렇습니다. 오늘 구약 본문 민수기 9장 말씀은 출애굽 한 후 광야에서 두 번째 유월절을 지킨 기록입니다. 첫 번째 유월절은 출애굽 사건 직전에 애굽에 내린 10번째 재앙이 있던 전날 저녁에 지켰습니다. 따라서 광야에서 지킨 두 번째 유월절 준수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재차 확립하는 것입니다. 이후 하나님께서 구름과 불 모양 같은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십니다.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곧 증거의 성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으되,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 밤이면 불 모양이 있었는데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진영에 머물렀고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오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행진하지 아니하였으며”(민 9:15-19)

▲ 불기둥과 구름기둥

물론 구름과 불기둥을 통해 이스라엘이 행진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진을 친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 진정한 부활 신앙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볼까요?

“혹시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적을 때에도 그들이 다만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영에 머물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으며 혹시 구름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있다가 아침에 그 구름이 떠오를 때에는 그들이 행진하였고 구름이 밤낮 있다가 떠오르면 곧 행진하였으며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영에 머물고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행진하였으니,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또 모세를 통하여 이르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민 9:20-23)

여기서 여호와의 직임은 하나님께 드릴 예식을 뜻합니다. 곧 말씀을 따라 진을 치기도 하고 길을 떠나기도 하였으며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야 할 경우가 생기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렸다는 것입니다. 삶의 진퇴와 예식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부활 신앙의 완성입니다.

4. 순전한 기독교

나아가 부활 신앙은 우리를 새로운 사람, 곧 ‘새 사람’으로 만듭니다. C. S. 루이스에 의하면 새 사람은 곧 ‘순전한(mere)’ 사람입니다. 영화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의 원작가로 알려진 루이스는 「타임지」가 선정한 ‘의심할 여지 없이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입니다. 우리 시대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입니다.

20세기 기독교 명저 1위인 『순전한 기독교』 (홍성사, 2001) 마지막 절 ‘새 사람’에서, 루이스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새사람이 된다’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루이스는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 새사람이 될 때, 그 새 사람의 원형은 지금까지 인류가 알고 있던 인간과는 비교가 안 되는 완전한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곧 개선이 아니라, 변형입니다.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음으로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아를 포기할 때 발견할 것이고, 생명을 버릴 때 얻을 것이며, 죽음을 받아들일 때 진정한 생명을 발견할 것이다!”

예를 들어 볼까요? “저는 보통 아기들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어떻게 할까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아마 어둡고 따뜻하고 안전한 자궁 속에 머무는 쪽을 더 좋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기의 생각에는 자궁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일 테니까요. 그러나 그 생각은 틀렸습니다. 자궁에 계속 머물면 아기는 죽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변형된 새 사람의 의미입니다.

중요한 것은 제목에 나오는 ‘순전한’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공통적이고 중심적이라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곧 교단이나 교파, 역사와 시대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수긍할 수밖에 없는 기독교의 공통적인 것, 곧 중심적인 것이 바로 ‘순전한 기독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말씀대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예수님을 만나 진정 새롭게 눈을 뜨고 부활 신앙으로 우리의 전인적인 삶이 부활의 증인으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생명을 발견하시는 순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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