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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힌 담(겔 37:15-23; 엡 2:11-22; 마 12:22-32)

기사승인 2021.01.14  23: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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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현절 둘째주일(2021.1.17.) 여신도회주일

1. 소확행, 욜로, 탕진잼을 넘어 파이어족으로!

위 화면은 10대와 20대의 카톡 대화입니다. 왼쪽 ‘세젤멋뷔’가 10대이고, 오른쪽이 20대입니다. 이들의 대화를 보면 신조어가 얼마나 그들 삶에 녹아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오른쪽 20대의 신조어는 비교적 양호합니다. 다양하고 어려운 신조어보다는 보통 본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신조어들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0대들은 조금 어렵습니다. 본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신조어 외에도 유행이나 상황에 따라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일단 번역을 해 볼까요? ‘멍청비용’은 조금만 주의했으면 쓰지 않았을 비용이고, ‘존버’는 ‘엄청 버티기’입니다. ‘ㄹㅇ’은 리얼(real)의 약자로 진짜라는 뜻이고, ‘암울하누’는 암울하다는 뜻이라, ‘ㄹㅇ 암울하누’는 진짜 억울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내또출’은 내일 또 출근의 줄임말이며 연휴가 끝나갈 때의 아쉬움을 표현하거나 출근하기 싫은 감정을 나타낼 때 씁니다. 물론 문자 대화라 말을 줄이고 약어 사용이 불가피하지만, 요즘 세대들의 대화를 기성세대들이 따라잡기에는 버겁습니다.

사실 SNS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신조어들은 대부분 10대들의 대화에서 만들어집니다. 10대들의 경우, 유추하기 어려운 신조어들을 많이 사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ㅈㅂㅈㅇ’이나 ‘무물’, ‘알잘딱’ 등. 이런 말들은 줄임말인지 합성어인지 알 수 없습니다. 또 번역을 해 볼까요? 여기서 ‘ㅈㅂㅈㅇ’은 ‘정보좀요’의 자음이고 ‘무물’은 ‘무엇이든 물어보세요’의 줄임말, 그리고 ‘알잘딱’은 ‘알아서 잘 딱’이란 말의 줄임말, 곧 ‘알아서 잘해야지’라는 뜻입니다.

신조어가 나온 김에, 조금 더 살펴볼까요? ‘소확행’, ‘욜로’, ‘탕진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확행과 욜로는 최근 몇 년간 많이 사용된 말로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소확행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뜻하고, 욜로(YOLO)는 ‘인생은 한 번뿐이다(You Only Live Once)’의 줄임말입니다.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며 대비하기보다, 현재 자신의 행복을 중시하며 최대한 즐거움을 누리겠다는 소비지향 라이프스타일을 뜻합니다. 탕진잼은 ‘탕진하는 재미’라는 신조어로, 자신의 경제적 한도 내에서 마음껏 낭비하며 느끼는 즐거움을 뜻합니다. 그런데 최근 코로나 사태 이후, 이러한 소확행, 욜로, 탕진잼과 다른 가치관을 등장한 이들이 등장했습니다. 바로 ‘파이어족’입니다.

그렇다면 파이어(FIRE,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족은 무엇인가요? 말 그대로 ‘경제적으로 자립해, 조기에 직장 은퇴’를 희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젊었을 때, 임금을 극단적으로 절약하여 노후자금을 빨리 확보해, 늦어도 40대에는 퇴직하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직문화에 환멸을 느낀 젊은 세대가 빨리 돈을 모아 직장에서 해방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물론, 파이어족은 운이 좋아야 얻을 수 있는 대박의 기회가 아니라, 합리적으로 계획해서 일정한 시간을 투자해 경제적 자유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지금 젊은 세대의 가치관이 너무나도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소확행, 욜로, 탕진잼이 지금까지 우리 사회의 젊은 세대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라면, 파이어는 그 반대의 측면에서 젊은 세대들이 선택한 새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70-80대 어른 세대들의 삶의 방식과도 비슷합니다.

사실 파이어족으로 산다는 것은 눈앞의 행복과 만족을 추구하느라 경제적 부담을 평생 안고 사는 삶과 결별하는 일이기에 긍정적입니다. 또한 소비를 조장하는 시장의 유혹을 이겨내고, 자신의 가치를 중심으로 삶을 재조직함으로써, 30대에 경제적 자유를 성취하고 생애 전체에 걸친 행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삶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결단은 결코 부정적이지만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노력하다 보면, 파이어족의 꿈은 불가능한 현실이 아니라, 실현 가능성으로 남을 것입니다.

2. 코로나-19가 보여준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명암

이렇게 언어나 문화, 삶의 가치관에 있어서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는 많은 차이도 있고,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기성세대와 비슷합니다. 중요한 것은 세대와 문화, 삶의 가치관 차이보다는 다른 차이들입니다. 가령, 우리 사회는, 혹은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와의  정치적 차이도 있죠? 또한 경제적 차이, 곧 양극화도 있습니다. 이것은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수도권과 지방, 부동산 소유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발생된 차이입니다. 물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의 많고 없음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현재 코로나-19는 우리 사회의 숨겨진 벽, 혹은 차이의 민낯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그것은 너무나 한국적인 명암입니다. 중앙대 사회학과의 신진욱 교수는 그 숨겨진 세상의 명암을 이렇게 보여줍니다.

“2020년 코로나 위기를 겪으면서 안타깝게도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명암이 다시금 또렷이 나타났다. 세계 최고의 방역, 최고의 성장, 최고의 수출, 최고의 국가자부심이 빛나는, 그러나 세계 최악의 빈부 격차, 최고의 자살률, 최저의 복지 지출, 최장의 노동시간, 최다의 산재사망이, 마치 버려진 잿더미처럼 널브러져 있는 한국 사회의 위선적 풍경 말이다.”

사실 코로나의 위기는 감염병의 위기뿐 아니라, 파산과 실직, 빈곤과 고립 등을 포함하는 다중 위험상황입니다. 따라서 방역은 물론 경제, 고용, 소득, 분배 등의 다양한 측면에서 그 영향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코로나로 인해 감춰진 방역, 고용, 소득의 측면을 분석해 보면 어떨까요?

물론 방역 면에서는, 한국은 확진자와 사망자 수, 경제성장률, 수출증가율, 국민총소득 모두 최우수급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 감춰진 것이 있죠? 실직, 과로, 빈곤, 자살, 산업재해로 쓰러지고 죽어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2020년 11월 추산, 산업재해로 하루 평균 6명이 사망한다고 합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2000만 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남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사망한 비정규직 노동자인 김용균씨의 이름을 딴 ‘김용균법’, 곧 ‘산업안전보건법’이 28년 만에 전면 개정되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아니라, ‘중대재해처벌법’으로, 2021년 1월 8일 국회 본회의에 누더기로 통과했습니다. 아무튼 신진욱 교수는 코로나가 보여준 현실의 민낯을 이렇게 보여줍니다.

▲ 중대재해처벌법 2021년 1월 8일 국회 본회의 통과

“코로나의 현실을 다면체로 보면, 한국의 현황이 달리 보인다. 한국 방역모델이 우수한지, 경제를 선방했는지가 스토리의 전부가 아니다. 더 큰 틀에서 이 위기가 우리의 사고와 정책에 근본적 성찰과 전환의 계기가 되었는지, 아니면 낡은 경로가 지속된 것에 불과한지가 본질적인 질문이다. 한국 사회는 언제나 화려한 총량지표와 평균지표에 눈이 멀어 끔찍한 분배지표를 간과해왔다. 코로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습니다. 세대 간 가치관 차이는 물론 정치적 입장 차이, 경제적 양극화, 그리고 코로나로 인한 고통에 있어서 차이가 심각합니다. 어쩌면 막힌 담이 이들 사이에 차이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요? 따라서 오늘 세 본문 말씀은 ‘막힌 담’에 대한 말씀입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서신서 말씀 에베소서를 통해 이방인과 유대인, 곧 그 중간에 막힌 담을 소개합니다.

그러나 이 막힌 담을 예수께서 십자가로 화목하게 하시죠? 또한 이렇게 이방인과 유대인만이 아니라, 민족 내의 막힌 담도 허무십니다. 구약 에스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않을 것이라고 에스겔은 자신의 환상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복음서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막힌 담을 만들지 않기 위해 스스로 분쟁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또한 성령을 훼방하지 말며 예수님과 함께 하라고 권면합니다.

3.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먼저 서신서 말씀인 에베소서 말씀을 볼까요? 에베소서는 교회론을 말하는 서신이라고 했죠?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장벽이 철폐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교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를 위해 먼저 이방인의 본질에 관해 소개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 2:11-12)

무슨 말씀인가요? 이방인들의 본질에 관한 말씀이죠? 이방인들은 할례 받지 않았고,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었으며, 약속받지 못한 이들이며,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3).”라고 말씀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가까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신 이유가 나오죠? 말씀을 볼까요?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4-18)

예수께서 화평, 곧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현현(주현) 하셨기 때문에 화목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막힌 담을 헐고 둘이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이방인들의 본질이 바뀝니다. 바울은 이러한 새 본질,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워진 이방인들의 본질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19-22)

막힌 담을 허물기 위해 예수님께서 모퉁잇돌이 되셔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연결된 공동체, 연대의 공동체가 바로 예수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이 되는 것이며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에 관한 놀라운 선포입니다.

▲ 막힌 담을 허물고

4.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이렇게 이방인과 유대인만이 아니라, 유대 민족 간의 막힌 담도 허무십니다. 구약 에스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않을 것이라고 에스겔은 자신의 환상을 소개합니다. 사실, 에스겔은 유다의 제사장이요, 선지자로 유다 왕국의 역사상 가장 비참한 시기, 즉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있던 70년 동안, 포로의 땅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비탄에 빠진 백성들을 향해 예언했던 인물입니다. 에스겔은 예루살렘이 최후 공격을 받기 이전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는데, 그는 예언, 비유, 상징, 표징 등을 사용하여 포로가 된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극적으로 전달합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유다와 이스라엘이 마른 뼈가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불러 모아, 생명을 불어 넣어 회복시키시고, 다시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현재의 고통 뒤에는 미래의 영광이 따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바로 그 회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특별히 남북으로 나누어져 멸망당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다시 하나가 된다는 소망의 말씀으로, 분단된 우리 민족에게는 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가지고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겔 37:15-17)

▲ 두 막대기가 하나가 되리라!

너무나 감격스러운 말씀입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했죠? 남 유다도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지금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에 잡혀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나라가 회복되고, 이스라엘과 유다가 합하여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분열된 민족이! 막힌 담으로 나눠진 민족이! 하나님 손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 당연히 질문이 따릅니다. 하나님께서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민족이 네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뜻인지 우리에게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거든, 너는 곧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에브라임의 손에 있는 바,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가져다가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한 막대기가 되게 한즉,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겔 37:18-19)

기적 같은 일, 도저히 불가능한 일, 이 일을 누가 하신다는 말씀인가요? 바로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손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축복의 말씀을 전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너는 그 글 쓴 막대기들을 무리의 눈앞에서 손에 잡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잡혀 간 여러 나라에서 인도하며 그 사방에서 모아서 그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하고,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이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겔 37:20-22)

이제 다시는 나눠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막힌 담을 허시고 회복과 새로운 화평의 세상을 선포하십니다. 이를 위해 서로 신뢰하여 하나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중요한 말씀을 덧붙입니다.

“그들이 그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으로 더 이상 자신들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범죄 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 정결하게 한즉,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겔 37:23)

무엇인가요? 평화의 왕이요, 거룩한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난주 말씀에 예수님께서 경험하신 세 가지 유혹이죠? 경제적, 정치적, 영적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증한 물건과 죄로 인해 더 이상 우리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고 하시죠?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사탄 마귀는 늘 우리를 유혹합니다. 담을 만들고 세우는 것입니다.

5. 성령모독죄란?

따라서 오늘 복음서 본문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비법을 우리들에게 소개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 12:30).”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와 동행하시면, 우리는 유혹도 이겨내고 막힌 담도 허물 수 있고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성령을 거역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오늘 복음서 본문 말씀은 귀신축사문제를 놓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벌인 공박입니다. 성령을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볼까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예수께서 성령이 아니라, 악령으로 충만하다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회개를 촉구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죄입니다. 명백한 성령의 사역임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모욕하고 매도하는 죄를 뜻합니다. 그럼 배경을 좀 더 살펴볼까요?

“그 때에 귀신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 하느니라 하거늘”(마 12:22-24)

▲ 바알세불(파리대왕)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힘으로 고치지 않았느냐?” 라고 반박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마 12:25-27)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는 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사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마 12:28-29)

그렇습니다. 사탄 마귀를 결박하여야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간의 신뢰를 회복하고 막힌 담을 허물고 하나님의 평화가 임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는 하나님 나라는 단순히 미래에 존재하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또한 죽어서 가는 천국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전 영역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미래에 존재할 수도, 또한 내세에 있을 수도 있지만,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바로 지금 현재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일에 예수님의 동역자가 되지 않으면, 반대하는 자요, 헤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마 12:30).

6. 30년 후에 오늘 2021년을 바라볼 때

이렇게 막힌 담을 헐고 신뢰를 회복하여 주께서 보여주신 길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결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대 간의 차이, 경제적 차이, 정치적 차이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됨으로 말미암아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0년 코로나 상황이 우리 사회의 숨겨진 민낯이 드러냈다면, 이제 2021년에는 바꾸어야 합니다. ‘고용’에 있어서 안정적이어야 하며, 또 ‘소득’의 측면에 있어서 분배가 더 이루어져야 합니다. 노동자들이 산재로 사망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생명과 평화와 정의가 실현되고 창조 질서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위기는 기회입니다. 또한 위기의 상황에서도 늘 새로운 세상을 향한 전진을 멈추지 않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폴란드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군가는 끝없이 파도를 거슬러 헤엄치고자 노력했고 미래를 향한 희망의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희망의 싸움을 멈추지 말고 파도를 거슬러 헤엄쳐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이 여신도회주일인데, 우리 교회의 여성들이 바로 이 희망을 멈추지 말고 헤엄을 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희망이 현실이 되도록 오늘도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매일 매일 최선을 다한다면 30년 후에는, 우리 역사와 교회의 역사가 어떻게 기록될까요? 서울대 국제대학원 박태균 원장은 2050년 대한민국 역사 교과서에 2020년이 이렇게 기록되기를 바랍니다. 인용해 보겠습니다.

“2020년은 성장과 효율, 그리고 개발만 추구하던 인류가 안전과 생명에 눈을 돌리고,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녹색혁명이 시작된 해였다. 코로나-19로 4차 산업혁명이 가속화되면서, 동시에 과거부터 계속되어오던 사회적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2020년은 한국 사회의 혁신적 성장이 시작된 해이기도 했다. 코로나-19로 인한 몇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협조, 그리고 의료진과 국민들의 자발적 공조로 한국의 민주주의는 21세기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저는 박태균 원장의 말을 빌려 우리 교단과 교회에 이렇게 적용해 봅니다.

“2021년은 성장과 효율, 그리고 부흥만 추구하던 개신교회가 정의와 평화, 생명에 눈을 돌리고,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예수녹색혁명이 시작된 해였다. 코로나-19로 4차 산업혁명이 가속화되면서, 동시에 과거부터 계속되어오던 사회적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교단과 교회의 노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2021년은 한국 개신교의 질적인 변화가 시작된 해이기도 했다. 코로나-19로 인한 몇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교단과 노회, 개별 교회의 협조, 그리고 목회자와 교인들의 자발적 공조로 한국의 개신교회는 21세기의 새로운 교회의 모델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30년 후에 오늘 2021년을 바라볼 때, 이렇게 기록되고,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과 한국 개신교를 이렇게 바꿔나가야 할 것입니다. 아직 30년이 남았습니다. 그 길에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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