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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육과 울부짖음뿐이었다

기사승인 2021.03.02  21:5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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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일구는 아름다운 포도원(이사야 5:1~7)

명문은 언제든 반복해 읽어도 마음에 울림을 줍니다. 명문이 되는 조건은, 언어적 기교로 그저 미사여구를 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진실을 담고, 위대한 정신의 세계를 담아 그것을 가장 적절한 언어로 표현할 때 정말 아름다운 명문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어째서 성서가 인간에게 진정한 구원의 도를 일깨워주는 보편적 정신세계를 담고 있는지, 그것을 잘 보여 주는 핵심적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또한 그 내용을 아주 쉽고도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빼어난 명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따라서 여전히 오늘 우리들에게도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켜 주는 말씀입니다.

번역본마다 한결같이 “포도원의 노래”라고 소제목을 붙이고 있는 이 말씀은 먼저 아름다운 포도원을 그리고 있습니다. 본문은 완전한 시가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 시가는 포도를 수확하는 축제의 절기의 낭송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노래하는 내용을 보겠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 노래를 해 주겠네. 그가 가꾸는 포도원을 노래하겠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기름진 언덕에서 포도원을 가꾸고 있네.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고, 아주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네. 그 한가운데 망대를 세우고, 거기에 포도주 짜는 곳도 파 놓고,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렸는데, 열린 것이라고는 들포도뿐이었다네.”

포도원을 가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들려주는 노래로서,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기 위해 땀과 정성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하는 사람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포도원은 기대했던 결실을 내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지는 것으로 첫 대목은 끝을 맺고 있습니다. 모든 노력과 정성이 허사가 되어버린 상황입니다.

이 노래가 수확의 기쁨을 누리는 축제 때 낭송되었다고 생각하면 좀 이례적입니다. 수확의 기쁨을 천진난만하게 노래하기보다는 결론의 반전으로 오히려 온전히 수확하지 못한 현실을 탄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이 노래의 묘미가 있으며, 역사의식으로 충일한 성서적 신앙세계의 진수가 담겨 있습니다. 지금 밭에서 풍성한 포도를 수확하는 순간 곧바로 그와는 대비되는 역사적 현실로 눈길을 돌리고 있습니다. 성서적 신앙세계가 당대의 풍요종교와 명확히 구별되는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저 자연을 노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에 비추어 인간 삶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신앙입니다. 이 노래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포도원을 보면서 공동체의 삶의 차원 전반을 되돌아보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첫 번째 대목에 이어 다음 대목으로 접어들면서 화자가 바뀝니다. 화자는 그 포도원을 가꾼 바로 그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는 외칩니다.

“예루살렘 주민아, 유다 사람들아, 이제 너희는 나와 나의 포도원 사이에서 한 번 판단하여 보아라. 내가 나의 포도원을 가꾸면서 빠뜨린 것이 무엇이냐? 내가 하지 않은 일이라도 있느냐? 나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렸는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느냐?”

이것은 포도원을 가꾼 하나님의 목소리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노래를 듣던 사람들은 지금 어떤 상황을 두고 말하는 것인지 알아차리게 되어 있습니다. 단지 자연적 공간으로서 포도원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의 공동체를 두고 말하는 것임을 알아차립니다. 포도원은 바로 지금 노래를 듣고 있는 자신들을 말하는 것이고 포도원을 가꾸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동시에 무엇 때문에 포도원, 곧 자신들이 결실을 내지 못하게 되었는지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노래는 그 진실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해줍니다.

노래는 이어서 결실을 내지 못한 포도원이 처해질 운명을 선포합니다.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무슨 일을 하려는지를 너희에게 말하겠다. 울타리를 걷어치워서, 그 밭을 못쓰게 만들고, 담을 허물어서 아무나 그 밭을 짓밟게 하겠다. 내가 그 밭을 황무지로 만들겠다. 가지치기도 못하게 하고 북주기도 못하게 하여, 찔레나무와 가시나무만 자라나게 하겠다. 내가 또한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겠다.”

결실을 내지 못하니 결국 황폐해지리라는 선포입니다. 노래는 여기에서 사실상 끝나지만, 그 말미에 그 의미를 짤막하게 해설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만군의 주의 포도원이고, 유다 백성은 주께서 심으신 포도나무다. 주께서는 그들이 선한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보이는 것은 살육뿐이다. 주께서는 그들이 옳은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들리는 것은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울부짖음뿐이다.”

이것이 이 노래가 담고자 한 뜻입니다. 이 노래는 바로 그 진실을 깨우치도록 하기 위해 들려준 노래인 것입니다. 포도원이 마땅한 결실을 내지 못한 현실, 그것은 정의가 사라진 현실을 말합니다. 나무가 튼실해 보이고 잎이 무성해 보여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런 나무로 가득한 포도원은 소용없습니다. 나무에 뭔가 병이 들었을 때, 아니면 멀쩡해 보이고 잎이 무성하지만 뭔가 영양의 균형이 깨져 있을 때 나무는 마땅한 열매를 내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종종 실제로 볼 수 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가 보기에 지금 이스라엘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바라셨던 것은 공평과 정의였다. ⓒGetty Image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언자들의 공통된 메시지를 다시 확인합니다. 아무리 나라와 민족이 번성한 듯하여도, 옳은 일 곧 정의가 없다면 쓸모없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와의 동시대 예언자인 아모스, 미가의 예언과 동일한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입장에서 이 선포는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동시대 예언자인 아모스와 미가는 그야말로 변방의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양치기요 뽕나무를 기르는 농부, 또는 지방의 서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들에게 불공평한 당시의 현실은 쉽사리 보였습니다. 반면에 이사야는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활동한 사람이었고 그 출신 또한 유력했습니다. 그런 만큼 그의 신학 또한 그 지위에 어울릴 만한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왕도신학’이라고 할까요? 하나님의 도성과 하나님이 세운 왕조는 어떠한 경우라도 지켜주신다는 신학적 입장입니다. 그런 입장을 갖고 있는 이사야에게도 사회에 만연해 있는 불의, 유력자들의 횡포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유력자들이 횡포를 저지르고도, 그래서 사회에 정의가 무너졌는데도 존속할 수 있는 사회는 없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사야가 강조한 왕도신학, 곧 다윗 왕조를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믿음에 기반한 신학은 재해석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비춰볼 때 더 근본적인 진실은 그 왕조가 정의를 지키는 한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선택한 사람이니 내가 너를 지켜주겠다’는 것보다도 ‘내가 선택한 네가 해야 할 바는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이다’라는 것이 더 근본적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선포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공의를 뜻합니다. 성서의 신앙세계가 특정한 민족, 특정한 종교공동체를 넘어 보편적 의의를 지닐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메시지를 그 핵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3.1운동 102주년을 기리는 주일입니다. 오늘날 그 운동이 정치적 우파에 의해 전유되어버리고 있는 듯하여 안타깝지만, 3.1운동은 오늘 민주공화국으로서 대한민국의 출발점이요 그 기틀을 형성한 원점입니다. 그것은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지향하는 민족운동에 그치지 않고 진정으로 민중이 주인이 되는 민권운동으로서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운동이 표방한 세계적 평화라는 대의 또한 숭고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역사적 유산은 이후 모든 독립운동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역시 그 역사적 기초 위에 세워졌습니다. 제헌헌법은 자유의 이념에 한정된 것이 아니고, 그와 더불어 평등의 이념을 중요한 기초로 하였습니다. 특히 조소앙 선생의 삼균주의(정치, 경제, 교육에서의 균등) 이념은 제헌헌법을 관통하는 중요한 사상적 기초가 되었습니다. 토지개혁을 시행하고, 국가 재원이 바닥인 상태에서도 의무교육을 시행하여 훗날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초석을 닦을 수 있었던 것도 그 역사적 유산에서 비롯됩니다. 심지어 제헌헌법 제정과정에서는 노동자의 경영참여권과 이익분점권까지 논의되었고, 경영참여권은 빠졌지만 이익균점권은 보장할 만큼 진취적이었습니다. 그 정신을 배반한 독재권력과 수구세력의 집요한 훼방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산업화와 더불어 민주화를 진전시킨 원동력 또한 그 역사적 유산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촛불항쟁으로 그야말로 한 발떼기 역사를 진전시킨 것도 그 역사의 물줄기를 잇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사회의 현실을 돌아보면 어떻습니까? 어찌 이리 마음이 답답할까요? 지난 주간 아시아나KO 노동자와 함께하는 사순절 금식기도회중 기장총회 교회와사회위원회 주관 기도회로 다녀왔는데,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을 받고, 또한 고용유지를 위한 지원금까지 받은 기업이 그 취지에 따른 책무를 걷어치워 버리고 일방적으로 노동자들을 해고해버렸을 뿐 아니라 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도 그 해고의 부당성을 인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을 복직시키기는커녕 행정소송으로 버티는 사태는 정의롭지 못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드러내 주고 있는 사태입니다. 그것이 용인된다면 우리 사회는 신뢰의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고, 결국 파국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먼저다.” “노동존중의 사회를 만들겠다.” 촛불의 염원으로 등장한 현 정부는 그 정신을 표방하였습니다. 코로나19 위기 국면에 처해서는 “위기가 불평등을 키운다는 공식을 깨겠다.”고 그 의지를 천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불평등과 위기는 오히려 악화되고 있습니다. 촛불의 염원으로 등장한 정부마저 그 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또 어찌해야 할까 깊은 회의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권력은 사람의 뇌를 바꾼다’는 말이 과연 진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외형적으로 볼 때, 특히 코로나19 위기 국면에서 경제적 측면에서나 정치적 측면에서 한국은 그래도 세계 많은 나라들 가운데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는 나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분단과 전쟁, 그리고 독재를 겪으면서 지나온 세대들과 달리 오늘의 세대들은 적어도 ‘후진국 콤플렉스’ 같은 것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정작 개별적으로 부딪히는 현실에서는 가혹한 경쟁의 상황과 언제든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불안감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이 부족해서일까요? 정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김구 선생이 아름다운 나라를 이루고자 했던 그 이상이야말로 정말 오늘 우리사회에 절실하지 않을까요? 경제력이나 군사력의 우위를 자랑하지 않고, 인의와 사랑을 고양할 수 있는 문화의 힘으로 귀감이 되고 세계평화를 이루고자 했던 꿈입니다. 역사의 질곡 그 절정기에 나온 이상으로서 놀랍지만, 이제는 정말 그 뜻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을까요?

오늘은 특별히 졸업과 입학으로 새로운 삶의 한 과정에 입문하는 젊은이들을 축하하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고, 그 젊은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정말 살 만한 세상을 함께 이루고자 하는 노력이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됩니다. ‘라떼는 말야!’ 하는 태도가 아니라 더불어 새로운 세상을 일궈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진실을 다시금 새기며,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 그 뜻을 더불어 이루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더불어 튼실하고 달콤한 열매를 누리는 아름다운 포도원과 같은 우리 사회를 이루기 위해 헌신하는 교회,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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