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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부인해야 할 것

기사승인 2021.02.18  1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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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십자가를 지고(신명기 3,23-28; 마가복음 8,27-34)

▲ Jacob Jordaens, 「The Four Evangelists」 (1625–1630) ⓒWikipedia

우리는 십자가를 말할 때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핵심인 예수의 십자가와 죽음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오늘 마가복음 본문은 예수가 아닌 우리의 십자가를 말합니다. 십자가에 대한 전이해가 있기 때문에 이 본문은 사실 우리에게는 부담스럽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과연 무슨 말일까요? 그것이 한 가지 의미만 갖는 것은 아니겠지만, 오늘의 본문을 중심으로 그 의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예수가 메시야임을 처음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감추기도 하는 이 본문은 마가복음서에서 전환점을 이룹니다. 그때까지 예수는 기적을 베풀고 말씀을 가르치며 사람들과 어울려 왔지만 자신을 메시야로 말한 적도 없고 사람들도 그를 메시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그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궁금해서는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 또는 예언자들 가운데 하나로 여긴다는 말을 듣고 제자들에게 똑같이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런지요? 여러 가지 대답들이 가능하겠지만, 정답을 맞추는 방식이 아니기를 빕니다. 예수가 단지 제자들의 생각을 알기 위해서 던진 것만은 아닌 이 질문에 베드로가 주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시라고 답합니다. 우리는 이 대답 위에 서있습니다. 그만큼 결정적인 고백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답하지 않았다면, 답답할지라도 예수는 거기서 멈추고 더 기다려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는 이 고백에 때가 되었다는 듯이 제자들에게 자기가 갈 길을 이야기해주십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메시야의 길이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라니 베드로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와 함께 지나온 길이 오르막길이었다면 앞으로의 길은 내리막길인 셈입니다. 메시야가 연상케 했을 정상에는 가보지도 못한 채 말입니다. 베드로는 실망한 나머지 분노했습니다. 자신이 속으로 키워왔던 메시야에 대한 꿈을 깨뜨린 예수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주님이 우리의 꿈을 깨뜨린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주님이 주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배반했다고 여겨지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그러나 예수는 베드로의 메시야 이해와 그에 근거한 행위와 목표를 사람의 일로 규정합니다. 바로 이 점을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베드로의 신앙적 언어는 대단히 모범적이었지만, 그 언어 사용 의도는 ‘비신앙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메시야로 고백하는 예수가 사실상 주님이 아니라 자신의 꿈을 이루는 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성서에서는 마술사 시몬(행 8,9-24)이 그와 같은 비신앙적 신앙을 가진 대표적인 경우일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적 행위에 대해 반성적으로 사유하기를 멈추면 우리는 언제나 그러한 유혹이나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신앙의 수단화는 우리가 목격하는 수많은 교회들의 일탈을 초래한 주요 요인일 것입니다.

예수는 이어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본문을 조금 달리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곧’ 자기 십자가를 지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동일한 사건을 뉘앙스를 달리하며 다시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본문에서 유추해낼 수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이 말을 적용한다면, 그가 스스로 부인해야 할 것은 바로 메시야에 대한 그의 이해입니다. 그 이해를 가지고 있다면, 그는 예수를 따르지만 계속 예수의 길을 가로막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해를 바꾸는 것은 예수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그의 꿈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면, 바로 그 이해와 그 꿈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저 십자 모양의 나무틀이 아니라 거기에는 무언가가 달립니다. 달려야 할 것을 갈 5,24는 일반적으로 말해 탐심과 정욕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일을 꾀함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은 그 무엇이든지 부정하고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그런데도 그 이해와 그 꿈은 단번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십자가를 지고 있으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그 십자가를 지는 것은 위에서 말한 지속적인 반성적 사유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 앞에서 그 십자가를 내려놓을 수 있을 때까지 우리가 예수를 도구화하는 일이 없도록 그 십자가는 우리 어깨 위에 우리 심장 속에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구약의 사건 속에 투영하기는 쉽지 않지만 가능한 일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이끌었지만, 최종 목적지에 들어가는 것은 금지된 비운의 지도자입니다. 상황이 어려울 때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기와 아론에게 항의했습니다. 변하지 않는 이스라엘 때문에 속이 상한 모세는 그런 이스라엘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로서는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그런 모세의 속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화를 내시며 그가 이스라엘과 함께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민 20장).

이때의 모세 마음은 어땠을까요? 실수라면 실수일 수 있고 또 한 번의 실수인데 그렇게 하시는 것은 너무하신다고 할까요? 40년의 세월이 허망하게 되었구나 한탄할까요? 여하튼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이 안 된다고 해도 모세에게는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그가 얼마나 간구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구를 거절하시며 더 이상 다시는 간구하지 말라고 딱 잘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최종적 거절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픈 마음이 사라졌을까요? 그런데 그가 그런 마음을 계속 가지고 있다면, 그는 자신이 인도해야 하는 이스라엘을 어떻게 대하게 될까요?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그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또 다른 잘못을 범하게 될 것입니다. 그에게 그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아주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룰 수 없게 된 필생의 꿈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겠지만, 그것을 억제하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 본문의 말을 빌면, 그는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다시 말해 그 꿈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고는 하나님의 종으로 그에게 허락된 지점까지 이스라엘을 인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나중에 자기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음을 이스라엘 앞에서 담담히 말하는 것을 보면, 그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그 꿈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욕망이 충돌할 때, 우리는 우리를 부인하고 그것들을 못박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꿈을 이루는 수단이 되지 않기를 빕니다. 우리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를 빕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뜻을 먼저 구할 때 그 나라 안에서 그 나라를 위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우리의 ‘이익’을 위해 일하실 것입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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