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죽음의 바다를 건넜다

기사승인 2021.04.08  15:31:33

공유
default_news_ad1

- 부활 후(출애굽기 15,19-21; 골로새서 3,1-4)

▲ Edward Burne-Jones, 「The Morning of the Resurrection」 (1898) ⓒWikiArt

부활은 창조 이후 이 땅에서 일어난 가장 경이로운 사건일 것입니다. 세상의 생명은 시간적 한계 안에서만 자기를 유지합니다. 시간의 길이가 각각 다르다고 해도 한계를 넘어가는 것은 없습니다. 예외가 없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데려가셨기 때문에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에녹과 엘리야가 있습니다.

이들과 달리 죽은 자의 ‘부활’도 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살린 사람도 있고 예수께서 살리신 나사로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예수의 부활의 전조라고 할 수 있지만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이 두 종류 사건이 결합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의 부활은 죽음의 사망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이 말로만 그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습니다(사 25,8).

그렇지만 예수의 부활이 누구에게나 진실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습니다. 그 사건과 가까운 시대 사람들 가운데도 믿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는 마지막 때에 있을 부활 사건의 첫 열매이지만, 그 사이 시간인 역사 속에서 부활 사건은 반복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그를 주로 고백할 때 자신들도 경험할 수 있는 사건이 됩니다. 부활이 우리의 미래이기를 빌고 그 미래가 우리의 현재 속에 깊이 들어와 있어 그 미래가 우리의 현재가 되기를 빕니다.

홍해 사건은 부활사건이 아니지만 부활에 비견될 수 있는 사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홍해 바다에서 이집트 군대와 싸운 사건입니다. 우리는 바다가 갈라지고 물이 벽을 이룬 이 사건에서 자연의 조건과 법칙에 구애받지 않는 하나님을 봅니다. 그 하나님의 도움으로 출애굽 이스라엘은 무사히 바다 건너편 광야에 도달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 감격을 노래한 미리암의 시입니다. 말과 말에 탄 자들을 바다에 던지셨다! 그 놀라운 경험을 읊은 시라고 하기에는 너무 짧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감격이 크면 클수록 말은 적어지는 것이 보통이고, 시간이 좀 흐른 다음에야 비로소 그 사건을 반추하며 좀 더 길고 자세하게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자기를 방어할 능력이 없는 무리들에게 기마부대의 추격은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추격을 막고 계시는 동안 이스라엘은 바다를 통과했습니다. 그들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이집트 군대가 어떻게 되는지를 똑바로 볼 수 있었습니다. 바다를 앞에 두고 기마부대 때문에 패닉 상태에 빠졌던 자신들의 모습은 이제 완전히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활동에 놀라고 감탄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직접 부활과 비교할 수는 없으나 그들은 죽음의 위기에서 죽음의 바다를 지나 생명의 땅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의 전환이 곧 부활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것에 만족했고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 후 닥친 광야의 험난한 환경이 또 다른 위협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위기는 그 구원의 경험을 탓하게 만들었고 과거의 노예생활을 동경하게 만들었습니다. 왜 이리 된 것일까요? 위기를 극복하게 했던 하나님은 왜 원망의 대상이 된 것일까요? 아마도 그들은 구원의 결과가 낙원은 아닐지라도 안전과 평안이고 최소한 노예 생활하던 때보다는 더 나은 때를 기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 기대와 달리 엄혹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과거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고 경우에 따라서는 더 나빠졌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기념합니다. 그리스도 사건에서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후의 우리는 어떠한지요? 구원과 부활은 우리가 경험한 새로운 현실로서 오늘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요?

골로새서 기자는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면, 위에 있는 것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촉구합니다. 그의 편지를 읽는 독자들의 생활상을 이 말에서 역으로 추론해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고 이야기하지만,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처럼 자신들의 현실에 매몰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없습니다.

그러나 그 현실을 다르게 맞이할 수는 있습니다. 삶의 목표가 바뀌면 그럴 것입니다. 기자가 위에 있는 것을 찾으라고 하는 말도 이렇게 이해됩니다. 이것이 땅에 있는 것을 무시하라거나 무시해도 좋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개입과 역사를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었다면, 그들은 현실적 위기 앞에서 다르게 행동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위기 앞에서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위기는 땅에 있는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땅에 있는 것만 바라보았을 때 그들은 두려웠고 불안해했고 절망했습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주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필요를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이라고 하셨던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우리가 땅을 떠난 듯 땅에 있는 것을 무시하고 살 수는 없지만, 그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고 우리의 최대 관심사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저항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려는 땅의 것들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 그의 부활에서 우리의 부활을 봅니다. 부활을 보는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부활의 소망이 우리의 생활 구석구석에까지 이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땅에 있는 것들에 대한 염려와 욕구에 가려 그 소망이 우리 안에서 소멸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까?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의 역사이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이 부활의 소망으로 우리의 삶이 새로워지기를 빕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 이 땅에 생명의 빛을 던지는 삶이 우리의 삶이 되기를 빕니다. 욕망을 자극하며 사람을 욕망의 노예로 만들어가는 이 사회에서 부활의 기쁨으로 욕망을 통제하는 새사람으로 살게 되기를 빕니다. 이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 참된 앎에 이르는 새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부활의 기쁨과 소망이 온 땅에 두루 퍼져 권력에 의한 폭력이 멈추고 생명과 평화로 열매 맺는 부활절이 되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