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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귀찮게 하니, ‘권리’를 찾아 주어야 하겠다

기사승인 2021.04.05  16:4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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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의한 재판관과 문을 두드리는 여인(누가복음 18:1-8)

▲ 작자 미상,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 (1900) ⓒWikipedia

비유의 내용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재판관에게 한 과부가 나타나서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그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그녀의 요청을 외면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재판관에게 다가와서 요청을 합니다. 결국 불의한 재판관은 여인의 끈질김에 몰려서 마침내 그녀의 요청을 들어주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비유의 요약된 내용입니다.

먼저 본 비유가 누가복음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비유가 선포되었던 상황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비유의 위치와 상황

본 비유는 누가복음 17장 20절에 기록되어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질문,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과 연결선 상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하나님나라의 옴, 다시 말하면 종말론적인 질문에 대하여 종말과 연결되어 나타나게 될 현상에 대하여 설명합니다.(누가 17:21-35)

그 후에 오늘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종말의 때와 과부의 요청에 대한 가르침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의 비유의 가르침은 종말론적인 삶의 태도와 연결되어 지고 있음을 볼 수 있게 됩니다.

특별히 오늘의 비유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을 통하여 비유의 가르침이 종말론적인 삶과 관련이 있음을 강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종말론적인 상황을 넘어서서 본 비유는 제자들이 당면하고 있었던 당시의 현실적인 삶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을 비롯한 당시의 종교 기득권자들에 의하여 늘 박해를 받고 무시당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으로 상징되는 종교기득권자들은 예수와 또 그의 제자들의 소리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척박한 현실 속에서 실망과 낙심에 빠지기 쉬운 제자들은 오늘의 비유를 통하여 격려와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실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면서 꾸준히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야함에 대한 격려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본 비유는 종말론적인 의미와 현실적인 의미의 양 측면을 가지고 있는 비유하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본 비유의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자. 그리고 그것을 오늘의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살펴봅시다.

비유의 의미와 해석: 강청기도를 독려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본 비유가 강청기도와는 상관없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밤중에 찾아온 친구 비유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본 비유의 내용의 핵심은 기도의 내용이야 어찌되었든지 무조건적으로 끈기를 가지고 기도하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에 있어서 끈기와 인내를 갖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리고 그것이 필수적인 태도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강청이 되고 집착이 되어 버린다면 올바른 기도생활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 생활에 있어서 끈기와 인내를 강청과 집착에서 분리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오고 말 것이다

본 비유의 가르침의 중심은 종말의 도래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오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이 하나님나라의 옴을 방해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하나님 나라의 옴에 대한 갈망에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나라의 옴은 그리 반가운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삶이 만족하고 너무나 좋은데 그것을 뒤집어 놓는 하나님 나라의 옴이라는 것이 어찌 반가울 수 있겠습니까?

예수가 줄곧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 중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변화”입니다. 다시 말하면 “뒤집어 짐”입니다. 처음 된 사람이 나중 되고 나중 된 사람이 처음이 되는 변화와 뒤집어짐입니다. 그런 하나님 나라의 옴을 반가워 할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뒤바뀜의 나라, 하나님 나라의 옴을 은연중에 두려워하고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질문에는 하나님 나라의 옴에 대한 회의와 반갑지 않음이 보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불의한 재판관 같은 사람들이 하나님나라의 옴에 대하여 방해하고 왜곡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나라는 온갖 훼방과 박해를 넘어서서 우리에게 오고 말 것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는 오늘의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오심의 당위성뿐만 아니라 이를 위한 믿는 이들의 꾸준한 확신(끈기)과 노력(문 두드림)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과부는 자신의 요청에 대한 재판관의 무관심 혹은 무시를 넘어서서 실망하지 않고 꾸준히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마침내 재판관은 그녀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나라의 옴을 기대하며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주위의 열악한 환경에 함몰되지 말고 꾸준히 하나님나라의 이루어짐에 대한 희망을 살려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꾸준한 노력과 확신과 믿음으로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너무 빨리 세상의 시류와 타협하지 말고 꾸준히 문을 두드리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입니다.

누가 문을 두드리는 과부인가?

오늘의 비유는 또 다른 측면에서 우리의 현재의 삶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지금도 우리의 문을 두드리는 과부들이 누구인가를 보게 만듭니다. 과부는 그 가슴에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억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녀로 하여금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억울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해결되지 않고서 그녀가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과부는 많습니다. 구조적인 문제 속에서 도저히 활개를 피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웃들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인간들의 끝없는 욕망 속에서 파괴되어 가고 있는 우리의 자연환경, 휴가에서 막 돌아와 제대를 얼마 앞두고 전사한 젊은 군인, 해병대에 자원 입대한지 3개월여 만에 전사한 군인, 열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 죽어가는 노동자들, 성소수자들, 사회의 차가운 시선과 소외에 몸살을 앓고 있는 장애인들, 치열한 학벌 경쟁과 잘못된 교육제도 속에서 신음하며 수 백 개의 직장에 지원해 놓고 마음 조리며 취업을 기다리는 우리의 청년 아들딸들, 한창 재잘거리며 꿈을 키워 가야 할 좋은 학창 시절을 학원과 학교를 오고가면서 노쇠해 져가는 우리의 청소년 아들딸들, 양 부모가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형편 속에서 혼자 자라나는 우리의 어린 아들딸들, 명퇴의 위기 앞에서 언제 직장을 그만 두어야 할지 고민하는 우리의 중년들, 대형 기업의 사업 참여로 하릴없이 무너져 가는 자신의 기업을 무기력하게 바라보아야만 하는 자영업자와 중소기업가들, 생산능력의 쇠퇴로 말미암아 이 사회에서 버려지고 있는 수많은 노인들, 종로 3가의 지하철역 앞에 모여 있는 수많은 노인들, 인종차별 속에서 차가운 눈길을 감당하며 서글프게 살아가는 이주노동자들과 그의 가족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발견되는 “문을 두드리는 과부들”의 명단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비유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주위에 있는 “문 두드리는 과부들”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만듭니다. 각자의 삶의 위치와 현장에서 억울한 사정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면서 문을 두드리는 “과부”를 발견하고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사회가 되라고 하는 것이 오늘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가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가르침일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관

불의한 재판관은 누구입니까? 오늘의 비유는 재판관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두 번째는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다. 재판관의 두 가지 특징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연관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음은 사람을 무시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또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이웃 사랑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이 또 다른 형태로 표현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오늘의 비유는 더 나아가서 재판관의 구체적인 행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과부의 하소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불의한 재한관은 누구입니까?

억울함을 토로하는 과부의 목소리에 관심과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귀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소리, 입시에 시달리는 우리 아들딸들의 소리, 파괴되는 환경의 울부짖는 소리, 이주 노동자들의 한 맺힌 외침이 들려올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들의 귀에 이러한 소리가 들려오지 않고 있다면 어쩌면 우리들은 불의한 재판관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직 우리들의 귀에 “경제개발 소득증대, 일등주의, 승리, 성공, 도덕이 밥 먹여 주는가? 효율성만 좋다면, 남이야 어찌된 나와 내 자식만은.”과 같은 소리만 들려오고 있다면 우리는 불의한 재판관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의 비유는 우리 안에 있는 이러한 불의한 재판관의 모습을 발견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는 불의한 재판관의 모습을 벗어나야 한다고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불의한 재판관을 모습을 벗어나는 것이야 말로 예수에 의한 구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불의한 재판관으로 하여금 듣게 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오늘의 비유는 사람을 무시하고 사람의 소리에 귀를 막고 듣지 않는 재판관이 사람의 소리를 듣고 행동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 비유는 그 이유를 한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과부가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고 그의 목소리를 내었기 때문입니다.(3절)

과부의 끈질긴 요구에 의해 마침내 재판관은 행동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는 과부의 목소리를 오랫동안 무시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계속되자 재판관은 그녀의 목소리이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마침내 그녀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고 결심합니다.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일까요?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래서 사람을 무시함으로서 사람의 목소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던 재판관이 갑자기 오늘 과부의 소리를 듣고 그녀의 억울함을 해결해 주고 있을까요? 재판관에게 회개 혹은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재판관에게 회개 혹은 삶의 가치관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다만 과부의 끈질김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것뿐입니다. 그는 생각합니다.

“이 과부가 나를 이렇게 귀찮게 하니, 그의 권리를 찾아 주어야 하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자꾸만 찾아와서 나를 못 견디게 할 것이다.”(5절)

오늘의 비유는 재판관의 회개나 변화에 대하여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불의한 재판관이 과부의 끈질김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소리를 들어주어야만 하는 상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비유는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의한 재판관이 회개하고 변화되기를 기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일은 하나님에게 속한 일입니다. 사람의 변화를 기다리지 말고 꾸준하게 하나님 나라의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변화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정의의 목소리, 평화의 목소리, 생명의 목소리, 진리의 목소리를 계속해서 내야 합니다. 우리의 꾸준한 목소리 내기로 인하여 결국 불의한 재판관은 귀를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당장 변화가 없다고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무 빨리, “세상은 그렇게 사는 것이야”라고 하면서 시류에 편승하지 말아야 합니다. 꾸준히 하나님나라를 향한 우리의 발걸음을 옮기고 목소리를 내게 될 때 언젠가는 우리의 끈질김 앞에 이 세상도 하나님 나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비유는 우리로 하여금 강청기도나 강박관념 혹은 집착에서 벗어나서 진정으로 우리가 끈질기게 매달려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끈질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옴에 대하여 희망을 갖게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희망들이 쌓여서 반드시 하나님 나라는 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주시지 않으시고, 모른 체하고 오래 그들을 내버려 두시겠느냐?”(7절)

문제는 그러한 믿음이 우리에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오늘의 비유를 마치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되묻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8절)  우리에게 믿음이 있습니까?

홍인식 목사(더처지)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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