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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장로회, 조선과 북간도를 향하다

기사승인 2021.01.09  17:3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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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간도 독립운동을 추동한 캐나다장로회 교회들과 설립자들(1906~1923) ⑴

▲ Canadian missionaries in Korea in 1923 ⓒCourtesy of United Church of Canada Archives)

2020년 코로나는 참으로 위대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을 순식간에 병고와 죽음, 굶주림과 공포로 몰아갔으며 첨예하게 대립하는 강대국들로 하여금 백신과 치료약 개발을 위하여 서로 협력하며 공조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죄성과 문명의 한계, 과학의 오만을 숙고하게 만들었으며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집단적으로 대중적으로 성찰할 기회를 주었다.

코로나가 준 천재일우의 기회가 인류에게 진실로 거듭남의 기회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인류가 맘몬이즘의 그럴듯한 속임수 무한 탐욕, 무한 소유, 무한 경쟁, 무한 소비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서열없는 사회, 초아적인 봉사와 조건 없는 나눔으로 새로운 생명의 질서가 수립되길 빈다.

사라진 이름을 부르는 작업

연길에서 머물면서 말없이 사라진 것들과 잊히어진 것에 대한 아픔, 그리움과 감사함으로 많이 울었다. 해방 이후 정치가들의 이념과 이익대로 취사선택되어져 우리 시야 밖으로 쫓겨난 북간도독립운동의 진실과 팩트를 알고자 고서를 뒤지며 많은 밤들을 하얗게 지새웠다. 그런 과정에서 만난 1800년대 중후반에 조선양반과 관료들의 수탈에 못이겨 생명을 걸고 두만강을 건넜던 조선의 천민들, 그 천민들이 세운 교회와 독립운동, 경신참변 시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수천의 성도들과 불탄 교회들 그리고 1941년 만주국 치하에서 <만주조선기독련맹>에 가입하였다가 끝내는 중국의 탄압으로 역사 밖으로 떠난 교회들을 만났다.

그들은 나의 역사 이해와 인식을 뒤집어버렸다. 생명과 민, 진리가 주가 되는 역사의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동참하는 역사적이며 동시에 초역사적인 교회에 대하여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그들은 백 년도 안 되는 짧은 사이에 봉건왕조 청나라, 러시아, 중화민국, 동북군벌, 제국주의 일본과 만주국 그리고 친일파 앞잡이들, 세력을 다투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가와 공산주의 독립운동가, 공산주의 중국을 온몸으로 겪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 한인 지주들의 횡포와 수탈, 토비와 마적단의 약탈과 위협, 중국 관리와 중국인들의 차별과 핍박, 가뭄과 홍수에 에워싸여 살았다. 그러 암담한 환경 속에서 자작농이나 소작농으로 농사를 지으며 나라의 독립을 꿈꾸며 신앙으로 산 그들에게 신의 부재처럼 느껴지는 1920년 경신년 대학살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가혹하다.

그들이 하나님께 독립을 간청하며 기도를 바쳤던, 안전이 보장된다고 믿었던 교회당 안에서 불에 타죽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 것인가?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그들의 당혹과 경악, 절망과 고통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교하지 않고 순교한 그들을 묵상하며 사라진 교회, 잊히어진 사람들을 기억하며 그들과 함께 살고 싶어서 본 글을 쓴다.

오늘 여기에 산산이 부서진 이름을 적어 본다.
지금 이 시간에 허공중에 사라진 이름을 불러 본다.
하나님의 우주적인 교회로 사라진 북간도 교회들의 이름을 적어 본다.
순교하였으나 어디에서도 추모되지 않는 성도들의 이름을 불러 본다.

독립운동사에 찬란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자랑하면서도 그 전투가 가능하도록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친 캐나다장로회 교회와 성도들, 그 결과로 일본군에게 대학살의 고통을 당한 교회와 성도들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무지한 한국인들의 양극화된 역사의식을 애도하며 1906년에서 1923년 사이에 개척된 교회 이름을 연도별로 기록해보았다. 시대 구분과 교회 이름은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하권>에 근거하였다. 그러나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하권> 나오지 않으나 다른 책에 나오는 교회와 설립자의 이름은 그 책에 적힌 원이름을 한국식문법에 맞추지 않고 그대로 적었다. 같은 교회의 이름이 서로 다르게 쓰이어진 것이 확실한 경우에는 주에서 설명하였지만 분명하지 않은 경우에는 두 개의 이름을 다 적어서 한 개 교회가 두 개처럼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의 내한과 북간도 선교

▲ William JOHN McKenzie 선교사 ⓒUCC of Canada

북간도에서의 초창기 교회 설립은 감리교와 캐나다장로회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지 분할정책으로 북간도가 캐나다장로회 선교구역으로 확정됨에 따라 감리교 선교부는 개척한 교회들을 캐나다장로회에 넘겨주고 떠났다. 그리하여 북간도는 1907년부터 캐나다장로회의 단독 선교구역이 되었다.

캐나다장로회가 한국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김세(William JOHN McKenzie) 죽음 이후였다. 그는 1893년 메리타임 연회에서 자신의 한국 선교에 대한 비전을 간단하게 나누었고, 10월 26일 트루로의 교회 성도들의 격려를 받고 벤쿠버로 떠났다. 그리고 11월 12일 밴쿠버에서 배를 타고 한국으로 왔다. 그는 일기에 “하나님, 이제부터는 한국이 내가 받아들일 땅이 되게 해주소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오랫동안 한국에 머물며 일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죽음이 나를 삼킬 때,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큰 나팔소리가 울릴 때까지 내 유골을 그들과 함께 썩게 하소서.”라고 자신의 심정을 기록하였다.(1)

1894년 캐나다선교사 김세(맥켄지)가 황해도 장연군 송천(솔내)에 와서 거주하며 열심히 전도하였다. 그는 한국인과 동일한 수준의 열악한 집에서 거주하며 형편없는 식사와 기후에 시달렸다. 최선을 다하여 자력으로 교회 건축을 하고 남녀학교를 세우며 교육과 목회를 겸하였다. 그는 과로로 말미암아 말라리아 열병과 일사병에 걸린 증세를 보였으며 그로 인하여 1895년에 6월에 사망하였다.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캐나다장로회는 3년에 걸친 찬반토론과 기도 끝에 1897년 메리타임연회에서 111대 25로 한국선교를 가결하였다. 해외선교위원회는 1898년 2월에 구례선(Robert Grierson)과 부두일(William Rufus Foote)의 지원을 받아들이고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그 후 4월에 마구례(Duncan M. McRae)를 세 번째 한국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한국 선교의 개척자로서 1898년 7월 20일에 메리타임을 출발하였다. 8월 14일 요코하마에 도착하였으며 24일에 나가사키에서 히고마루를 타고 9월 8일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그들이 도착한 1898년 9월은 조선장로회사기(2)에 의하면 선교사공의회시대(1893~1900)(3)로 분류되고 있는 시대이다.

그들은 10월에 미국 북장로회, 호주장로회, 미국 남장로회로 구성된 장로회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등록하여 캐나다장로회로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공의회에 의해서 부산과 원산 두 지역을 선교지로 제안을 받았다. 그들은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인 게일, 펜윅, 하디가 살았던 원산을 선교지로 택하였다. 그들은 원산에서 캐나다장로회 선교사회를 조직하고 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회로부터 설립된 교회와 일절 사무를 인수인계 받았다.

캐나다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독노회시대(1907~1911년 말)에는 함경대리회에 속해서 활동하였으며 치리기관으로서 상회가 조직된 총회시대(1912~1923년)에는 함경노회(1912~1917년), 함북노회(1918~1921년)에 소속 되어서 성진과 원산, 함흥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며 해삼위와 북간도지역 전도에도 관심을 가지고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 결과로 1921년 간도노회가 함북노회에서 분리하여 조직 되었고 선교사 박걸, 서고도, 배례사가 용정 선교부에 거주하며 선교회를 이끌게 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계발시대(1865~1892)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는 공의회시대 이전의 시대를 계발시대(1865~1892)라 불렀다.(4) 이 시대에는 제너럴 셔만호를 타고 들어왔다가 순교한 토마스 목사,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를 통해 세례 받은 의주 상인, 김진기, 이응찬, 백홍준의 성경 번역과 매서인 서상륜과 이성하 등의 조선 국내 성경 판매와 포교활동 등이 있었다.

1884년 조미조약 후, 미국의 북장로회 선교사인 의사 알랜이 서울에 거주를 시작 한 이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들어오고, 의사 헤론이 들어와서 교회 창립을 시작하였다. 알랜은 조선정부의 제공으로 <광혜원>을 세웠으며 헐버트는 <육영공원>의 교장이 되었다. 그들은 의료, 교육, 전도 활동으로 최선을 다하며 복음을 전하였고 연이어 입국하는 선교사들과 함께 남북미선교사회를 각기 조직하였으며 포교할 지역을 분할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장로교선교사회는 감리회와 협의회를 만들어서 상호협조를 도모하였으며 중국 선교사 로스가 개종시킨 조선인 신도들을 이명 받았으며, 일본과 봉천에서 번역된 성경의 오역을 바로잡기 위하여 선교회가 성경번역에 합의하였으며 예수교서회를 설립하였다.

1888년 원두우(Horace Grant Underwood) 선교사가 황해도 송천에서 7인에게 세례를 주고 교회를 세웠다. 당시 그는 매서인 4명을 선정하여 1명은 서울 근처에. 1명은 장연 근처에, 1명은 평양 근처에, 1명은 의주 근처에서 전도하게 하였다. 이것이 조선 교역자 임명의 첫걸음이었다.

1889년 게일은 영남 각 군을 순행 전도하였으며 원두우는 관서 각 군을 순행 전도하는 중에 의주압록강 상에서 32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같은 해에 호주 선교사 더비이스(Henry Davis)가 도착하여 부산에서 전도를 시작하였다. 교회가 세워지고 신도들이 증가함에 따라 초창기 계발의 시대가 끝나고 공의회시대가 열렸다.

미주

(미주 1) 윌리엄 스코트 저, <한국에 온 캐나다사람들>, 82.
(미주 2) 양전백
함태영ㆍ김영훈/이교남 역,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 60/61.
(미주 3) 선교사공의회시대 – 조선에 기독교가 전파 된지 10년 미만에 교회가 많이 세워졌지만 상회가 없어서 여러 위원들이 공의회를 조직하여 적법대로 설립할 치리회가 구성되기 전까지 전권으로 치리하는 상회를 만들었다. 1893년에서 1900년까지 선교사들이 공의회를 주도하였기 때문에 선교사공의회시대라고 명명하였다.
(미주 4) 
양전백함태영ㆍ김영훈/이교남 역,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 35.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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