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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노련의 시작은 ‘노동자 문학의 밤’

기사승인 2021.01.18  16: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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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명희 기노련 초대 사무총장을 만나다

▲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노동운동은 공안사건이었다. 이런 엄혹한 분위기에서도 기독 노종자들이 주체가 되어 노동운동을 이끌어야 한다는 신념 아래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을 건설하는데 앞장섰던 한명희 기노련 초대 사무총장 ⓒ권이민수

80년대 민주화를 향한 치열한 투쟁 속에 함께했던 기독인 노동자들이 있었다. 바로 기독인 노동자들이 주체적으로 만든 단체인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이하 기노련)이다. 그러나 기노련은 다른 단체에 비해 많은 이들에게 낯설기만 한 이름이다. 그래서 에큐메니안은 기노련의 활동을 조명하고 당시의 상황을 독자들에게 전해보고자 기노련에서 활동했던 민주화 투쟁의 선배들을 찾았다. 첫 번째 주자는 기노련 초대회장으로 활약했던 유동우 소장이었다. 그는 기노련 이전의 치열했던 노동 운동의 역사, 기노련의 활동 등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줬다.(관련 기사: 「유동우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 초대 회장을 만나다」, 첫 번째 기사, 두 번째 기사) 두 번째는 기노련 창립에 큰 역할을 한 신철영 선생이었다. 그는 기노련 창립 과정과 당시 기독교가 처한 상황을 세세히 나눠줬다. (관련 기사: 「기노련 탄생의 산파, 신철영 선생」, 첫 번째 기사, 두 번째 기사)

이번 기사에는 신철영 선생과 함께 기노련 창립을 주도하고 기노련 사무총장, 서울 기노련 초대회장으로 활발히 활동했던 한명희 선생과의 인터뷰를 담았다.

2021년 1월 13일 한명희 선생과의 인터뷰를 위해 만난 장소는 서울 염창역 근처의 한 패스트푸드점이었다. 패스트푸드점은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로 인해 갈 곳이 없어진 사람들이 모여들어 시끌벅적 했다. 그러나 차분한 목소리로 전하는 한명희 선생의 기노련 이야기는 소음으로 막을 수 없는 감동이 있었다.

기노련의 시작과 활동 과정에 있던 어려웠던 지점들. 그리고 교회와 교회 노동자를 향한 한명희 선생의 열정은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인들에게도 큰 도전이 될 것으로 보인다.

▲ 에큐메니안 독자님들께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독자님들 안녕하세요. 한명희입니다. 자기소개는 하기 나름일텐데요. 저는 ‘부드럽고 끈질긴 사람’입니다. 동료들에게는 참 따뜻하고 소탈한데요. 노동자와 같은 약자에게 불합리하고 억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힘 있는 자가 있다면, 저는 그들과 굉장히 가열차게 싸우거든요. 누가 그러더라고요. “아니 그렇게 노동운동한 것이 옛날인데 넌 지금도 투사다!”(웃음) 의지의 한국인? 불굴의 투지? 이런 열정이 많아요. 일에 대한 열정, 사람에 대한 열정이죠.

▲ 기노련 합류 전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콘트롤데이타에서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노동운동을 시작했어요. 저에게 기질이 있었어요. 부당한 것을 보면 못 참고 싸우는 기질이요. 제가 야간 고등학교 다니면서 취직을 했었어요. 그런데 3번이나 직장을 바꿨어요. 사장한테 대들고.(웃음) 불평등하고 부당한 것을 참지 못했던 거죠.

콘트론테이타에서는 이런저런 일을 했어요. 처음에는 단순 노동을 하다가 나중에 검사도 하고, 수리도 하고요. 몇 년쯤 다니다보니 그만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제가 특이한 성격이 있는데 튀어야 사는 면이 있어요. 그런데 돌이켜 보니 제가 너무 조용히 공장에서 생활했더라고요. ‘아! 내가 공장을 그만두더라도 나라는 사람을 좀 보여주고 나가야겠다’ 이런 생각이 느닷없이 들었어요. 그래서 반장 시험을 봐서 반장이 돼요. 그리고 반장이 되기 2~3일 전에 노조 대위원 선거에 나가서 대위원도 돼요.(웃음) 선배가 “너 나가볼래?” 하고 추천해서요. 대위원이 되자마자 선배한테 내일 모레 반장이 된다고 했더니 선배가 화를 내더라고요. 왜 말을 안했냐고요. 당시 노조는 어용 노조 비슷했거든요. 선배가 어용노조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조직의 변화를 주려고 저에게 대위원을 권했던 거였어요. 노조대위원은 노조 간부가 되는 과정이거든요. 그런데 반대로 반장들은 노조에 협조적이지 않았고요. 그러니까 반장될 사람을 노조 대위원에 뽑은 격이니 선배가 화가 난 거예요.

그래서 전 선배한테 “난 상관없다. 반장보다 난 대위원이 되고 싶다”라고 답했어요. 그러니깐 저는 노조가 하고 싶었던 거죠. 그렇게 대위원이 된지 석달만에 또 부대표가 돼요.(큰 웃음)

저는 반장도 하고 노조 대위원도 했어요. 물론 반장보다 노조를 더 열심히 했죠.(웃음) 그래서 석달만에 노조 부대표가 된 거고요. 원래 노조 대위원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아요. 그런데 회사가 알고 발칵 뒤집혀 졌죠. 처음에는 회사가 저를 데려다가 윽박지르고 화를 냈어요. “반장 시켜주면 반장 잘한다더니 화장실 들어갈 때 맘 다르고 나올 때 맘 다르냐!”고요. 그러면 그럴수록 저는 노조에 가서 폭로하고 그래서 난리가 나고 그랬죠. 그랬더니 나중에는 안 건드리더라고요.

반장은 다른 색 작업복을 입어요. 다국적 기업이 색깔로 차별을 조장한 거죠. 색깔을 통해서 분리정책을 쓴 건데요. 저는 다른 색의 작업복을 입었지만 끊임없이 노조 일을 했어요. 결과적으로 나중에는 반장임에도 노조운동을 가장 치열하게 한다는 인정을 받게 돼요. 마지막 문 닫을 때는 한 1년 정도 노조위원장 직무대행도 해요. 조합원의 신임이 대단했어요. 그러다 콘트롤데이타 철수 사건이 일어나고 전두환 정권 최초의 9박 10일 파업도 해요. 저희가 쟁의행위금지법으로 파업을 할 수 없는 회사에요. 미국의 방위산업체거든요. 그래서 더 난리가 났었죠. 그 때는 제가 겁이 없었어요.(웃음) 저는 ‘감옥에 가도 3년 밖에 더 살겠어? 감옥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겠지’라며 낙천적으로 생각했어요. 결국엔 감옥엔 못 가보고(웃음) 구류만 여러 번 살았지만요. 집회하고 가두시위하다 많이 끌려갔었는데 서울 시내 25개 경찰서 중에 나중에 세어보니 한 21군데 정도 돌아다니면서 조사를 받았더라고요. 경찰서를 내 집 드나들 듯이 살았던 거죠. 하지만 후회는 없어요.

▲ 기노련 창립에 어떻게 합류하게 되신 건가요?

기노련 이전에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가 있었어요. 저도 거기 멤버였죠. 그런데 그 내부를 들여다보니 노동운동 조합 대표들이 쫙 모여 있더라고요. 물론 그래서 좋은 점이 있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굳이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한꺼번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 곳에서 분화되어 나오면서 교회 노동자를 모아 조직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기노련을 만들게 됐죠. 기노련 창립을 논의하면서 교회라는 틀을 통해 아직 의식화되지 않은 노동자를 모을 계획을 세웠어요. 약 7개 정도의 교회를 모았죠. ‘산업전도회’라고 해서 직장 다니는 청년회를 따로 구별한 교회가 있었어요. 공장에 다니는 청년을 위한 청년회였죠.

도림교회, 용산교회, 무학교회, 연동교회, 양평동교회, 그리고 지금은 성문밖교회로 이름이 바뀐 노동교회 등의 교회 노동자들이 모였는데요. 이 사람들한테 단체를 만들자고 하면 놀랄 수 있으니(웃음) 그냥 가끔 만나서 노동자 문학의 밤을 하자고 권유했어요. 당시에는 여기저기서 문학의 밤을 했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11월 달 노동자대회를 겨냥해서 첫 행사를 준비하게 됐어요. 그게 85년 말이었죠.

한 달 정도 모여서 누구는 시낭송, 누구는 웅변, 누구는 연극, 뭐 이런 식으로 문학의 밤을 준비했어요. 그렇게 한 달 정도 준비해보니 좋더라고요. 그 때 한 600-700명 정도 모였어요. ‘우리가 모이니 힘이 되는구나’라는 사실도 깨닫게 됐고요. 그래서 기노련을 만들게 됐습니다.

후에는 광주전남, 인천, 수원 등 각 지역지부도 생겼죠. 광주전남 지부 같은 경우는 기노련이 교회에 갇히지 않은 덕분에 사건이 생기면 성명서 내고 시위하고 교회 단위만이 아닌 지역 내 사회운동단체랑 연대하고 다양한 활동을 했었어요. 전국 기노련도 ‘전국노동운동협의회’ 같은 범 사회운동과 연대했고요. 정말 못할 일이 없었어요.

▲ 기노련은 목회자 중심의 기독교 노동운동이 아닌 노동자 중심의 주체적인 노동운동단체인데요. 어떻게 노동자 주체적인 단체를 준비하게 된 건가요?

당사자가 해야지 더 치열하고 능동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어요. 당사자가 중심이 됐을 때 보다 많은 사람이 참여하고 굴절되지 않은 자기 목소리를 낼 수도 있고요. 신앙고백을 하면서 한편으로 노동운동을 온전하게 하는 게 신앙을 깊고 바르게 실현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도 냈었어요. 처음엔 산업선교회 도움을 받긴 했지만 실제 기노련 사업을 결정하고 비전을 설정할 때는 우리 스스로 할 수 있었습니다.

한동안은 민중교회 목사님과 갈등이 있기도 했어요. 이유는 민중교회 노동자를 빼서 기노련 활동을 참여시킨다는 이유였습니다. 목회자들은 곤혹스러워했던 거 같아요. 기노련 활동에 바빠서 교회 활동을 소홀히 할까 봐요. 교회에서 뭐 좀 하려고 하는데 노동자가 없으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정말 기노련 때문에 교회 활동을 소홀히 했겠어요? 오히려 그런 친구들은 기노련 행사에 잘 안 왔어요. 그런 친구들은 시위한다면 잘 오긴 했지만요.(웃음) 그래서 목회자들이 기노련 활동으로 노동자들이 죄다 휩쓸릴까봐 기노련에 못 가도록 통제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전 “목사님들이 노동자를 교회 안에 가두는 것은 좋지 않다. 노동자들이 교회 안에서 자기 신앙을 밝히듯이 시위나 집회 공간에서도 목소리를 내야 한다. 노동자들이 교회에서 해소되지 못한 것을 기노련을 통해 풀어낼 수 있는데 왜 협력하지 않느냐?”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렇게 갈등을 빚기도 했죠.

각지에 기노련 지부가 생기면서 후에 서울도 서울 기노련을 만들었어요. 서울 노동자도 규합할 필요가 생겨서요. 제가 초대회장을 맡았었죠. 그렇게 기노련 사무총장과 함께 겸임했었는데요. 제가 서울 기노련 회장을 목사님들과의 갈등 때문에 1년 이상 옥신각신하다가 그만두게 됐어요. 갈등이 생겨서는 기노련 발전에 안 좋을 거 같다는 판단이 들어서요. 그래서 사퇴했고 그 후에 여성 노동자 운동을 하게 됐죠. 

▲ 선생님께서 기노련에서 하신 활동들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기노련의 가장 큰 특징은 교회를 활용해서 노동 대회를 할 수 있었다는 점이에요. 86년 1년 동안 집회를 총 13번 했죠. 약 1달에 한번 이상은 한 셈이에요. 참가자도 많을 때는 2천명 이상, 적을 때에도 최소 700~800명 이상 모였어요. 노동운동에 어마어마한 기여를 한 거죠.

집회를 열면 기독 노동자만 모이는 게 아니라 숨어 있던 여러 노동자들이 다 왔었어요. 노동운동에 기여한 대학생들도 모였고요. 왜냐하면 집회는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노동자들이 집회에 와서 무슨 소리를 해도 좋으니 다 하게 내버려뒀었어요. 엄청난 토론장이 열리곤 했죠. 말이 집회지 정치 토론장 같았어요.

2시간 집회를 한다면, 30분 정도는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웅변, 노래 등 앞 풀이 시간을 가졌어요. 그리고 제가 여는 말을 하면 분위기가 띄워졌죠. “오늘 이 자리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털어 놓는 자리다. 하고 싶은 말을 다 내놓고 이야기하자!”고 하면 시작됐어요.
 
사회주의 연맹 노동자들, 제헌의회 주장하는 노동자들 등 온갖 사람들이 다 집회에 와서 자기 나름대로의 목소리를 냈어요. 참석한 노동자로 하여금 자유롭게 목소리를 다 내게 한 것은 참 좋았던 거 같아요. 저마다의 생각은 달랐지만 서로 공유하고 토론하고 논쟁하면서 ‘아 저런 목소리를 내는 구나’하고 알게 되기도 했고요.

노동자집회 하면서 고마왔던 것은 산업선교회, 노동교회 목사님들이 허용해준 것이에요. 또 신철영 선생님이 공감해주고 의기투합해줬죠. ‘지금 시점에 노동자들이 거리에서 잠깐씩 외치는 것뿐 아니라 집회 공간을 통해 충분히 서로간의 다른 목소리를 외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 분열된 목소리라도 그 자체로 끄집어내서 분열을 성숙하게 만들면 통합될 수 있다’는 의견이었어요.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노동자의 해방이라면 그런 큰 틀까지 가는데 있어 서로간의 작은 차이들은 충분히 녹아내고 통합할 수 있다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었죠.

산업선교회 초창기 목사님들은 이런 집회를 반대하기도 했었어요. ‘단체를 조직하라고 했더니 왜 일회용 집회만 하느냐’고요. 기노련이 기대했던 소모임이 아닌 뻥뻥 터트리는 큰 집회 위주의 활동을 하니깐요. 그런데 제가 콘트롤데이타에서 활동하면서 큰 총회, 전체 회의를 통해 많은 걸 느꼈기 때문에 집회 중심의 기노련 활동은 제 경험과도 맞아 떨어졌던 것 같아요. 그러나 목사님들은 아니니깐 목사님들께 교회 안에서 쓰잘대기 없는 과격한 얘기만 나오게 하느냐고 야단도 많이 맞았었죠. 물론 그때 당시 과격한 소리인 것은 맞았어요.(웃음)

분명 뜬금없는 소리가 있었죠. 하지만 말의 아귀가 안 맞아도 그런 이야기를 쏟아낼 수 있는 집회 공간이 필요했어요. 다른 목소리도 경청하기도 하고 반박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집회가 굴러간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87년 6월 항쟁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에요. 마치 넥타이부대가 다 한 것처럼 역사에 쓰였지만 노동자들이 스스로 노동자라고 붙이고 나온 것은 아니었을 거잖아요. 아마 절반 이상은 노동자였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노동자인 저도 나갔으니까요. 마치 노동자는 안보였고 넥타이부대만 신선했다고 생각하곤 하는데요. 넥타이도 사실 사무직 노동자잖아요. 그들을 노동자로 사회가 명명하지 않았을 뿐이죠.

그 이전에 넥타이는 못됐지만 티셔츠나 난방 입고 뛰어다닌 노동자들이 있었어요. 학생과 넥타이 사이에 끼어있던 노동자가 많았는데 역사 속에서 지워졌어요. 노동자의 기여는 한 줄도 없죠. 전 잘못 쓰였다고 주장했는데 이미 쓰여서 어쩔 수가 없었죠.

그런 운동의 바탕을 이루는데 기노련도 분명 기여한 바가 있다고 생각해요. 각 지역의 노동운동에 기노련 활동가들이 다 흩어져 활동했어요. 물론 딱 기노련의 성과라고만 할 수 없지만 각 지역에서 시너지를 내는데 기여한 바가 있어요. 특별히 기노련은 자기가 위치한 광주 무등교회, 서울 무학교회, 연등교회 등에서 일어났었어요. 기록되지 않았을 뿐이지 기독노동자들이 새로운 노동운동의 길을 열어준 것은 명확해요. 그때 만났던 친구들 중에 여럿은 여러 사회운동 속에서 지금도 활약 중이죠.

기노련에서 활동한 선배 기독운동가들을 인터뷰하다보면 동일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 바로 ‘기노련 활동에 대한 자부심’이다. 기독 노동자 주체적인 단체를 준비하고 운영하면서 겪는 어려움이 분명 존재했지만, 그 어려움을 넘어서기 위해 애쓴 이들의 노력은 기독 노동자의 삶을 바꾸고 한국 노동 운동에 큰 기여를 하게 했다. 비록 역사에 화려하게 기록되진 못했지만 사회의 빛과 소금으로 그 역할을 다한 기노련은 오늘날 사회 곳곳에서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려는 기독인 후발주자들에게 큰 귀감이 된다.

한명희 선생은 기노련 뿐만 아니라 여성 노동운동계에서도 많은 활동을 해왔다. 여성 노동자들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음에도 남성 중심적인 노동운동이 되게 된 상황과 한명희 선생의 생각과 의견은 다음 기사를 통해 만나볼 수 있을 예정이다.

권이민수 simin004@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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