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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사람의 되는 길

기사승인 2021.02.25  15: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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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귀한 사람(이사야 32,1-8; 마태복음 20,20-28)

ⓒJared Boggess

교회는 종려주일까지 40일을 사순절로 지키는데, 오늘은 그 기간 중 첫째 주일입니다. 지난 수요일 시작된 사순절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정해졌기에, 의도적으로 회개와 경건이 강조됩니다. 물론 이것이 중요하겠지만,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 이르는 길은 두려움의 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희망의 길이기도 했습니다. 희망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이고 동시에 희망을 낳는 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와 함께 그 길을 간다면, 그 기간 동안은 오히려 희망이 지배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과 달리 가져도 좋을 희망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알고 있기에 그 희망을 더욱 단단하고 더욱 풍성하게 하는 것이 이 기간 동안 우리가 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예수의 죽음과 고난은 온전하게 그 의미를 드러낼 것입니다.

이사야 32장은 한 왕에 대한 예언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함께 매우 놀라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는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왕들과 달리 공의로 다스리는 왕이며, 따라서 그 밑의 고관들도 정의를 따라 일할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기피하는 두려움이 아니라 피하고 의지하고 쉼을 얻을 곳입니다. 그는 억울함을 씻어주고 눈물을 닦아줍니다.

이것은 정의로운 왕이 만들어낼 변화의 시작입니다. 그의 정책은 사람들의 평화로운 삶의 조건을 만들어내고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을 통해 자기를 실현시킬 수 있게 합니다. 두려움과 억압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지혜를 얻고 마음이 급하던 사람은 깨달음으로 앎에 이르고 우물거리며 말하던 자들도 분명하고 신속하게 말하게 될 것입니다. 정의로운 사회에서 사람들이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고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 때문일 것입니다. 정의에 기반한 그의 선한 영향은 이처럼 고위 관리들로부터 백성들에게까지 이르며 사람들을 달라지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불의를 품고 악한 계획을 세우고 거짓으로 약자와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짓밟는 자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그들은 배고픈 자들을 굶주리게 하고 목마른 자에게서 마실 것을 빼앗습니다. 정의로운 왕이 있는 곳에서 이들은 과연 어떻게 인식될까요? 부패하고 부정한 권력 아래서라면 그들의 부와 권력은 그들의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선망의 대상이 될 지도 모릅니다. 더 나아가서는 똑똑하고 처세술이 뛰어나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의로운 왕의 정치는 그러한 현실의 부조리를 똑똑히 보게 할 것입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자들의 소행이고 이들은 고귀한 자가 될 수 없다고 똑바로 말할 것입니다. 불의한 권력과 부는 더 이상 유혹이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야훼께 막말을 쏟아내는 자들이기에 그들에게 사람이란 욕망의 대상이고 부 축적의 수단에 불과합니다. 사람의 품격은 타인을 존중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사람의 고귀함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에 있습니다. 정의의 왕은 이러한 사람들을 낳고 불의한 현실과 마주하고 극복하게 하고 평화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촉진할 것입니다.

정의로운 왕에 대한 예언은 하나님의 계획하시는 일의 목표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잘 보여주며, 또 우리 삶의 목표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새삼 깨닫게 합니다. 품격 있는 고귀한 사람이라고 말하면 아마도 하나님의 목표와 우리의 목표가 일치하지 않을까요?

예수께서는 정의로운 왕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낮고 낮은 곳에 오셔서 약하고 소외되고 짓밟히는 자들의 편에 서신 것이 그의 정의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사람들에 의해 인지되고 인정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예수의 두 제자 세베대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를 찾아와 주님의 나라에서 둘을 각각 주님 좌우에 앉혀달라고 합니다.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듯합니다. 그래서 있을 수 있는 청탁이지만, 그것은 주님을 오해하고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몰랐기 때문에 한 부탁입니다.

그런데 그 청탁은 제자들 사이에 갈등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아마도 저마다 그 자리를 노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이를 보시고 얼마나 답답하셨겠습니까? 그들과 보낸 시간이 얼마인데, 겨우 이정도였다고 마음 아파하셨을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나라들과 권력의 속성을 간략하게 언급하십니다. 제자들 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권력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또 다룰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권력이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와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권력은 개인의 권리를 임의로 제약할 수 있고 소유를 공출해갈 수도 있습니다.

권력 앞에 한 개인은 종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두 제자들의 어머니와 제자들은 모두 주님의 나라를 그러한 권력의 관점에서 이해했습니다. 또 그것이 예수를 따르는 기본 동기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에게서 시작되는 새 질서를 기대하고 예수의 운동에 참여했겠지만, 새 질서의 내용과 형식을 알지 못했기에 그들의 이해는 여전히 옛 질서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과연 이사야가 말했던 정의와 공의의 질서가 예수에게서 어떻게 표현될까요? 예수께서는 동일한 내용을 큰 자와 섬기는 자, 으뜸인 자와 종, 섬김을 받는 것과 섬기는 것 세 가지의 관점으로 바꿔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질서는 큰 자, 으뜸인 자, 섬김 받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것이 당연하니까 두 제자의 어머니도 그렇게 부탁했습니다.

더 높고 더 큰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자리를 향한 노력과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는 질서입니다. 거기서는 아래를 향해서는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질서를 전복시킵니다. 큰 자가 되고자 하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면 종이 되어야 하고 섬김을 받으려면 섬겨야 하는 질서입니다.

이러한 질서가 가능하겠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께서는 자신이 제자들 가운데 섬기는 자 또는 시중드는 자로 있다고 말씀하심으로 그 가능성을 보여주십니다. 여전히 이해하고 따르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러한 질서가 수립된다면, 폭력적이고 위압적인 권력은 소멸되고 섬기는 ‘권력’만 있을 것입니다. 낮은 자는 섬김을 받고 높은 자는 섬기는 그 질서 속의 사람은 모두 존중받고 모두 목적이 되지 않을까요? 정의로운 왕은 사실상 백성을 섬기고 섬김으로 섬김을 받는 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섬기는 왕은 백성들에게서 권력에 의해 왜곡된 의식을 씻어내고 그들을 ‘죄’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당당하고 여유 있고 포용적인 사람들이 되게 할 것입니다. 섬김을 받는 백성은 각자 삶의 자리에서 자기를 낮출 수 있고 섬김의 정의를 실천할 것입니다. 이렇게 섬김을 통해 주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서 점차 확장되어 갈 것입니다.

섬김으로 섬김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종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나중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지혜와 자유와 능력이 우리에게 있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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