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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을 위한 회복적 정의 첫 출발

기사승인 2021.01.20  14:5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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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복적 정의’에 근거한 회복적 교회 그리고 장애인 ⑶

▲ 바디매오를 치유하시는 예수 ⓒGetty Image

회복적 정의는 급진적 사랑radical love이다

예수는 회복적 정의 활동가로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과 인간의 조우를 통해 직면하셨다. 그가 직면한 것은 인간의 피해들 즉, 죄sin, 고통, 상처, 죽음이다. 회복적 정의는 급진적 사랑으로써, 둘을 하나(不二門)로 해체deconstruction 하고, 하나님과 인간 신(예수), 생명과 죽음, 죽음과 부활, 승천과 재림 등의 이분법적 범주들에 도전하고, 그것을 해체하고, 경계선을 넘고 없애는 급진적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다. 신과 인간, 삶과 죽음, 중심과 주변, 시작과 끝, 무한과 유한, 처벌과 용서 등의 이분법적 범주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너져 하나가 되었다.

유대인과 헬라인, 자유인과 종, 남자와 여자, 어른과 어린이가 예수님의 급진적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됨(갈라디아서 3:28).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는다 - 구원이 죽음 후에 하늘나라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 땅, 삶속에서 ‘나라’(바실래이아- 왕국, 통치, 법정 등과 같은 어원).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구원의 세상이고, 회복적 정의(changing lenses) 실현이며, 천국과 회개가 연결되는 메타노이아(change thinking)와도 맥을 같이 한다.

가해자, 피해자로 구별하는 것 보다, 피해, 고통, 고난에 함께 하여 시작과 마지막을 함께 하고 처벌과 용서에 대해 자발적 정체성을 찾아내, 내면의 하나님을 만나게 하여, ‘특이한 사람들’로 초대 기독교인들의 별칭을 갖게 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어둠 가운데 ‘기이한 빛에’ 들어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회복적 정의는 예수의 정의로써, 민중신학, 해방신학(차별. 억압이란 피해로부터의 해방), 여성신학, 흑인신학, 장애인신학, 난민신학, 이주민신학-거류민의 신학, 고령화노인신학, 퀴어신학(동성애:이성애, 여성:남성의 이분법적 범주를 깨고 독특한queer 것으로 회복을 기대), 관계신학(타인과 상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인식함) 등과도 연결이 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적 접근 보다는 피해, 고통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회복적 욕구와 필요(자발성, 참여, 관계, 정의, 공동체, 안전과 평화)를 찾아가는 과정이기에 그렇다.

회복적 정의와 장애인

회복적 정의는 하워드 제어의 이미지처럼 ‘CHANGING LENSES’ 즉, 피해자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고, 이는 가해자, 소위 권력자들이 인간적 탐욕, 진노,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성경 또한, 회개를 외치면서, METANOIA(= CHANGE + thinking)을 설파한다.

공관복음서에 ‘예수 말씀’ 중 마태복음의 첫 번째 말씀이 ‘정의를 선포’한 것이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정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3.15)고 하셨다. 여기서 세례 요한과 예수님 간에 직면을 통해, 예수께서 세례 의식을 수용함으로써, 요한파와 예수파가 대립이 아니라 하나가 되면서 정의를 이루는 모습이 보여준다. 그리고  예수님의 첫 번째 설교인 산상수훈에서도, “정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다.”(6절), “평화를 만드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 자녀라 불릴 것이다.”(9절)고 말씀하신다.

예수의 행동과 말씀(언. 행. 삶의 일치)은 ‘직면’을 중시함으로써, 그곳에서 메타노이아metanoia/change + knowing가 일어난다. 직면, 만남. 사건의 전환이 구원사적 사건이다.

장애인 인권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장애인 노들야학 박경석 교장이 몇 해 전 NCCK인권센터가 주는 인권상 시상식에서 수상소감으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의 전환은 장애인을 만나보고, 또 만나 보면서 서로 이해하는 관계로 전환될 때 전환이 온다”고 말했다. 그 만남 속에 성령의 역사가 전환이 일어난다는 이야기이다.

예수와 피해 당사자 장애인과의 직면 이야기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와 장애인의 직면은 마태복음 9장에 네 가지 유형의 장애인들이 나온다, 침상에 누워있는 중풍병자, 열두 해 혈루증을 앓는 여인, 두 명의 맹인, 귀신들린 농인이다.

예수와 만나는 장애인의 모습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한쪽은 예수가 먼저 직면을 시도했고, 다른 쪽은 장애인 피해 당사자가 먼저 직면을 시도했다. 예수가 먼저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시고 죄 사함을 선포하고. 귀신들린 농인인과 직면하게 되니 귀신이 쫓겨나 장애가 극복되어 말하는 능력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혈루병 걸린 여인은 자신의 믿음으로 예수 겉옷을 만져 구원을 받게 되었고, 두 맹인은 예수에게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대로 되어 눈을 떠 볼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다.

예수와 장애인인 피해 당사자 간의 관계가 ‘믿음 안에서 죄 사함으로 인한 구원’, 즉 관계 회복이 되어 그들은 당시 공동체로의 회복도 가능해졌다. 예수와 장애인들의 만남, 직면은 상호 존재로의 만남이었다. 당시 율법이라는 비인간적 사회적 잣대로 인한 차별 세상에서, 예수가 장애인들을 존재 그대로 인정하여 직면하면서, 그들의 장애로 인한 피해와 고통을 공감하시었기에 관계 회복과 공동체로의 회복. 그리고 하나님의 정의가 그들의 삶속에 회복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 마태복음에서는 피해 회복을 간절히 소망하는 장애인 당사자들을 통한 예수에 대한 믿음 그리고 죄 용서와 구원이란 교리적 접근을 하고 있다.

한 가지 더, 마가복음 10장 46절~52절에 보면, 예수께서 많은 무리와 제자들과 함께 여리고지역에 이르렀을 때, 바디매오라는 맹인이 예수가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긍휼히 보소서”라고 큰 소리로 외친다. 예수와 직면을 간절히 바라고 있지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잠잠하라” 하고 말하면서 예수와의 직면을 방해한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이에 굴하지 않고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긍휼히 보소서”라고 다시 외친다. 이때 예수께서 그 자리에 머물러 서서, 바디매오와 직면하기를 원하신다. 바디매오가 예수께 나오자. 예수는 “무엇을 너에게 해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신다. 그는 “랍비여, 보기를 원합니다”고 말한다. 볼 수 없는 피해는 바디매오로 하여금 모든 인간관계를 깨뜨리고, 이스라엘 공동체에 구성원으로 참여 또한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당시의 율법 밖에 사람으로 회당과 성전에도 범접할 수 없는 철저한 차별과 소외로 인해 온갖 고통과 아픔이 그의 몸과 마음에 영적으로 실존적으로 박혀 있게 하였다. 이런 바디매오의 적극적 직면의 노력이 그를 구원했다고 예수는 말한다. 즉, 바디매오는 가족과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회복이 가능해져 그의 삶에 하나님의 정의가 회복되는 샬롬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요즘 장애인 인권운동은 모든 차별로부터의 억압에서 벗어나 해방을 맛보기 위해 무엇보다 ‘장벽 제거barrier free’를 강조하는데, 마가복음에 나타난 맹인 바디매오는 예수와의 직면을 가로막고 있던 그 당시 주변인들의 ‘잠잠하라’는 강요를 거부함으로써, 회복적 정의의 첫발을 딛게 되었다. 회복적 정의의 렌즈는 피해자의 고통과 아픔, 상처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황필규 위원장(NCCK 장애인소위원회) kncc@knc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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