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간도 독립운동을 추동한 캐나다장로회 교회들과 설립자들(1906~1923) ⑶
▲ 조선 성경 번역 위원들. 왼쪽 위로부터, 문경호, 김명준, 정동명, W. D. Reynolds (이눌서), H.G. Underwood(원두우), J. S. Gale (기일), G. H. Jones (조원시), 1900 초반 경, 성경 개정 ⓒGetty Image |
1912년 9월 1일에 조선예수교장로회가 평양 경창리 여성경학원에 회집하여 총회를 조직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립노회를 조직한지 5, 6년 만에 교회가 각처에 많이 세워져서 사무의 양이 방대해지고 복잡해짐에 따라 노회에서 총회 조직에 대한 안건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총회조직위원회가 조직되어 준비를 하고 1912년 9월 1일에 전 노회장 이눌서의 사회로 제1회 총회가 성립되었다.
총회시대에 북간도지역은 처음에는 함경노회, 함북노회에 소속되었으나 1921년에는 간도노회의 성립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산하의 유일한 재외 노회가 되었다.
함경노회(1912~1917) 소속시기
1912년 1월 29일 함경노회가 창립되어 원산 상리 상동예배당에서 제1회로 소집되었다. 1912년, 훈춘 구사평교회가 세워졌다. 이태가 전도하여 3, 4인이 믿게 되어 여러 시험을 거치며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병하 목사가 책임을 맡았다. 같은 해에 의란구남 탕동교회가(1) 세워졌다. 교인 최석화가 지역에 와서 전도하여 새 신자가 증가하여 예배당을 건축하고 김내범목사가 성실하게 노력하여 당회를 조직하였다. 김순문 장로가 책임을 맡았고 박걸, 부두일선교사와 최덕준 목사가 연이어 교회를 섬겼다. 같은 해에 훈춘 마적달교회가 세워졌다. 리동춘이 전도하여 신자가 늘어났으며 배례사선교사와 이병하 목사가 순회하며 시무하였다. 같은 해에 하다문교회가 세워졌다. 리병하 목사가 전도하였으며 배례사 선교사와 함께 섬겼다.
1913년, 합명당교회(하마탕교회)가 세워졌다. 교인 구태선과 계봉우 등 십여 인이 집단으로 와서 거주하는 중에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김내범 목사가 와서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 후에 박걸, 부두일, 배례사(Fraser, Edward J.O.) 선교사와 최덕준 목사가 연이어 시무하고 당회를 조직하였으며 구춘선, 김지송이 장로로 섬겼다. 교회가 성장하는 중에 교우 40여 명이 풍토병(토질병)으로 사망하여 민산해(Stanly H. Martin) 의사가 와서 문제의 원인을 찾았으나 그 후에도 비참하였다.
같은 해에 구세동교회가 세워졌다. 교인 이종식 등 십여 명이 중국인의 토지를 매수하여 마을 이름을 구세동이라 짓고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김내범 목사와 부두일, 박걸 선교사, 김계안 조사가 순회하며 섬겼다. 같은 해에 광제촌교회가 세워졌다. 교인 안극선과 김경필이 교회를 시작하였다. 같은 해에 간도 명동교회에 여전도회가 조직되었고 수처(2)에 교회가 설립되고 정재면조사가 임무를 다하였다.
같은 해에 명신동교회가 세워졌다. 교인 이봉구 등 십여 집의 교우들이 모여들어 예배당을 건축하고 예배를 시작하자 김내범 목사가 교회설립을 하고 당회를 조직하였다. 이봉구, 채원휘, 노종욱이 장로로서 섬겼으며 교우는 200여 명에 이르렀고 부두일선교사와 이하영, 김유목 목사 등이 연이어 섬겼다. 같은 해에 용정시교회 박걸 선교사가 성진 등으로 전도여행을 다녔으며 부두일, 서고도, 배례사 등이 계속 간도에 와서 용정시교회를 섬겼다. 함경노회가 파송한 김내범 전도목사가 용정에 와서 김계안을 장로로 장립하였으며 많은 교회 설립자(3)가 되었다. 그는 강두화, 정재면, 박상룡, 김선관, 황신기, 김여용, 한덕일, 김택근, 이태준, 장석함 등을 장로로 세워 당회를 조직하였다.
1914년, 김내범 목사가 교회(미주 4)를 설립하고 부두일, 박걸, 서고도선교사와 최덕준 목사가 이어서 시무하였으며 당회가 조직되었으며 허상훈 장로가 임무를 담당하였다. 같은 해에 하래성남교회(4)가 세워졌다. 명천교인 김종필이 전도로 교인이 증가하여 예배당을 건축하고 교회를 설립하였다. 김내범 목사와 박걸, 부두일선교사가 순회 시무하였으며 김종필이 장로가 되어 당회를 조직하였다. 1920년 일본군의 경신참변 시 대학살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였다. 그 이후 교회와 학교는 차츰 회복되었다.
같은 해에 칠도구 광암교회가 세워졌다. 신자 이창언, 김용연, 김영옥이 개인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같은 해에 희망봉교회(5)가 세워졌다. 교인 최창규, 채학구가 믿고 조덕관, 박창익이 학교교사로 부임하여 학생들과 함께 예배를 시작하였다. 최덕준 목사가 설립을 하였고 허상훈, 김순문 조사가 시무하는 중에 일본군의 경신대학살 시 토벌대에 의해 교회가 폐지 당하였다.
같은 해에 창강교회가 세워졌다. 박창익(명동교회 교인)이 창강마을의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권하여 예배를 드리는 중 교회가 시작되어 서고도, 박걸 선교사가 교회를 설립하고 최선택 목사가 섬겼다. 같은 해에 영생동교회가 세워졌다. 유우일의 전도로 신자가 많아졌고 중국인의 토지를 사서 개척하는 중 신자들이 각처에서 몰려와서 예배당을 건축하며 마을 이름을 “영생”이라고 명하였으며 김내범 목사가 설립예배를 드렸다. 김택조, 유한풍, 이용권이 장로로 시무하며 당회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에 혼춘(6)에 두도구교회가 세워졌다. 구현문, 이경호가 믿고 교회를 설립하므로 박걸, 서고도 선교사, 박극항 조사가 순회하며 섬겼다. 같은 해에 훈춘 남별리교회가 세워졌다. 모태환이 전도하고 김내범목사가 설립하였으며 최천약, 이명순, 한인준이 집사로 인도자가 되었다. <훈춘한민회> 회장인 이명순이 장로가 되어 당회가 조직되었다. 일본군의 경신대토벌로 한민회 본부와 교회와 마을과 학교가 소실되었으며 최천약(7)과 이명순(8)도 학살당하였다. 같은 해에 훈춘 춘화향 사도구교회가 세워졌다. 이정권, 서윤훈이 믿고 전도하여 교회가 설립되어 최두철, 이영신, 권정해가 집사로 인도하다가 일제의 대학살에 무참하게 파괴당하였다.
1915년,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의 기록에 설립된 교회가 없다. 그러나 <훈춘조선족이민사> 283쪽에 의하면 훈춘현성 서문밖 교회가 세워졌고 배례사선교사와 이병하 목사가 순회 시무하였다. 같은 해에 포은동교회가 세워졌다. 배례사선교사와 이병하 목사사 순회 시무하였다.(9)
1916년, 태양동교회(10)가 세워졌다. 김봉택, 김중흡이 예배를 보다가 신도들이 증가하여 김내범 목사가 교회 설립하고 장로 백용흥, 김여술, 김선관, 조석칠, 곽계순 등으로 당회를 조직하여 섬기는 중에 경신대학살 시에 일본군에 의해 초토화되었다. 교회가 소실되고 완전히 무너졌으나 다시 회복되어 이전보다 부흥하였다.
같은 해에 응조암교회가 세워졌다. 최병주가 이주하여 교회를 설립하고 부두일선교사와 이하영목사가 계속 시무하였으며 정형준이 장로가 되어 당회가 조직되었다. 같은 해에 동불타교회(11)가 세워졌다. 오병원이 수년 동안 혼자 예배를 드리다가 신자가 증가하여 예배당을 건축하고 교회를 설립하였다. 이하영목사가 교회설립예배를 드렸으며 김내범 목사가 시무하며 장로 오병원, 이춘재, 한처은 등과 함께 당회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에 압막동교회(12)가 세워졌다. 최치호 등 십여 호가 이주하여 예배당을 건축하고 김내범목사가 설립예배를 드렸으며 최덕준, 이하영목사가 관리하였고 이춘삼 장로를 장립하여 당회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에 상통납자교회(13)가 세워졌다. 독립투사 황병길이 믿고 전도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개종하여 교회가 설립되었고 박걸 선교사가 순회하였다. 집사 김창건과 정대윤이 교회를 인도하였으며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도 세워져 활기차게 활동하는 중 경신대학살에 일본군의 방화로 교회와 학교가 소실되었다.
같은 해에 지구교회(14)가 세워졌다. 문병철이 믿은 후에 교회를 설립하고 김수경, 황운익이 집사로 인도자가 되었다. 같은 해에 전선촌교회가 세워졌다. 방두원, 한창동, 최문칠 등이 전도하여 개종자가 늘어남에 따라 박걸 선교사가 교회를 설립하고 남녀학교를 세웠다. 한수량을 장로로 세워 당회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에 칠도구에 연수동교회가 세워졌다. 김경일과 김순영이 개척하였고 신자가 증가하여 예배당을 건축하고 박걸 선교사가 설립예배를 드렸고 최선택 목사가 시무하였다.
같은 해에 훈춘 오도구교회가 세워졌다. 리용성이 전도하여 세웠으며 교회를 지도하였다. 같은 해에 용정시교회가 김내범 목사의 노력으로 천여 명이 수용될 만한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같은 해에 민산해가 용정에 와서 <제창병원>을 설립하였다. 같은 해에 <부인전도회>를 조직하였으며 임뵈뵈, 정신태, 김철나가 함께 섬겼으며 활동의 성과가 좋았다. 같은 해에 장백교회가 불신자의 모함으로 중국관헌에게 핍박을 받았다. 관헌들이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성경과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 태웠으며 의복과 기물들을 약탈하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무수히 난타하였다.
1917년, 낙원동교회가 세워졌다. 공리준이 그 마을에 와서 중국인의 땅을 사서 예배당을 건축하여 예배를 시작하였고 김내범 목사가 설립예배를 드린 후에 마을 이름을 낙원동이라고 하였다. 같은 해에 무봉촌교회가 세워졌다. 배용규가 이사를 온 후, 20여 명의 계속 이주하여 예배당을 건축하고 교회를 설립하였으며 최덕준과 김내범 목사가 연속 시무하였다.
같은 해에 청산리 영신동교회가 세워졌다. 이봉섭, 이문섭, 조윤실이 마을에 와서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으며 예배당을 건축하고 박걸선교사가 설립예배를 드렸다. 이사윤, 서인한, 이청춘 등이 연이어 장로직에 시무하였다. 교회가 일본군의 대학살과 중국 마적에게 유린당하고 소실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죽지 않았다.
같은 해에 낙타하교회가 세워졌다. 김계안의 전도하여 설립되었고 이기홍집사가 인도를 맡았으며 교회가 점점 부흥되었다. 같은 해에 훈춘 숭례향에 소홍기하교회(15)가 세워졌다. 배례사선교사와 리병하 목사가 순회 시무하였다. 같은 해에 훈춘 용지향에 송전동교회(16)가 세워졌다. 배례사선교사와 리병하 목사가 순회 시무하였다. 같은 해에 훈춘 용지향에 장성촌교회(17)가 세워졌다. 배례사선교사와 리병하 목사가 순회 시무하였다.
함북노회(1918~1921) 소속시기
함경노회가 설립되고 6년 사이에 많은 교회가 설립되어 노회는 집회와 전도 및 교육활동의 효과와 편리를 위하여 분립의 필요성을 깨닫고 경성 이북과 간도는 함북노회, 명천 이남과 해삼위는 함남노회로 나누기로 결의하여 1917년 9월 1일 승동예배당에서 열린 제 6회 총회에서 분리 승인을 허락받았다. 그 후 11월 20일에 함북노회 조직회로 선교사 3인, 목사 2인, 장로 7인이 용정예배당에 모여서 회장 부두일, 부회장 김내범, 서기 채필근, 부서기 강두화, 회계 매도날 (D. A. MacDonald), 부회계 김약연을 선출하였다. 노회 안에 임사, 재정, 총계, 학무, 헌의, 규칙, 신학, 준시. 시찰 등의 각부를 설치하여 사무를 분담하였다. 함북노회 의안에 나오는 교회 중에 설립된 교회 명단에 나오지 않는 교회 이름이 10여 개가 넘는다.(18)
1918년, 용정시교회에 박영헌목사가 전임목사로 왔다. 선교회가 성경학원을 설립하였다. 같은 해에 최선탁목사가 양무정자교회에 시무를 맡았다. 같은 해에 와룡동교회에 당회가 조직되었고 남인상, 지병학, 이병익, 함주익, 최희중 등이 장로로서 함께 시무하였다.
1918년, 전석동교회가 세워졌다. 안영환이 믿은 후 전도하여 교회가 설립되고 이병극, 김기석이 인도자가 되어 교회가 발전하였다. 같은 해에 청산리 백운평교회가 세워졌다. 권두혁, 박홍식이 와서 근처에 사는 신자들을 모아서 교회를 설립하였고 남녀 전도인들을 세워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였다. 그 후에 일본군의 경신대학살로 인하여 교회가 소실되고 교인들이 참변을 당하였다. 그 후에 참변을 극복하고 점차 복구하였다.
같은 해에 구호동교회가 세워졌다. 김상설, 이옥현 등이 신도 7,8 가족들과 이주하여 예배당을 건축하자 이하영목사가 설립예배를 드렸다. 그 후에 김상목 목사가 시무하며 김상설, 채원휘, 김계홍, 한치훈 등을 장로로 세워 당회를 조직하고 남녀전도인을 세웠으며 예배당을 중건하였다. 같은 해에 옹성납자교회(19)가 세워졌다. 이윤지, 신학봉이 마을에 내주하면서 교인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며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김내범 목사가 교회 설립예배를 들렸다.
같은 해에 장낙동교회(20)가 세워졌다. 문경풍이 마을에 도착하여 땅을 개척하고 인근의 교회들을 모아서 예배당을 건축하고 예배를 드릴 때에 김내범 목사가 와서 교회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에 십리평교회가 세워졌다. 함광실, 홍춘명, 김홍순 3인이 마을에 와서 예배를 시작하였고 교인이 불어나자 예배당을 건축하고 교회를 세워 김유목 목사가 시무하였다. 같은 해에 장백현 동평덕교회 이은경, 이동직조사가 전도하여 진빙, 동작동, 달나자에 각각 예배처소를 세웠다. 같은 해에 장동동교회(21)가 세워졌다. 같은 해에 훈춘 용지향에 삼도구교회(22)가 세워졌다. 배례사선교사와 리병하 목사 순회하며 시무하였다.
1919년에 조선독립운동이 세차게 일어나서 북간도 교회에 직접, 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3.1만세운동 이후 3.13만세운동이 용정시를 중심으로 하여 수만 군중이 열광적으로 모여서 만세를 부르는 중에 중국 군경들의 발포로 말미암아 19명(23)이 죽었으며 구류 감금된 교인이 허다하였으며 교회가 직면한 고난과 시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기타의 교회에도 일본의 탄압과 핍박이 파급되어 교회활동이 위축되었고 전도활동도 약화되었다.
1919년 양무정자교회에서 당회가 조직되어 한덕일, 강군선이 장로로 함께 섬겼으며 문재린 조사가 시무하였다. 1919년에 두도구 간장암교회에 당회가 조직되었다. 만세운동과 국민회 무력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1920년 10월에 일본군의 방화와 대학살의 참변을 겪었다. 교회와 학교가 함께 소실되었으며 30여 명의 교우들이 교회당 안에서 함께 불에 타죽었다.
1919년, 신흥교회가 세워졌다. 이태현의 전도로 7,8인이 믿고 모여서 예배를 드리며 예배당을 건축하자 최덕준 목사가 설립예배를 주관하였다. 후에 김내범 목사가 시무하였다. 같은 해에 중강자교회가 세워졌다. 김관식 목사가 교회를 설립하고 윤동호, 최동빈, 박동섭 집사가 인도자가 되어 지역에 학교도 세웠다.
1920년에 간도 독립군들의 조선 내 빈번한 침투와 봉오동전투 패배에 경악한 일본은 <불령선인초토화계획>을 세우고 경신대학살이 일으켰다. 일본의 약탈과 방화로 청산리 백운평교회의 예배당과 학교가 전소되었고, 간장암교회의 예배당과 학교가 전소되었으며 33명의 교우들이 학살과 불에 타죽었으며 또한 가옥이 불에 탈 때 14명이 즉사하였다. 양정자교회(양무정자) 예배당과 학교가 전소되었다. 용정의 권서인 이근식과 의란, 구혼, 춘남, 별리 등 교회 장로 김문순, 이명순과 교인 50명이 참살되었고 옥에 갇힌 자와 징역형을 받은 자와 나그네 되어 유리하는 자와 행방불명자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24)
장백현교회는 일본경관에게 소실 당하였으며 교인들은 포박을 당하여 중국경관에게 넘겨졌으며 벌금을 내고 풀려났다. 교회가 불에 탄 관계로 이은향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25) 명동교회 중학교실이 소실되었고. 허익근, 박용훈, 최홍택이 학살당하였으며, 김병영은 중국군에게 총살당하였고 한상수, 장성순은 사형을 당하였고 복역자, 구금자가 90여 인에 이르렀다. 장은평교회는 일본군에 의해 교회가 소실되었으며 불에 탄자와 옥에 갇힌 자가 십여 인이고 합마당교회는 가옥 3채가 소실되고 3사람이 피살되었으며 구세동교회는 건물이 소실되었으며 핍박과 고난을 거듭 겪었다. 함북노회에 속해 있는 교회가 겪은 환난은 다 찾아서 일일이 다 설명하기가 어렵다.(26)
1920년, 토성보교회가 분립되었다. 용정교회에서 분립되는 중에 교우가 중국인의 땅을 구입하여 가옥 1동은 예배당으로 다른 1동은 학교로 기부하였다. 강두송 목사가 교회 설립예배를 드렸고 당회를 조직하였다. 김도현, 이광수, 김찬성, 이은경, 신찬선 등이 함께 장로로 시무하였다. 같은 해에 호천포교회가 서창희, 지송암 조사와 김병두 영수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교인이 늘어났다. 같은 해에 용정동산교회가 세워졌으며 리성국이 설립자로 알려졌다.(27) 같은 해에 용정에 룡강동교회가 세워졌다.(28) 같은 해에 두도구교회 관리가 이성국과 최선택 목사에게 맡겨지다.
같은 해에 노두동교회가 세워졌다. 노두동의 신자가 명신교회로 다니다가 분립하여 교회를 세웠다. 이하영과 김유목 목사기 섬겼다. 같은 해에 남양동교회가 세워졌다. 조성극과 임종묵이 함께 예배당을 건축하고 예배드리면서 최덕준 목사가 설립예배를 드렸다. 김내범 목사가 시무하였으며 임종묵이 인도자가 되었다. 같은 해에 합성리교회가 세워졌다. 같은 해에 의란구에 창신동교회가 세워졌다. 최군왕, 김순효가 함께 교회를 시작하였다. 같은 해에 김보국 가족이 모여서 예배하므로 흥신동교회가 시작되었다. 같은 해에 김희순, 김재길 양인이 협력하여 태양동에 교회를 세웠다. 같은 해에 훈춘 덕혜향에 북구교회, 청수동교회, 동강자교회가 세워졌다.(29) 배례사 선교사와 리병하 목사가 함께 설립하였으며 순회, 시무하였다. 같은 해에 훈춘 마가점에 마가점교회가 세워졌고 리용성이 지도하였다.
함북노회 소속시기에 남녀소학교를 설치한 교회 명단에 형납자교회, 은동자교회, 동구교회가 나오는데 이 교회들은 설립교회 명단에 이름이 없으므로 확인이 필요하다.
간도노회(1921년~1923년) 소속시기
1921년 10회 총회에서 회령과 성진시찰구역이 함북노회로 조정되고 간도일대는 간도노회로 독립하였다. 1902년 구례선이 홍순국과 함께 함경도를 경유하여 간도와 해삼위에 전도를 시작한 이래로 중국인 싼진 선생, 김문삼 조사와 업아력(A. F. Robb)선교사, 김계안 조사와 부두일, 박걸선교사 등과 김내범 목사가 열심히 복음을 전하여 신자가 늘어나고 교회가 부흥하였으므로 총회에서 승인을 받아 1921년 12월 1일 토성보예배당에서 모여 간도노회가 조직되었다.(30) 선교사 2인, 목사 5인, 장로 10인이 참석하였으며 회장에 김내범 목사, 부회장에 배례사선교사, 서기에 문재린 장로 부서기에 허상훈 장로, 회계에 강두화 목사, 부회계에 박걸 선교사를 선출하였다.(31)
1921년 11월에 훈춘 경신향에 서가산교회가 세워졌다. 리병하목사와 배례사선교사가 순회하며 시무하였다.(32) 1922년, 훈춘현 덕혜향에 중구교회가 세워졌다. 리병하목사와 배례사선교사가 순회하며 시무하였다.(33) 같은 해에 포은동교회가 경흥읍에서 분립되었다. 교인 선우화와 고중광이 경흡읍교회에 오가며 예배를 드리다가 포은동에 교회를 건축하였다.(34) 같은 해에 간도노회에서 용정에 있는 전 <삼국전도회> 건물을 용정교회에 기부하기로 결정하였다.(35)
1923년, 용정현에 팔가자교회가 세워졌다.(36) 같은 해에 훈춘 춘화향에 서북구교회가 세워졌다. 리병하 목사와 배례사선교사가 순회하며 시무하였다. 같은 해에 훈춘 용지향에 사소봉교회가 세워졌다. 리병하 목사와 배례사선교사가 순회하며 시무하였다. 같은 해에 훈춘 덕혜향에 라권구교회가 세워졌다. 리병하 목사와 배례사선교사가 순회하며 시무하였다.(37)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하권의 간도노회의 1921년, 1922년, 1923년 노회의안에 나오는 교회 명단 중에 하강포교회, 구수허교회, 순도구교회, 육양동교회. 남구교회, 잠빗골교회, 계림촌교회는 설립된 교회 명단에 없었던 이름으로 설립교회 명단에 실수로 누락된 것인지 아니면 의안에 잘못 기재된 것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이상으로 1906년에서 1923년까지 북간도에 세워진 교회이름과 설립자, 장로, 목회자, 선교사들의 이름을 살펴보았다. 18년 동안 그들이 협력해서 세운 교회가 무려 92개나 된다. 여기에 에는 명동교회여전도회가 정재면조사와 함께 개척한 “수처”교회가 포함되지 않았으며 또한 노회 의안에서 언급된 21개교회도 포함되지 않았다.
당시 교회는 당회가 있는 조직교회와 당회가 없는 미조직교회와 전도 초기 단계에 세워진 작은 기도처로 구성되어 있었다.(38) 일본군이 경신대학살을 자행한 후에 교회 방화에 대한 비난에 직면하자 교회가 아니라 “곳곳에 있는 모옥”(39)을 소각했다고 말하였는데 그 것이 바로 기도처교회였다.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에 발간한 <종교사> 152쪽에 보면 1922년 캐나다장로회 교회는 조직교회 30개, 미조직교회 57개, 기도처 28개로 총 115개로 나온다. 본 글에서 계수된 92개라는 숫자가 과장이 아니고 거의 사실에 부합하다는 말이다. 포은동교회를 비롯하여 몇 개의 교회 이름이 본 글에서 중복되고 있지만 앞으로 계속 노력하여 20여개의 이름을 더 찾아내야 한다.
미주 |
(미주 1) 연변문사자료 제8집 119쪽에 의하면 탕동교회는 의란구교회이다. 의란구에는 의란구남교회, 의란구북교회가 있었다고 한다. (미주 2) 서굉일의 책, <북간도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암 김약연 선생> 198쪽은 1911년부터 3년간 열성적으로 전도한 결과 36개의 교회가 개척되었다고 하나 교회 이름이 없다. (미주 3) 김내범목사가 많은 교회를 혼자 개척해서 세웠다는 뜻이 아니다. 교인들이 개척해서 시작한 교회를 캐나다장로회에 등록하고 공식적인 교회로 출범시켰다는 뜻이다. (미주 4) 양전백·함태영·김영훈 / 이교남 옮김,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 359쪽. 설립된 교회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이름이 빠지게 된 것이 함경노회 노회록의 실수인지,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의 편집과 번역 과정의 실수인지 알 길이 없다. (미주 5) 호이전·문홍복, <연변문사자료 제8집, 종교사료전집>, 119쪽은 혜례성남교회로 표기하고 있다. (미주 6) 호이전·문홍복, <연변문사자료 제8집, 종교사료전집>, 119쪽은 희망동교회로 표기하고 있다. (미주 7) 혼춘은 훈춘과 동일지명이다. (미주 8) 최학천 학살에 대한 기록은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 361쪽에 나온다. (미주 9) 이명순의 학살에 대한 기록은 김연옥이 번역한 <조선군사령부 간도출병사>, 55쪽에 나온다. (미주 10) 최석숭, <훈춘조선족이민사>에는 1915년에 세워진 교회로 서문밖교회, 포은동교회, 구사평교회, 금당촌교회, 옥천동교회, 두도구교회가 나온다. 그러나 연변에서 나온 <종교사료전집>과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에 구사평, 금당촌, 옥천동, 두도구교회 설립된 해가 분명하므로 본 글에서는 서문밖교회와 포은동교회만 1915년에 설립된 교회로 정리하였다. (미주 11) <연변문사자료 제8집, 종교사료전집>, 119쪽에 의하면 대양동교회이며 설립자가 박리섭으로 나온다. (미주 12) <연변문사자료 제8집, 종교사료전집>, 119쪽에 의하면 동불사교회이며 리하원이 설립자이다. (미주 13) <연변문사자료 제8집, 종교사료전집>, 119쪽에 의하면 회막동교회이며 리춘삼이 설립자이다. (미주 14) 황병길이 연해주에서 돌아와 거주를 시작하여 만든 조선인마을 연통라자이다. (미주 15) <연변문사자료 제8집, 종교사료전집>, 119쪽에 의하면 관지골교회이다. (미주 16) 훈춘 숭례향의 소홍기하교회는 최석숭의 <훈춘조선족이민사>, 284쪽에 나온다. (미주 17) 훈춘 용지향의 송전동교회는 최석숭의 <훈춘조선족이민사>, 284쪽에 나온다. (미주 18) 훈춘 용지향의 장성촌교회는 최석숭의 <훈춘조선족이민사>, 284쪽에 나온다. (미주 19)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581쪽에 나오는 1917년 11월 함북노회가 허락한 장로에 관한 문건에 시거우교회, 로구산교회가 나온다. 이교회들은 설립된 교회 명단에 나오지 않으므로 누가 언제 어디에 세웠는가를 밝혀야 할 것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582 쪽에 나오는 관도거우교회, 의랑거우교회 583쪽에 나오는 천보산교회, 586쪽에 나오는 장인강교회, 남양천교회, 588쪽에 나오는 구호동교회. 589쪽에 나오는 황거우교회 591쪽에 천동교회, 592쪽에 나오는 동불사교회, 593쪽에 나오는 옹성나자교회, 잠박골교회, 치도구교회, 달나자교회, 창동교회도 언제 누구에 의해서 어디에 세워졌는지 반드시 짚어야 할 것이다. (미주 20) 룡섬매자교회이다. (미주 21) 장동동교회는 연변문사자료 8집 119쪽에 나온다. (미주 22) 용지향에 삼도구교회 설립은 훈춘조선족이민사 284쪽에 나온다. (미주 23) 19명은 <3.13>용정만세시위 시 중국군경들의 발포로 현장에서 즉사한 10명(박상진, 정시익, 공덕흡, 김태균, 김승록, 현봉률, 리균필, 박문호, 김흥식, 장학관)과 병원에서 사망한 4인(최익선, 현상로, 리유주, 차정룡)과 장례식 후에 사망한 5명(김병영, 채창헌, 김종묵, 원용서, 허준언)이다. (미주 24)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612, 613쪽은 3.13만세운동으로 1920년에 간도지역 당한 참변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핍박을 당한 일부 교회의 기록에 불과하다. (미주 25)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613쪽. (미주 26) 같은 책 614쪽. (미주 27) 정협룡정현문사자료연구위원회 편, <룡정문사자료 제2집>, 154쪽; <연변문사자료 제8집, 종교사료전집>, 119쪽. (미주 28) 정협룡정현문사자료연구위원회 편, <룡정문사자료 제2집>, 154쪽. <연변문사자료 제 8집, 종교사료전집>, 119쪽. (미주 29) 최석숭, <훈춘조선족이민사>, 284쪽. (미주 30)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678쪽 (미주 31)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678쪽. (미주 32) 최석숭, <훈춘조선족이민사>, 284쪽. (미주 33) 최석숭, <훈춘조선족이민사>, 284쪽. (미주 34) 포은동교회,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685쪽; 최석숭, <훈춘조선족이민사>, 283쪽에 나오는 포은동교회와 동명이므로 설립상황이 다르므로 기록은 했지만 설립된 교회 숫자 계산에는 포함시키지 않았음. (미주 35) 삼국전도회 자산에 대한 기록. 건물이 용정에 있으며 노회에 기부한다는 내용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680쪽. (미주 36) 김춘선, <중국조선족사료전집 철학종교편 2권>, 486쪽. (미주 37) 최석숭, <훈춘조선족이민사>, 284쪽. (미주 38) 류병호, <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 6. 종교사>, 152쪽. (미주 39) 김연옥 역, <조선군사령부 間島出兵>, 105쪽. |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