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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빈 강정

기사승인 2021.02.17  16:5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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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의 정도, 참 사람의 길(이사야서 58:1~10)

새해가 시작되어 달이 바뀌고, 이제 교회의 절기도 바뀌고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기쁨을 새기는 성탄절과 주현절이 지나고, 이번 주 17일 재의 수요일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새기는 사순절에 접어듭니다. 진정으로 참회하는 마음으로 머리에 재를 뿌리는 성서시대의 관례를 따라 지켜지고 있는 절기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째서 세상 가운데서 고난을 겪어야 했는지 되새기는 절기를 맞이하면서, 오늘 우리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말씀이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직접 전하는 말씀은 아니지만, 그 삶의 의미를 새길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예언자 이사야의 선포로서,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매우 선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성서의 일관된 메시지의 정수라고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어지고, 마땅히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이어지는 일관되고 집요한 성서의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사실 어떤 해석을 덧붙이는 것이 군더더기가 될 정도로 선명한 메시지이지만, 본문말씀이 선포된 맥락이 있기에 그 맥락을 재삼 확인하면서 본문말씀의 의미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말씀은 세 번째 이사야의 선포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포로로부터 돌아와 공동체의 재건을 앞둔 시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1절부터 환기하자면, 본문말씀은 먼저 야곱의 집, 곧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허물이 무엇인지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날마다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의 길을 알기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무엇이 공의로운 판단인가를 하나님에게 묻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기를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허물이 될까요? 마치 그것으로 공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듯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줄여 말하면 종교적 의례에는 열심이지만 그것이 곧 공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말끝마마 하나님의 이름을 붙이고, 모든 사안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주장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자신들의 욕망과 의도를 관철시키려 하는 경우입니다. 지금 우리 현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경우입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선포는 구체적인 종교적 의례로서 금식에 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에서 금식의 전통은, 주전 586년 유대 민족국가가 멸망하고 성전이 무너진 이후부터 그 비극적 사건을 되새기는 뜻에서 정례화되었습니다. 앞의 문맥과 연결해서 이해하자면 이스라엘 백성은 정례화된 금식을 잘 지켰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는 겉과 속이 다른 그 백성들의 태도가 지적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주시지도 않은데 무엇 때문에 그런 고행을 해야 하느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종교적 의례에 열심인 것이 이미 겉치레뿐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종교적 의례에 열심을 내면서 자신들에게 가시적 보상이 주어지면 그것을 의미 있게 받아들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그렇게 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두려움에서 그저 행할 뿐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금식일에도 자신들의 향락만 추구하고 일꾼들에게는 무리하게 일을 시킨다는 질책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까지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상거래행위를 하고, 채무로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노동을 시킨 현실을 말합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자신들의 잇속 챙길 것은 다 챙기고, 약자들에게 못된 짓을 다 하면서도 거룩한 체 하는 현실을 말합니다. 매일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묻기를 즐기는 사람들의 실상입니다. 역시 우리 현실에서 적지 않게 경험할 수 있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심하게 꾸짖습니다.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겠느냐? 이것이 어찌 사람이 통회하며 괴로워하는 날이 되겠느냐?”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는다고 해서 어찌 이것을 금식이라고 하겠느냐?” 종교적 의례, 예배가 그렇게 겉치레로만 전락해버린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것을 기뻐하지 않는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금식은 어떤 것일까요? 6절 이하의 말씀이 그 답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향한 금식 대신에 인간을 향한 행위로 대체하여 금식의 참뜻, 예배의 참뜻을 강조합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들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해석의 여지없이 명쾌한 말씀입니다. 모든 압제로부터의 자유를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성서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정신입니다. 어째서 그것이 성서의 가장 밑바탕이 될까요?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을 “너희를 이집트의 노예상태로부터 해방시킨 하나님”이라고 선언하는 분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의 밑바탕에는 자유가 없는 노예살이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그 경험이 깔려 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신앙을 형성한 가장 원초적인 경험입니다. 이 말씀의 근본취지는 이사야 61장에서 되풀이되고, 그것은 다시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선포로 재현되고 있습니다(누가 4:18).

여기에서, 그 누구라도 타의에 의해 압제 상태에 놓인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다는 신앙이 형성되었습니다. 오늘날 인간사회가 지고의 가치로 지향하는 자유의 정신은, 이와 같은 성서의 정신을 그 중요한 하나의 뿌리로 삼고 있습니다.

7절 말씀은 이어 이렇게 선포합니다.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 종교적 의례로서의 금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이 무엇인가. ⓒGetty Image

이 역시 해석의 여지없이 명쾌한 말씀입니다. 고통 받는 이웃을 외면하지 말라는 이 말씀 이전부터 이미 선포되었고(신명 22:1), 이후 예수님의 언행에서도 끊임없이 되풀이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온전한 인간사회를 위한 연대의 정신, 정의의 구현을 말합니다. 사회적 약자를 외면하지 않고 그들을 돌보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는 것을 말합니다. 공민권이 없는 사람, 파산당한 사람, 노예, 감금된 사람, 굶주린 사람, 떠도는 사람, 추위에 떠는 사람들을 환대하고 그들이 마땅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그것이 곧 정의라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현실에서 그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꼽는다면 어떨까요? 정당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자들, 이주민과 난민, 몸이 불편한 사람들, 갖가지 이유로 배제되고 차별받는 소수자들 아닐까요? 불행하게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열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 현실입니다.

본문말씀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 고통을 호소하는 현실 가운데서 진정한 사회적 연대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정의라고 선포합니다. 성서는 끊임없이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의 삶의 권리를 이렇게 옹호하고 강조합니다. 그렇게 배제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그렇게 배제 대상을 만들어내는 사회구조 자체가 불의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우선 손길을 내미는 것은, 이들이 처한 상황 자체가 불의하기에 그 불의한 상황을 바로잡으라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의 자유는 각 개인의 자유의지 그 자체로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 자유를 지킬 수 있는 정의가 보장되어야 하고, 그에 기초한 사회적 연대가 이뤄져야 가능합니다. 오늘의 사회가 존속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유지되어야 할 핵심적인 가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회적 정의와 연대의 정신 역시 성서에 그 중요한 하나의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어떻게 구체화되어야 하는지 아주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어떤 두려움 때문에 종교적 계율을 지키고 금기를 지키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인간의 진정한 자유, 그리고 누구나 예외없이 특히 사회적 약자들 또한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사회적 정의와 연대를 이룸으로써 공동체의 온전함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진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계속해서 그 진실을 환기하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햇살처럼 비칠 것이며, 네 상처가 빨리 나을 것이다. 네 의를 드러내신 분이 네 앞에 가실 것이며, 주님의 영광이 네 뒤에서 호위할 것이다. 그 때에 네가 주님을 부르면, 주께서 응답하실 것이다. 네가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내가 여기에 있다’ 하고 대답하실 것이다.”

그리고 앞서 선포한 내용과 동일한 내용을 재차 선포합니다. “네가 너의 나라에서 무거운 멍에와 온갖 폭력과 폭언을 없애 버린다면, 네가 너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 불쌍한 자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면, 너의 빛이 어둠 가운데서 나타나며, 캄캄한 밤이 오히려 대낮같이 될 것이다.” 이 격려와 위로의 약속은 계속 이어지지만, 10절까지 한정하면 이렇게 결론 맺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이 예언의 선포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포로로부터 귀환하여 민족 공동체를 회복하고 성전을 다시 지으려는 그 시점에서 선포되었습니다. 그 배경에 비추어 생각할 때, 오늘 본문말씀은 국가사회를 재건하고 성전을 재건하는 그 기초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인간사회가 존재하는 한 언제나 지향해야 할 바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성서가 인간의 삶을 위한 보편적 가치를 일깨워주는 유산으로서 의의를 지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진실을 끊임없이 일깨워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교회가 자신들만의 아성을 쌓고 그 안에서 의례에 몰입하는 가운데 스스로의 정체성을 구현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오히려 반사회적 행위를 하나님의 뜻을 신실하게 이루는 것이라 착각하는 환상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일깨워 줍니다. 지난 주간 한 외신 기자가 물어 왔습니다. 온 사회가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고통을 감수하고 있는 마당에 어째서 교회가 그에 역행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몇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기사에는 거의 반영된 것 같지 않지만, 보편적 가치 또는 공공성에 대한 감각을 결여하고 있고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한 탓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말 우리 사회에 산적한 문제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그 고통스러운 상황을 매일 피부로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생명의 안전을 위협하는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인한 고통, 그리고 막아내기 위한 방역조치로 오히려 삶이 무너지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매일 체감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전부터 누적되어 온 사회적 불평등으로 인한 고통은 어떻습니까? 부동산으로 인한 불평등은 다시 토지개혁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요구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경제는 성장했지만 여전히 정당한 권리와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이들은 끊임없이 절규하고 있습니다. 병든 몸으로 천리길을 한 달여간 걸어 청와대 앞에 도착한 김진숙씨는 해고된 노동자로서 지난 36년의 삶이 유령이었다 절규하며 보이느냐고 외칩니다. 명예를 회복하고 소박하게 텃밭을 가꾸며 살고 싶다는 한 노동자의 소망도 이뤄주지 못하는 게 우리 현실입니다.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지 7년이 다 되어 가고 있지만 그 진실이 아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 호소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고통스러운 현실의 목록은 끝이 없습니다. 그것을 안고 있는 각 사람의 고통을 더 말할 것 없습니다.

교회가 그 사회 한복판에서 희망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쩌자고 ‘교회라면 지긋지긋하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을까요? 교회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그렇게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최소한 위로를 누릴 수 있어야 하고, 나아가 그 고통을 이겨내기 위하여 힘을 모으는 대열에 나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존재 의의는 없습니다. 오늘 말씀의 진실을 거듭 새기며 그 뜻을 구현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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