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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지고 지웠던 여성 노동운동가들 이야기

기사승인 2021.01.27  16: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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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명희 기노련 초대 사무총장을 만나다 ⑵

80년대 민주화를 향한 치열한 투쟁 속에 함께했던 기독인 노동자들이 있었다. 바로 기독인 노동자들이 주체적으로 만든 단체인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이하 기노련)이다. 그러나 기노련은 다른 단체에 비해 많은 이들에게 낯설기만 한 이름이다. 그래서 에큐메니안은 기노련의 활동을 조명하고 당시의 상황을 독자들에게 전해보고자 기노련에서 활동했던 민주화 투쟁의 선배들을 찾았다. 첫 번째 주자는 기노련 초대회장으로 활약했던 유동우 소장이었다. 그는 기노련 이전의 치열했던 노동 운동의 역사, 기노련의 활동 등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줬다.(관련 기사: 「유동우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 초대 회장을 만나다」, 첫 번째 기사, 두 번째 기사) 두 번째는 기노련 창립에 큰 역할을 한 신철영 선생이었다. 그는 기노련 창립 과정과 당시 기독교가 처한 상황을 세세히 나눠줬다. (관련 기사: 「기노련 탄생의 산파, 신철영 선생」, 첫 번째 기사, 두 번째 기사)

지난 기사(기노련의 시작은 ‘노동자 문학의 밤’)에서 한명희 선생은 기독 노동자들이 모여 개최한 ‘노동자 문학의 밤’이 기노련의 시작이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기노련과 민중교회의 관계, 기노련이 주도한 대중집회의 내용 등 사무총장이기에 해줄 수 있는 실제적인 이야기들을 독자들에게 전해줬다.

지난 기사에 기노련 활동가 한명희 선생의 이야기가 담겼다면, 이번 기사에서는 여성 노동운동가로써 한명희 선생의 정체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남성 중심의 노동운동사 기술의 아쉬운 지점과 당시 여성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한 이들의 어려움과 고민 등 한명희 선생의 증언을 통해 성 차별적이던 당시의 사회상을 돌아보고 오늘의 운동 방향을 고민하게 된다.

▲ 7-80년대 노동운동의 역사의 여성노동운동가들의 이야기는 지워지고 지웠다는 한명희 초대 기노련 사무총장. 여성들의 기독교 노둥운동역사에 대한 복원이 필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권이민수

▲ 기노련에서 함께 활동한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보니 원래 보수적인 교회에 다녔던 분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보수적인 기독교와의 만남이 어려움을 가져오지는 않았나요?

처음에는 ‘보수적’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노동자들을 만났었죠. 그런데 노동자로 만나서 노동자 문학의 밤을 준비하면서 한 달여 간 부대끼다 보니깐 ‘노동자들이 몰랐던 게 아니고 현실에 대해서 회피했구나’ 하고 정확히 알게 됐어요. 그러면서 의도적으로 직접 목소리를 내도록 했습니다. 예를 들면 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요. 노동자들이 노래 가사를 바꿔서 부르는데 그 가사에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었어요. 그 가운데 신앙고백이 녹아들기도 하고 ‘내가 안일하게 살았구나’ 하고 노동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기도 하고요. 충분히 보수적인 친구들이 있었을 수 있는데 함께 만나고 같이 행사를 준비하면서 그들이 하나하나 껍데기를 벗고 색을 융화시키더라고요. 보수적 기독교가 큰 갈등요소는 아니었습니다.

노동자들 각자 처해진 조건이 다른 현장에 있었어요. 그리고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었죠. 이런 노동자들이 현장에서는 자기 목소리를 못 내고 있다가 기독노동자운동을 하게 되니 바뀌었어요. 노동자 스스로 운동단체를 만들고 끌어갈 수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쉽게 따라와줬죠. 근로기준법도 몰랐던 친구들이 의식화 되고 근로기준법도 가르치고 각 교회에서 소모임도 만들었어요. 재생산이었죠.

교회 다니는 친구들은 워낙에 성실해요. 그 성실을 바탕으로 그 노동자들이 운동에 참여하면서 운동의 좋은 자양분이 됐습니다. 교회 친구들마다 차이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활동을 참 잘했습니다.

오히려 돈이 없어서 힘들 때가 있었어요. 라면 값도 없어서 라면 값 구하러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나러 가기도 했었죠.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생의 비밀로 하자면서 봉투를 주기도 했습니다. 정말 온갖 자원을 다 동원했었습니다.

교회 후원은 거의 없었고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기노련 창립 때 최소한의 경비 지원이 나온 적은 있었어요. 그 외에 저희에게 무상으로 공간도 빌려줬었죠. 기노련은 회비가 조금 있었습니다. 그 외에 정기적인 후원은 없었어요. 외국에 자금 요청을 하기도 했는데요. 우리 기노련은 매번 지원 명단에 누락돼서 한 번도 못 받았었죠. 딱 한번 원조를 받았던 적이 있긴 한데 결국 기노련까지 닿지 못하고 원조금은 다시 되 돌아갔었어요.

정말 맨땅에 헤딩하면서 지냈습니다. 제가 후원금을 직접 모집하러 다녔습니다. 운동권에 이름이 있는 사람, 예를 들면 이삼열 교수, 조화순 목사 이런 사람들에게 후원 요청을 했었죠. 이름과 얼굴을 따로 알기도 했었어요. 한 빵집에서 이삼열 교수를 만나기로 했는데 빵집에 현장에서 뵈었던 낯익은 얼굴이 한명 앉아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가 이삼열 교수시더라고요. 현장에서 자주 보긴 했는데 누군지는 몰랐던 거죠. 이런 식으로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이들을 더듬어 가며 만나서 후원을 요청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후원금을 조금씩 주시면 활동비, 집회에 들어가는 현수막 비용, 인쇄비 등등 기노련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경비로 사용했습니다. 겨우 모아서 버텼었죠. 모금은 거의 저 혼자했어요. 기노련 친구들이 직장 다니는 친구에게 돈을 빌리기도 했었습니다. 돈 걱정은 저 혼자 했었습니다. 제 인권비, 활동비는 써본적이 없었네요.

▲ 선생님께서는 기노련 뿐만 아니라 여성 노동운동도 열심히 하신 것으로 아는데요. 여성 노동운동은 일반 노동운동과 어떻게 달랐나요?

여성노동자들은 어쨌든 운동을 한시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운동가로 평생을 살겠다는 생각이 별로 없었어요. 왜냐하면 자기 노동 현실이 형편없어서 어서 여기를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으니까요. 평생 ‘미싱사’, ‘시다’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가 드물지 않겠어요? 일정기간, 20대 때에는 공장에 다닐 수밖에 없지만 어서 돈을 벌어서 극복하겠다. 탈출하겠다. 결혼을 통해 운동을 떠나고 싶다고 생각한 거죠. 결혼에 대한 환상도 있었어요.

그런데 현실을 들여다보면 결혼을 해도 다시 공장을 다니거나 산골짝 판잣집에 살거나 가정폭력에 시달리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죠. 그래서 결혼에 대해 꿈을 꾸면서 동시에 두려워했습니다.

여성 노동자의 삶이라는 게 정확하게 이해하자면 이래요. 바둑판처럼 딱 짜여진 세상에서 노동자들이 가난을 벗어나고 또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은 꿈이었거든요. 현실에 없는 신기루고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더 그랬죠. 한 때는 내 삶이 좋아질 수 있다는 꿈이 있었는데 운동을 이해하다보면 내 삶의 가난함은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구나 싶어지는 거죠. 그래서 여성 노동자들은 결혼을 포기하거나 독신으로 살기도 하고 결혼에 자신의 삶을 던져버리기도 했습니다.

결혼하면 떠나서 운동이 단절되죠. 저는 이런 운동의 단절을 항상 염려했어요. 그래서 저도 평생 운동만 한다고 생각했던 거고요. 물론 87년 이후에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고 생각하면서 결혼도 하고 운동도 하는 걸로 목표가 바뀌긴 했지만요. 결혼 후에도 건강하게 운동을 계속 꾸려나가겠다고요. 후배를 위해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후에 운동을 배신하지 않고 그 의지를 지켜온 것이 복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서울 시의원을 8년 했습니다. 그리고 항상 노동자의 곁에 있으려고 했고요.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 권리투쟁에 함께 하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최근에도 김진숙 노동자 복직을 위해서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하고 인터뷰하기도 했습니다 저한테 노동운동이 그저 관계없는 일이라면 이렇게 못 했을텐데 그간 노동운동과 호흡을 같이 해왔으니 계속 운동에 가담할 수 있게 만드는 거 같아요. 노동자의 아픔에 동참하려는 마음을 지금도 지닐 수 있던 것은 기노련의 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여성노동운동가로서의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 혹자는 노동운동 역사에서 여성 노동운동은 지워졌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여성 중심적인 노동 운동에서 남성 중심으로 옮겨지기도 했고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산업구조가 바뀌면서 특히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경공업에 여성노동운동가가 밀집해 있었는데 경공업이 다른 제3 세계 나라로 옮겨가게 됐죠. 80년대 말, 산업 구조조정이 엄청나게 일어났어요. 경공업이 정리되면서 새로운 산업으로 바뀌기 시작했죠. 조선업, 자동차산업, 철강업 등의 규모가 커지게 됐습니다. 그런 산업별 규모의 차이가 첫 번째 이유이고요.

그리고 또 하나는 여성은 언제든지 해고당하고 구조조정 돼도 된다는 의식이 있었어요. 부산에서 신발공장이 사라지면서 10만 명이 한 번에 일자리를 잃어요. 그래도 ‘여성은 집에서 애나 보고 살림하면 된다’는 의식에 사회 전체적으로 젖어 있어서 큰 논란이 없었죠. 남성은 20-30명이 해고당해도 사회적인 엄청난 사건으로 주목받았던 것과 비교됐었죠.

여성의 주 역할은 살림과 육아라는 이데올로기가 강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있지만 그때 더 심했습니다. 그래서 여성이 대거 실직당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거죠. 여성은 가계를 챙겨야 한다는 부양가족 논리에서 살짝 비껴있어서 평생 노동을 안 해도 된다는 생각이었죠. 그래서 여성노동자도 평생이 아닌 단기적으로 노동운동을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된 거에요. 반대로 이 시간만 제한적으로 싸우면 된다는 생각과 지금 현실이 너무 형편없어서 분개하는 마음에 여성들이 더 치열하게 싸운 거 같기도 합니다.

당시 신문에서 여성 노동자는 공장 생활이 너무 힘들고 돈도 안 되니 걸핏하면 유흥가로 진입한다고 기사를 낸 일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강력하게 항의했었습니다. 신문사에 다 같이 쳐 들어가서 너희 기사의 증거를 내놔라 추측성 보도하지마라고 항의했고 결국 사과를 받았었습니다.

여성의 싸움은 일제부터 돌아보면 항상 치열했습니다. 물론 남성도 가열차게 싸우긴 했지만 80~90년대 이전의 노동운동의 역사는 여성 노동운동의 역사였다고 셍각해요. 언어나 어떤 투쟁이 그것만 따로 동떨어져서 일어날 수 없잖아요. 어떤 운동이든 계속해서 계승되고 발전되면서 풍부해지고 전국화되고 이러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일제부터 치열했던 여성 노동운동이 없이 전체 노동운동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점이 역사서술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어요. 역사를 일제 강점기부터 따지지 않죠. 하지만 운동이 갑자기 느닷없이 생기지 않잖아요. 그동안 흘러온 결과로 일어나는 건데 여성 노동운동이 지워진 지금의 노동운동사 서술이 많이 아쉬워요. 그런 식의 역사는 모순적이고 현상 밖에 볼 수 없어요.

▲ 기노련의 경우는 어땠나요? 여성 멤버가 많았나요?

물론이죠. 여성 멤버가 숫자는 더 많았어요. 그때만 해도 아직 미싱이나 시다 일을 하는 친구가 꽤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조직이나 남자들이 회장 부회장 하잖아요. 그런 영향으로 기노련도 남성 간부가 더 많긴 했죠.

하지만 여성 노동자 문제를 놓치고서는 이야기가 안 되니깐 기노련도 사회적인 차별 문제를 공부하곤 했습니다.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나 여성 노동자의 생리휴가 문제를 다루곤 했습니다. 여성 차별문제를 많이 문제제기 했었어요. 여성 노동자들이 남성 노동자들에 비해 적은 임금을 받는 것은 부당하고 여성이 결혼하면 무조건 일을 그만둬야 되는 것은 아니다는 목소리도 많이 냈고요. 연애, 결혼에 대한 토론도 꽤 많이 했습니다.

후배 여성노동자들과 그룹토론을 하기도 했었어요. 하루는 여성 노동자들과 인생 그래프를 그렸었습니다. 느슨하게나마 자기 계획을 쓰라고 했던 거죠. 그때 별명이 작은이들이던 20대 여성 후배들이 있었습니다. 투쟁도 잘하고 단체의 핵심이었던 후배들이었는데요. 30살 이후의 계획이 없는 후배들이 몇 있더라고요.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토론을 해보니깐 미싱 일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30살 넘어서는 운동하고 싶지 않다. 30살 이후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 등의 이야기나 나오더라고요. 물론 대놓고 말을 털어놓지는 않았지만, 결혼이 걸림돌이었던 거 같습니다. 구체적인 계획은 없고 막연하게 결혼을 통해 삶을 바꾸고 싶다는 것이죠.

당시 저는 30대 중반이었는데 뭔가 그 이야기가 저처럼, 언니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걸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함께 고민하고 역사를 만들어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저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절규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결혼하고서도 운동할 수 있다는 것을 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거죠. 그리고 동시에 후배들에게 결혼을 통해 삶을 바꿀 수 없다. 끼리끼리 만나서 서로 격려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이야기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모두와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함께 풀어가고 싶었어요.

여성노동자가 사회를 냉철하게 보지 않으면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틸貳틈 시간이었습니다.

▲ 한명희 선생님에게 기독교 신앙은 무엇이었을까요?

저에게 있어서 신앙은 선하게 살도록 인도하는 힘이었습니다. 저는 기도할 때마다 신에게 제 길을 인도해달라고 기도해요. 제가 어떻게 살아갈지 모르니깐 무엇이 되겠다기보다 불확실한 세상에서 더 선하고 바르게 살 수 있도록, 자칫 선하지 않게 살 수 있지만 저를 선하게 이끌어달라고 신에게 요청합니다. 신은 제게 그런 분이거든요,

저를 인도하시는 신으로 인해 더욱더 겁 없이 앞으로 나설 수 있었습니다. 더 큰 고초를 겪으신 예수님이 계시니 제 삶의 고통은 별 거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이 고초가 나쁜 것만이 아니라는 점, 이 고초가 또 다른 은총일 수 있다는 믿음도 제 안에 있었고요.

▲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노동운동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형편없는 대우를 받는 노동자와 함께하는 것은 신앙인의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외면한다면 오히려 큰 잘못을 행하는 셈이지요. 양심의 소리, 신앙의 소리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과 함께 살도록 노력하게 한다고 생각해요. 살다보니 그러지 못할 때가 많아 후회될 때가 있습니다. 제 어깨에 기댈 수 있도록 그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진정한 벗이 될 수 있다면 좋을텐데 그러지 못할 때가 있어 안타깝기도 해요. 하지만 제가 제 삶이 허락하는 만큼 기꺼이 나누며 살고 싶고, 들어주고 싶고, 함께 어깨를 걸고 걷고 싶고, 곁을 내어주고 싶습니다. 신앙에 반하는 삶을 살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습니다. 

▲ 오늘날에도 기독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현장에서 열심히 활동 중인 후배들이 많습니다. 특히 여성 운동가들도 많은데요. 선배로써 격려의 한 마디를 하신다면?

때로 한없는 어려움에 직면할 때가 많을 것입니다. 춥고, 배고프고, 사람들이 몰라주고, 무시당하고요. 하지만 그런 역경이 여러분의 삶을 성장시키는 힘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 어려움은 평생 가지 않을 거에요. 분명 지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이 여러분을 더욱 성숙하게 해줄 것입니다. 그러니 고통 가운데서도 빛을 보고, 빛을 발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고통 가운데 함께 하시는 예수를 기억하면서 이겨낼 수 있다면 분명 다른 행복을 찾고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춥고, 배고픈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굴종하는 삶이 아니라 그 어려움을 이기고 악의 세력과 싸워나가는 것은 분명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한 실천입니다. 그러니 모두 힘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날 페미니즘은 여러 학문과 사회 구조,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와 함께 성 차별적인 고정관념을 향한 시민들의 비판과 수정의 목소리도 더욱 높아지는 추세다. 한명희 선생과의 인터뷰는 진보적이고 개방적이라는 노동운동 또한 이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소외되고 차별받는 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평등 사회를 꿈꾸었던 노동운동의 정신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벗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예수를 기억한다면 우리 또한 여전히 차별받는 여성노동자는 없는지 돌아보고 고난 받는 이들의 곁에 서는 용기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권이민수 simin004@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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