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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맥(僊脈)우주와 선맥(仙脈)우주

기사승인 2021.03.16  16:5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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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의 사주팔자인 죽음에 대한 저항 담론

성경은 통합우주와 분절우주의 세계가 중첩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한밝우주역사관은 영원한 우주역사와 유한한 지구역사에서 물질, 생명, 신성이 상호의존적으로 창조적 진화를 하는 우주적 무대를 바탕으로 삼는다. 영원한 우주역사는 하늘과 땅과 인간이 조화롭게 공생하고 공명하는 통합우주를 지향한다. 통합우주의 원형을 역사시대 이래로 은장(隱藏)하고 체화(體化)하고 있는 민족은 고대의 동이족이자 현대의 한국인이 두드러진다.(1)

최근 도올 김용옥은 『노자가 옳았다』(2020)라는 책에서 『도덕경』이 중국사상계에서 제대로 이해되지 않고 배척당하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노자는 고조선의 사상가이다. (중략) 『노자』를 읽다 보면 이 노자가 정말 우리 조선인의 가슴과 조선인의 삶과 조선인의 우주에 편재해 있는 것이다”라고 직관적인 통찰력으로 대중에게 선언한다. 또한 성균관대 유학대학원장을 지낸 이기동은 제자 정창건과 공저한 『환단고기의 철학과 사상』(2019)의 머리말에서 한국 고유사상에 대한 그간의 편견을 ’참회(?)하며 한민족의 고유 철학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

▲ 도올 김용옥, 『노자가 옳았다』의 표지와, 이기동·정창건, 『환단고기의 철학과 사상』의 표지

변찬린은 “노자도 무명의 보배로움을 잠시 잊으시고 오천 마디의 흔적을 남겼다.”라고 하면서 옛날 성인들이 문자 경전을 남기지 않는 차원을 깨달아 언급하고 있다. 특히 선가(仙家)에서는 ‘천기누설’을 말하며 문자기록을 남기지 않는 전통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장생불사라는 도교문화의 첫머리를 차지하는 『도덕경』 자체가 이미 ‘대도(大道)’와 ‘상도(常道)’인 ‘선(僊)’이 은폐된 후 이를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한 종교문헌이다. 즉 노자는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知者不言) ‘말하는 자는 모른다(言者不知)”는 경구를 써가면서까지도 자신의 깨달음을 문자경전을 통해 ‘대도와 상도’를 언술하고 있다는 점은 주의해야 한다.

성경은 언제나 당대인과 소통하는 사회적 언어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런데 성경 자체가 통합우주의 차원이 분절적 인간에 의해 분절 우주의 언어로 서술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분절우주에 태어난 분절적 인간이 통합우주를 찾아가는 텍스트이기 때문이기에 두 개의 우주관이 교차하여 서술되어 있다는 점을 참작하여 해석되어야 한다. 이로 인해 성경해석에는 문자해석의 전통과 선문답, 성령감동 등 비문자해석의 전통이 공존하고 있다.

인류의 사주팔자는 죽음인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절대우주와 상대우주, 천상우주와 지상우주, 본체계와 현상계, 열반우주와 윤회우주가 중첩된 이원화된 세계로 분리하여 사유한다. 이런 사유의 틀은 우주의 상대적 인식뿐만 아니라 인간관에서 사유의 연장을 초래한다. 인간을 형성하는 생체인자, 즉 영과 육과 혼, 정과 기와 신, 색·수·상·행·식의 오온 등의 결합은 삶이며, 생체인자의 분리와 해체는 죽음이다. 죽음 이후에는 생체인자의 특정 부분이 분리 혹은 생체잔여물(예, 기, 영혼 등)이 과거의 생체인자를 담지하여 계승한다는 이원론적 사유가 종교적 패러다임의 기본 틀을 형성하고 있다.(2)

이런 죽음 인식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성서에서는 야훼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으면 죽는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만일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 먹지 않았다면 어떤 성서의 세계가 전개되었을까? 무명에서 시작하여 죽음으로 끝나는 불교의 연기관은 윤회의 순환고리이지만, 고제(苦諦)·집제(集諦)·멸제(滅諦)·도제(道諦)의 사성제(四聖諦),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 등의 팔정도(八正道),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 등의 육바라밀을 실천하여 해탈한 차원, 본래면목을 회복한 열반세계는 어떻게 전개될까? 선가의 문헌인 『도덕경』에서 도(道)와 가도(可道)의 분쟁세계가 아닌 ‘상도(常道)’와 ‘대도(大道)’의 세계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통합적 세계관에서 통합적 인간이 바라보는 생사관과 분절적 세계관에 사는 분절적 인간이 바라보는 생사관의 해석학적 거리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통합적 인간은  인식대상과 생활세계를 포용적으로 바라보면서 삶과 죽음을 초극하는 ‘영생’의 차원을 추구하지만, 분열적 인간은 배타적이고 이원론적인 사유체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삶과 죽음을 별개의 사건 혹은 연장선의 사건 혹은 기억의 사건으로 인식하는 피안세계관에 경도된다.

인간의 한계적 상황인 죽음의 종교적 기제는 종교연구의 핵심이지만, 사유의 한계 등 여러 가지 제약요인으로 인해 담론의 중심을 형성하지 못했지만 지금부터라도 본격적인 학제간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한림대학교 생사학 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케네스 폴 크레이머의 『죽음의 성스러운 기술 - 세계 종교는 어떻게 죽음을 이해하는가』, 김경재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영생 - 기독교 생사관 깊이 읽기』, 등의 생사학 총서, 생명교육총서, 타나토스총서, 생사학연구총서 등이 있다. 특히 2005년 발족한 한국 죽음학회를 결성한 최준식에 의해 삶과 죽음의 종교 고전인 『티벳 사자의 서』를 빗대어 『한국 사자의 서』을 포함한 종교영성탐구 시리즈는 죽음학에 관련된 세계 동향까지 소개하고 있다. 또한 한국인의 종교문화에 나타난 『한국인의 생사관』(2008)과 『죽음이란 무엇인가』(2009)도 참고할 만하다.

▲ 삶과 죽음에 대한 참고도서

구도자에게 성경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본래 모습인 ‘영생’을 찾아가는 구도의 문서이며, 이상세계를 실현해 나가는 종교적 방법론이 적혀있는 설계도이다. 종교에서 말하는 ’영생(Eternal Life)’은 무엇일까? 해탈의 경지는 어떤 차원을 말하는 것일까? 선가에서 말하는 ‘우화등선’과 바울이 말한 ‘신령한 몸’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은 종교적 사유의 근본 물음이지만 그동안 ‘신비’와 ‘신화’와 ‘이단’의 영역에 가두어 두고 치열하게 묻지 않았다. 이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궁극적 가치를 포기한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인간 사유의 종말인 죽음에 관해 묻고 대답하여야 한다. 인간 자체를 진리실험의 도구로 삼아야 한다.

인류의 사주팔자는 죽음이다. 삶이라는 인간의 시작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마지막에 대해 제도종교마다 표현은 다를지언정 ‘영생’이라는 종교적 기제를 제시한다. 죽음은 인간이 극복해야 할 생명현상이지 순응해야 할 운명이 아니다. 인간이 죽으면 시체를 무덤에 남기고 영혼만이 구원받는다는 ‘영혼불멸설’과 기억의 공동체에서 전승된다는 유교식 영생, 시체를 화장(火葬)하고 조장(鳥葬)하는 불교식 죽음처리법, 육신의 장생불사를 추구한 원시 도교의 생사관 등은 망각된 영생의 기억을 더듬는 피안감성에 의한 죽음이해에 불과하다.

이런 상대적인 죽음이해에 대해 변찬린은 영생의 존재인 인간이 선악과 열매를 먹거나, 무명상태에 빠지는 등 특정한 사건으로 인해 발생하는 비 본래적인 생명현상을 죽음이라고 이해한다. 즉 동물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은 다른 차원의 생명이해라는 것이다. 그의 구도의 시작은 ‘죽음에의 극복’이며, 구도의 마지막은 ‘영생의 통로’를 발견한 것이다. 이때의 심정을 “아! 촉루(髑髏)를 갈아 마셔본 자 아니고 어찌 이 도(道)를 깨닫겠는가. 괴괴한 구약의 밤, 썩은 시신(屍身)을 안고 통곡해본 자 아니고 어찌 산 자의 하나님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산 자의 하나님을 만나는 종교적 언어가 바로 ‘선(僊)’이다. 관점에 따라 다양한 종교적 표현이 가능하겠지만 ‘한밝 사상’에서 ’선(僊)‘이라는 종교적 언어는 대단히 중요하다. “성경은 선(僊)의 문서이다.”라는 도맥을 바탕으로 성서해석을 하고, 한국의 종교적 상징어인 “선(僊)=풍류”라는 관점에서 동서의 영생사상을 「선고[僊(仙)攷]」에서 회통시켰음을 독자들은 기억할 것이다. “풍류=선(僊)”, “선(僊)=장생불사(長生不死), 천의무봉(天衣無縫), 환골탈태(換骨奪胎), 우화등천(羽化登天)하는 변화의 도맥’, “선(仙) = 생로병사, 묘지인봉(墓地印封), 시해선(屍解仙)”하는 부활의 도맥이라고 한다. 성서의 변화와 부활사상과 동이족의 생명관을 ‘僊(仙)’이라는 종교적 언어로 ‘맥락’적으로 회통하고 재맥락화하여 현대적 언어로 보편화시켰다. 더 나아가 그는 존재의 탈바꿈을 의미하는 “풍류체”라는 존재론, 학제적인 회통적 사유체계인 “풍류심”이라는 인식론, 자유자재한 (몸+맘)살림을 말하는 ‘풍류객’이라는 실천론으로 확장하며 새 문명의 사유체계를 설계한다.

그럼 선(僊)이란 무엇이고 선(仙)이란 무엇인가? 왜 변찬린은 선(僊)과 선(仙)을 엄격하게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을까? 선(僊)은 십삼경, 『도덕경』에 출전을 두지 않고 전국시대인 『장자』, 「재유제11(在宥第十一)」에 비로소 ‘僊’이 보인다. ‘선(僊)’은 갑골문에도 없고, 『설문해자(說文解字)』 에 “비양승고(飛揚升高: 높은 곳에 오르는 것)라고 주석한다. 선(仙)자는 《석명(釋名)》 <석장유(釋長幼)>에 <늙어도 죽지 않는 것을 선(仙)이라 한다. 선(仙)은 천(遷)이며, 산으로 옮겨 들어간다>라고 한다. 속세를 떠나 산속에 살며 수행을 쌓고 승천한 사람을 신선이라 생각하였다. 자형의 형성을 보더라도 복잡한 형태에서 단순한 형태로 바뀌는 것이 일반적이듯이, 선(僊)이 앞선 글자이고 선(仙)은 후대에 형성된다. 변찬린은 이렇게 말한다.

선(僊)의 도비가 그 맥이 끊어진 후 선(仙)으로 나타난 듯하다.
선(仙)은 산(山)사람이란 뜻이지만 선(僊)은 천거된 사람이란 뜻이 있기 때문이다. 산(山)사람 선(仙)과 천거(遷去)된 사람 선(僊)은 동의어인 듯하나 차이가 있다. 〈천거(遷去)된 사람〉이란 자리를 옮긴 사람이다. 죽어서 자리를 옮긴 것이 아니라 살아서 자리를 옮겨 신선된 사람을 선(僊)이라 한다. 이승에서 〈새이승〉으로 삼차원세계에서 사차원세계로 자리를 옮긴 사람을 선(僊)이라 한다. 또 선(僊)의 본의는 〈비양승고(飛揚昇高〉로서 하늘로 올라가는 사람이란 듯이다. 이 비양승고는 죽어서 그 영혼이 귀천(歸天)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승천(昇天)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 변찬린, 「僊(仙)攷」, 『甑山思想硏究』 5輯, 1979, 189.

변찬린의 언어맥락에 의하면 선(僊)은 현존하는 인간이 죽지 않고 우화등선하는 변화의 신체변형을 지칭하는 종교적 언어이고, 선(仙)은 선(僊)의 길을 망각한 후 인간이 한 번 죽음을 경험한 후 살아나는 시해선(屍解仙)적 신체변형을 지칭하는 종교적 언어이다.

선(僊)과 선(仙)은 신선(神僊), 신선(神仙) 등으로 병용되다가 현재는 대부분 후자의 용어를 사용한다. 선가의 이상적 인간을 말한다. 선(僊)과 선(仙)은 한국 종교사에서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해석을 기다리는 종교적 언어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죽지 않고 살아서 가는 선맥(僊脈)우주와 인간이 죽은 후 다시 살아서 승천하는 선맥仙脈우주는 어떤 세계일까?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생사관을 중심으로 추론해 보기로 하자.

타락과 무명이 없는 선맥僊脈우주

선맥(僊脈)우주는 상대적 가치와 개념의 언어구조로 표현할 수 없는 문자 이전의 통합우주이다. 성서적으로 말하면 인류 시초가 타락하지 않는 세계이며, 불가적으로 말하면 인간이 차별지와 분별지인 무명에 빠지지 않은 시공이며, 노자가 말한 인의의 유위(有爲)세계가 아닌 대도(大道)의 세계이며, 희노애락의 세계가 아닌 중도의 세계이다.

선맥(僊脈)우주는 유교와 불교, 도교 등 종파종교가 생기지 않는 우주로서 대도무문(大道無門), 선서무문 선어무사(仙書無文,仙語無詞), 불립문자의 선(禪)전통, 이심전심하는 소통세계이다. 선맥(仙脈)우주에서는 구도자로서 십계명, 산상수훈, 팔조목, 팔정도, 삼륜오강, 노자의 삼보 등의 종교의례를 고난을 통해 수행하지만, 선맥(僊脈)우주에서는 구도의 문서인 성경이 제시하는 종교적 황금률을 이미 체득하고 발현한 참 인간이 사는 우주로서 자발적, 자율적, 자체적으로 일상생활이 곧 신앙생활인 삶을 산다. 따라서 인간 자체가 천명을 깨닫고 통합우주에 시간적으로 자유롭게 장소적으로 자재하기에 문자경전은 필요조차 없다. 초종교와 초과학의 세계이다.

생사관이라는 측면에서 선맥(僊脈)우주에 사는 인간은 영생의 존재로서 장생불사(長生不死)의 도리를 깨우치고, 환골탈태(換骨奪胎)라는 존재변형을 통해 호지 않는 하늘 옷인 천의무봉(天衣無縫)을 입고 시체를 남기지 않고 승천하는 우회등선(羽化登仙)의 궤적을 그리는 풍류의 세계에 산다. 본래의 대도인 선(僊)을 변찬린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도(大道)는 본래적인 도(道)이며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무명에 오염되기 전에 나타난 도이다. 이 대도를 타락과 무명으로 상실했으므로 한 단계 낮은 차원에서 나타난 종교가 유·불·선이었던 것이다. 불교도 유교도 도교도 대도의 자리에서 보면 인위적인 유위(有爲)의 도인 것이다.
그럼 본래적인 대도의 본질은 무엇인가?
대도는 우리에게 장생불사를 약속하고 있다. 대도는 곧 선[僊(仙)]인 것이다. 그러나 믿고 있는 종교는 장생불사를 약속하고 있지 않다. 죽으면 영혼이 천당, 극락간다고 약속하고 있을 뿐이다. 본래 대도는 장생불사, 환골탈태(換骨奪胎), 천의무봉(天衣無縫), 우화등선(羽化登仙)의 종교이므로 사후의 죽어서 천당 극락을 약속하는 종교하고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중략) 그런데 동양에서 발생한 여러 고등종교를 분석해 보면 장생불사, 환골탈태, 천의무봉, 우화등선의 비의를 알고 있는 백성은 동이족뿐이었다.
- 변찬린, 「僊(仙)攷」, 『甑山思想硏究』 5輯, 1979, 185-187.

선맥(僊/仙脈)의 종주국인 한국은 천손의 후예로서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환웅신화와 단군신화에 펼쳐놓고 최치원은 『난랑비서』에서 삼교의 도리를 포함하고도 남는 포함(包含)삼교, 천지인 등 만물을 살리는 접화군생(接化群生)의 도맥이 한민족의 기층종교의 맥으로 전승됨을 밝히고 있다. 이는 근대 신종교 창교자에 의해 지축의 변화, 초종교, 초과학을 동반한 개벽세계, 유리(琉璃)세계, 용화세계 등으로 묘사한다. 특히, 신선과 같은 완전한 인간이 사는 유토피아의 종교적 기억을 한국인이 세계 문명에서 되살려내고 있다. 한마디로 선맥(僊脈)우주는 성경해석에서 ‘신비’와 ‘불가능의 영역’으로 치부된 이상향이 생활세계에서 구현되어 통합적 인간이 진정한 만물의 영장로서 사는 통합우주이다.

타락과 무명이 있는 선맥(仙脈)우주

선맥(仙脈)우주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공우주이다. 이 우주는 인류 시초가 타락하여 전개되는 피안우주이자, 중생우주이며, 인의(仁義)의 분절 우주이다. 이 우주는 문자경전에 의하면 인간이 스스로 ‘불사의 존재’임을 망각하고 죽음을 숙명으로 생각하고 살아간다. 피안감성과 피안의식에 사로잡혀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관점에서 경전을 보고 죽은 다음에는 영혼이 하늘나라 간다는 피안신앙이 바른 생사관인 줄 아는 우주이다. 종교마다 정교하게 발달된 죽음의례가 이를 방증하고 있다.

인간은 살아서 새로운 차원의 영생을 향유할 수 있는 가능태로서 인식하지 않고,’인간은 죽어서 천당이나 극락에 간다’는 피안종교가 득세한다. 특히 구원(제)의 말만 풍성하고 생로병사의 윤회에서 헤매는 죽음의식에 사로잡혀 궁극적 인간의 가치를 포기한 분절적 인간이 사는 세계이다. 변찬린은 이런 생사관에 의구심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모든 고등종교가 죽음에서 해방되는 영생의 차원을 약속하고 있지만 우리들은 여전히 죽어가고 있는 존재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육신은 죽어 묘혈(墓穴)속에 인봉되고 마음과 정신과 영혼만이 자유로히 하늘나라에 가고 열반에 들고 무하유향(無何有鄕)에 소요한다면 이것이 참 영생하는 경지일까?
인간은 영육이 쌍전(雙全)할 때 온전한 존재이므로 영생의 차원도 영육이 쌍전(雙全)하여 비상해야 한다. 이날까지 우리들은 인간이 죽으면 육신은 무덤에 묻히고 영혼만 하늘나라에 간다는 소식을 당연한 진리처럼 받아들였다.
- 변찬린, 「僊(仙)攷」, 『甑山思想硏究』 5輯, 1979, 183-184.

이로 인해 그리스도교, 불교 등 종파종교는 ’영생의 진리‘는 피안신앙으로 회칠하고 ‘동물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을 동일한 차원에서 이해하는 생물학적 편견과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라는 피안적 감성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피안세계관에 물든 분절적 인간을 양산한다.

분절적 인간이 읽는 성경의 태도 자체가 배타적이고 이원론적이고 자기기만의 경향을 보인다. 자신이 선택한 종교적 세계관에서 역사적 예수와 석가모니 등 창교자의 실천적 모습을 재현하면 구원(제)을 받는다는 희망의 종교적 선언이 성경에 적혀있지만, 동시에 이를 재현하지 않거나 못하는 삶을 살면 제도종교가 보장한다는 구원(제)마저도 없다는 종교적 진술 또한 성경에 적혀있다. 선맥(仙脈)우주에서는 타락과 무명에 빠진 세계로 믿음과 깨달음과 실천이 선맥(僊脈)우주와 달리 통합되기 어려운 분절적 세계이기에 성경은 ‘고난과 고통, 묵상과 기도’ 등 용맹정진 하는 구도자의 자세로 경전을 읽고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다. 종파종교에서 지행일치, 신행일치, 각행일치 등을 강조하는 이유도 분절적 세계의 신앙은 ‘믿음과 실천’, ‘깨달음과 실천’이 분리되는 관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심을 놓치면 십년공부’가 헛수고에 그치고. ‘늘 깨어 기도하라’는 종교적 경구가 분절적 인간에게 주어진다.

선맥(仙脈)우주에서 석가모니는 피골이 상접한 고행과 동족의 고통을 지켜보는 괴로움의 바다에서 깨달음을 추구하고, 예수는 동족의 질시와 외면 속에 급기야 동족인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 십자가의 고난을 받았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러나 만약 타락과 무명이 없는 선맥(僊脈)우주에 석가모니와 예수가 태어났다고 생각해 보자. 그들의 구도의 행보는 고해(苦海)와 가시밭길의 고통을 수반하는 고난과 고행과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고난과 고해(苦海)의 텃밭에 세워진 그리스도교와 불교를 신앙하는 종파 종교인들은 창교자의 길을 뒤따르기보다는 오히려 세속과 타협하며 믿음의 은총과 깨달음의 구제를 종교 선전하면서 세속적 탐욕의 과실을 넘보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앙의 깊이와 깨달음의 진실은 눈에 보이는 사회적 지표인 명예, 권력, 자본 등 세속적 좌표로 측정할 수 있다. 종교체험의 정도가 높으면 세속적 좌표는 높은 위치가 아니고 예수와 석가모니와 같이 그에 상응하는 종교적 황금률을 실천하는 낮은 자리에 있기 마련이다. 명예, 권력, 자본으로부터의 무소유는 선맥(仙脈)우주에서 구도의 출발이기 때문이다.

선맥(僊脈) 우주는 무소유의 덕목을 체현한 인간이 사는 우주이기에 진리가 발현되는 평화와 상생의 통합우주이고, 선맥(仙脈)우주는 탐진치의 고해(苦海)와 마귀가 권세를 잡은 상극의 세계이므로 절정의 종교체험을 위해 고통과 고난 속에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 분절우주라는 차이가 있다. 차별세계인 선맥(仙脈)우주에서 인간으로 태어난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가 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 것이고(요 15:14), 침개상투(針芥相投) 맹귀우목(盲龜遇木)이라는   귀한 인연이다. 분절적 인간은 ‘타락과 무명’의 피안의식에서 초탈하여 인간생명의 본연의 모습을 회복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주적 권위를 회복하여야 한다.

선맥(僊脈/仙脈)은 한국의 종교적 원형이자 한국인의 종교유전자

우리는 지구촌의 사유가 합류하는 지점에서 인간생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패러다임을 가져야 한다. 축 시대에 개별 문명권에 형성된 다양한 문화와 시대적 맥락에 따라 축적된 인간의식의 지층을 통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포월적 준거를 확보하여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영생‘이라는 키워드는 인류의 한계상황을 융합하고 돌파하는데 어찌 보면 가장 유효한 종교적 기제일 수 있다. 실추된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재등장하여 분절우주를 통합우주로 만들 수 있는 잃어버린 기억이다. 선맥(僊/仙脈)이라는 영생의 기억은 수메르문명, 메소포타미아문명, 황하문명, 인도문명, 요하문명 등 신화적 사건과 역사적 사건으로 중첩된 유물과 성경과 인간의 문화적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배타적이고 이원론적인 사유체계를 벗어나 인식대상과 생활세계를 포용적으로 바라보는 풍류의 심성을 회복하여야 한다. 사유의 한계는 행동의 한계이며, 행동의 한계는 인간의 한계이다. 한계적 사유의 원초적 분열의식을 벗어버리고 김범부가 말한 오증론(五證論) 가운데 하나인 행증(行證)을 통하여 성경의 말이 학문분석의 대상만이 아닌 인간의 몸을 진리실험의 도구로 삼아 소우주인 인간과 대우주인 통합우주가 공생하는 관계임을 입증하여야 한다. 그 첫 걸음은 선맥(仙脈)우주에 사는 현 인류는 성경의 본질이 아닌 교파와 교학과 도학과 유학에 의해 형성된 피안세계관의 외피를 벗겨내고 종교적 황금률을 실천하면 영생할 수 있다는 굳센 믿음을 바탕삼아 궁리하고 실천하여 깨달음의 종교체험을 통하여 만물의 영장으로서 재탄생하여야 한다.

변찬린은 다양한 종교경전에서 영생의 방법론을 연구한 시론적 논문인 “僊(仙)攷”에서 “선(僊)에 대한 문헌이나 사료가 전무한 상태이므로 주관적인 직관이나 자각에 의하여 논술할 수 밖에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종교적인 진리는 한 개체가 뛰어난 직관력과 자각이 전체 곧 세계심전의 광명이 되는 법이다. 선(僊)의 길은 인간 앞에 개명된 본래의 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변찬린이 선맥(僊[仙]脈)을 과연 성서해석에 어떻게 적용했는지는 다음 회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미주

(미주 1) 그동안 연재한 선(僊)과 풍류에 관련되는 「선(僊)이란 무엇인가?」(2020, 02.18), 「선맥(僊脈) 르네상스 : 빛은 동방으로부터」(2020. 09.01), 「풍류담론을 넘어 풍류선맥(僊/仙脈)정통론으로i」(2020.09.15.)를 참고하기 바란다.
(미주 2) 물론 여기에는 무아사상을 주장하는 불교적 인간관에서 ‘윤회의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난제가 있다.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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