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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입가경(漸入佳境), 후목불가조야(朽木不可雕也)

기사승인 2021.02.28  02:5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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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보스-바하(En Voz Baja)

▲ 한국교회는 정말 되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나 ⓒGetty Image

 

점입가경(漸入佳境)

중국 동진(東晉)의 화가였던 고개지(顧愷之)의 일화이다. 고개지는 서예로 이름을 날리던 왕희지와 함께 당대 예술계의 투톱을 달리고 있었다. 그는 재주가 많은 것과 독특한 성격으로 유명했는데, 특히 불교 인물화에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사탕수수를 좋아했던 그는 항상 뿌리에서 먼 쪽의 얇은 가지부터 씹어 먹었다. 그 이유를 친구들이 묻자 그는 “뿌리로 갈수록 단맛이 점점 강해지기 때문이지(漸入佳境).”라고 대답했다. 이때부터 점입가경(漸入佳境)은 경치나 문장, 또는 어떤 일의 상황이 갈수록 재미있게 전개된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는 이 의미를 역으로 살려 일의 상황이나 형편이 갈수록 막장이 되어가는 것을 조롱할 때 더 많이 사용한다. 이 말은 시간이 지날수록 하는 짓이나 모양이 더욱 꼴불견이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를 때에도 사용하고 가관(加冠)이라는 말로 대치할 수도 있다.

요즘 기독교가 점입가경의 모습을 보인다. 내가 속해 있는 대한예수교 장로교(통합)도 그렇다. 2017년 명성교회가 부자 세습을 강행하였다. 이에 대해 반대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지만, 세습은 철회되지 않았다. 총회 재판국의 최종 판결도 총회의 수습안으로 인하여 무효 되고 말았다. 결국, 2020년 9월 제105회 총회를 통하여 명성교회 세습은 그대로 용인되었다. 목사와 장로 총대들은 총회 이후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각자 삶의 자리로 돌아갔고 명성교회 세습을 반대하는 소리는 몇몇 분들의 외침을 제외하고는 사라지고 말았다. 총대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각 노회의 장들을 선출하고 서로 축하하였다. 어느 누구도 돌아온 삶의 자리와 속해 있는 노회에서 세습을 용인한 총회와 총대들에 대한 자성과 질책의 소리는 내지 않았다. 2021년 1월 김하나 목사 역시 아무런 일 없었던 것처럼 “그동안 고무신 거꾸로 신지 않은 분들에게 감사하다”라고 말하면서 명성교회 위임목사로서 활동을 재개하였다.

지난주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한 노회가 오랫동안의 진통 끝에 노회 분립결의를 했다. 그런데 결의 내용이 점입가경, 가관이다. 법적으로 노회 구성 충족 당회 수는 30개이다. 다시 말하면 적어도 30개 조직교회가 있어야 노회를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분립에서는 24개의 당회만으로 분립을 가결하였다. 일명 조건부 분립이다. 분립조건으로는 2022년 봄 노회까지 분립 요건인 헌법 제73조 1항(30개 당회)을 충족하지 못 하는 경우 별도의 절차 없이 즉시 총대 파송을 제한하며 노회 폐지를 진행하겠다는 것이다. 점입가경, 가관이다.

최근 통합 목회자들 사이에서 오고 가는 글이 있다. 부총회장을 하겠다는 어떤 분이 전장연(전국장로연합회) 수련회 발대식에서 이렇게 인사했다고 한다(사실 여부는 모르겠다). “저는 장로 노회장에게 안수받은 첫 번째 목사입니다. 제가 부총회장이 되면 장로 노회장이 목사 안수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장로님이 안수하여 세웠으니 장로님들이 책임져 주십시오.” 부총회장에 당선되면 그다음 해 총회장으로 자동승계 되는 관계로 사실상 부총회장 선거가 총회장 선거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한때는 십당구락(十當九落)이라는 말도 유행했다고 한다. 물론 억 단위의 이야기이다. 점입가경, 가관이다.

이런 일들이 통합 측에서만 발생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점입가경, 가관의 현상은 전방위적으로 온 교계에 퍼져있다. 모 교단의 성 소수자 축복 목회자에 대한 재판과정을 보면서도 같은 현상을 목격한다. 목회자들의 성범죄 행위, 돈과 관련된 추악한 행위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일들이 즐비하다. 코로나 시대에 기독교회와 목사들 그리고 몇몇 단체들의 행동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도 없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못된 일들만 발견된다. 점입가경, 가관이다. 무엇을 어찌하랴?

후목, 불가조야 朽木不可雕也

어느 날 공자가 자신의 제자 재여(宰予)가 낮잠 자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후목 불가조야 분토지장 불가오야 어여여하주”(朽木不可雕也, 糞土之牆不可杇也. 於予與何誅?) 썩은 나무로는 조각할 수 없다. 더러운 흙으로 쌓은 담장은 흙손으로 정리할 수 없다. 여를 어찌 책망할 수 있겠는가?

재여는 머리가 뛰어난 제자였지만 본성이 게을렀다. 공자는 재여의 삶을 살펴보고 경험한 이후 본인의 志氣(지기) (뜻과 기백, 의지와 기개)가 잘못된 사람은 결코 제대로 가르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본인의 의지가 없는데 가르쳐 본들 그것이 변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 바뀌고자 하는 마음과 실천이 없는 한 변화는 발생할 수 없다. 이현주 목사님은 나에게 공자의 말을 인용해서 늘 말씀하시곤 했다. “홍 목사님, 썩은 나무에 도끼 대지 마세요. 썩은 나무는 그대로 놔두면 저절로 쓰러집니다. 어차피 쓰러질 썩은 나무인데 힘들게 도끼질해서 도끼날에 썩은 내 묻히지 말고 좋은 나무로 다른 것을 조각하세요.”

이러한 상황을 가슴 아프게 여기는 진실된 목회자들과 기독교인들은 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눈물 흘리며 가슴 아파한다. 그리고 이런저런 대안을 내놓고 있다. 한편으로는 강력한 비판과 질책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이에 반해 나는 요즘 이러한 기존 기독교회의 행동과 말에 대하여 아무런 감정이 솟아나지 않는다. 할 말이 별로 없다. “뭐 그렇게 난리 할 것 있나. 이미 썩을 대로 썩은 데서 뭘 기대할 수 있나”라는 마음이다. 그래서 아프거나 슬프지도 않고 화도 나지 않는다. 朽木 不可雕也(후목 불가조야, 썩은 나무는 조각할 수 없다) 아닌가? 이미 끝난 것 아닌가! 죽은 아들 ○○○ 붙잡고 있어 봐야 아무 의미 없다. 새로운 길 찾는 것 외에는! 그냥 놔두고 다른 길을 가야 한다.

페이스북 친구 목사님의 담벼락에서 걷어온 글이다. “성경은 '잘됨'이 아니라 '바르게 함'을 복이라고 한다. 올바름을 외쳤지만,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고독하게 살아간 선지자들의 삶이 있다. 성경은 그것을 ‘복’이라고 한다. 잘되는 복이 아니라, 바르게 함을 ‘복’으로 선포하고 실천하는 교회만이 진정한 교회이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교회를 그렇게 돌려놓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 하여 마음이 너무 무겁다. 자리를 떠나서 새로 틀을 짜야 할지, 아니면 자리를 지키면서 힘들더라도 하나씩 바꿔가야 할지…. 아! 그럴 용기도, 힘도 없다.”

우리, 이제 용기를 내어 새길을 찾을 때이다. 다른 길을 가자. 자리를 지키며 하나씩 바꿔 가는 것은 이미 불가능해졌다. 썩은 나무로 조각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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