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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함으로 회칠한 성탄절

기사승인 2020.12.23  23: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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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19와 가난: 가난한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한다

▲ 숨진 채 발견된 60대 여성 김모씨의 집에서 발견된 아들 최 모 씨가 쓴 메모. (정미경 사회복지사 제공) ⓒ뉴스1

코로나19로 온 사회가 얼어붙은 2020년의 마지막 달, 12월 3일 재건축을 앞둔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한 다세대 주택에서 60대 김씨가 죽은 채로 발견됐다. 이 죽음은 거리를 전전하는 한 지적장애인과 대화를 나눈 사회복지사를 통해 뒤늦게 알려졌다. 죽은 여자와 지적장애인는 모자지간이었다. 김씨가 죽은 지는 약 5개월 전쯤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 사건은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망 사건, 2019년 관악구 탈북 모자 사건과 유사한 취약계층 사망 사건이지만 특히 서울의 대표적 부촌인 서초구에서 발생했다는 것이 더욱 우리의 관심을 끈다. 서초구 방배동에서 홀로 쓸쓸히 죽어간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의 사망 이후 집에서 나와 노숙자가 된 지적장애인 아들을 사회복지사가 우연히 발견할 때까지, 모자의 비극은 아무도 몰랐다. 장애인 아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대화를 나누어 이 사건을 드러나게 했던 사회복지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들 모자에게 조금만 더 관심을 가졌다면, 이런 비극이 발생하기 전에 뭔가 해줄 수 있었을텐데”

지나가는 2020년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시작해서 코로나19 바이러스로 끝나는 한해이다. 올해 최대의 화두는 코로나19이다. 코로나19 시대를 언급할 때 몇 가지 중요한 단어들이 등장한다. 첫째는 팬데믹(pandemic)이다. 코로나19는 진정한 의미에서 팬데믹이다. 단순히 전 세계적으로 감염병이 발생하였다는 의미를 넘어서 인간의 모든(pan) 삶의 영역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삶 구석구석까지 치밀하게 침투해 들어왔다. 우리는 코로나19를 극복하는(post) 문제를 떠나서 그와 동행하고 동거하는(with) 삶을 살고 있다. 

두 번째 단어는 거리 두기(distancing)이다. 거리 두기는 결과적으로 대면 혹은 비대면이라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코로나19 감염병 사태는 우리로 하여금 ‘가까움’보다는 ‘거리두기’가 안전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접촉과 가까워지는 것이라고 할 때 코로나 시대는 우리로 하여금 관계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대면과 접촉(contact)과 비대면과 비접촉(untact) 그리고 온라인 대면과 접촉(ontact),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e)는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단어가 되었다.

셋째는 ‘새로운 정상’, 뉴노멀(New Normal)이다. 지금까지 인류가 지녀왔던 정상에 대한 개념이 도전받고 있다. 코로나19는 인류가 정상(normal)이라고 여겨왔던 많은 것들을 낯설게 만들었고 따라서 새로운 정상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하게 만든다

넷째는 생태(Ecology)이다. 코로나19의 원인을 분석하는 가운데 자주 등장하는 것이 생태와 기후위기이다. 생태의 파괴가 결국 코로나19의 팬데믹 사태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서 생태 파괴의 주범으로 세계화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폐해와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화두들을 중심으로 논문과 글을 발표되었다. 이에 대한 서적도 수없이 발간되었다. 이처럼 코로나19는 우리 모두에게 많은 화두와 논쟁거리를 던졌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인류의 삶의 방향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 것에 대하여 성찰의 기회를 주었다. 기독교인들도 코로나19 후의 시대(post corona) 혹은 코로나와 함께 시대(with corona)를 논의하면서 교회, 신앙 그리고 목회의 방향에 대하여 열띤 토론을 벌이면서 한 해를 보내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코로나19가 주고 있는 중요한 화두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그것은 가난의 문제이다.

화려함으로 회칠한 가난의 문제

코로나19가 막 시작했을 즈음에 ‘바이러스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하곤 했다. 누구든지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바이러스는 빈부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침투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오히려 코로나19는 가난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다. 코로나19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욱 극력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자가 격리의 경우에도 가난한 사람들은 격리 공간을 확보할 수 없었다. 매스미디어들은 자가 격리에 들어간 유명인사들의 모습을 방송으로 내보내곤 했다. 자가 격리에도 분명한 빈부의 차이가 있었고 우리는 그 사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그러했다. 코로나19는 영세 자영업자를 비롯한 소액의 자본으로 근근이 영업을 이어가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반면 오히려 코로나19로 인하여 자신의 사업을 확장한 부자 기업들도 있었다. 미국과 같은 부자 나라에서도 코로나19는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을 극명하게 구별지었다. 세계 최고의 확진자와 감염자 수를 보이고 있는 미국의 상황을 들여다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코로나19에 감염되고 또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은 대다수 가난한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코로나19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가난의 문제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일찍이 해방신학자 우고 아스만 이렇게 말했다. “현 세대의 특징은 사회적 소외의 논리가 확산되어 가고 있고, 그러한 현상에 대한 무관심이 지배하는 잔인한 제국이라는 데에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인 서초구 방배동에서 발생한 지적 장애인 아들의 어머니 사망 사건은 이 같은 세태의 잔인한 모습을 명확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우리는 주위에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는 가난을 망각하고 있다. 아니, 화려함 속에서 우리의 눈에 가난이 보이지 않는 지도 모른다. 우리는 화려함으로 회칠한 가난을 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연 오늘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난이 사라졌는가? 

요즘 우리는 개념의 단순화와 왜곡화 현상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오늘의 사회에서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들의 사라짐과 부재를 경험하고 있다. 그 의미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을지라도 의미를 축소하거나 단순화(trivialization)하는 현실을 당면하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정의 혹은 억압, 해방이라는 단어는 큰 의미를 갖지 않고 있으며 그러한 단어들은 다른 단어들로 대치되기도 한다.

가난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이다. 가난은 그저 능력 없는 사람,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이 경험하는 상황으로서 약간의 구호의 대상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더 이상 가난은 우리의 눈에 띄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언어를 절도 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지구촌화 현상을 보이고 있는 오늘의 세계는 우리들로부터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 원인을 파악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단어들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단어의 왜소화((trivialization) 현상은 무관심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방배동 지적장애인 모자 사건은 이러한 왜소화와 뒤이은 무관심의 사회적 현상의 결과이다.

가난한 사람의 몸으로 오신 예수

12월 25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기념하는 성탄절이다. 사실 12월 25일은 원래 인도와 지금의 이란인 페르시아인의 태양신인 미트라(Mitra)의 축제일이었다. 태양신 숭배는 기원전 수천 년 전부터 인도에서 유럽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있었다. 미트라의 생일이 12월 25일로, 그는 처녀에게서 태어나 신과 인간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탄생일이 12월 25일로 규정되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기독교가 태양신 종교와 혼합되어 버렸다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기독교는 이들이 주장하는 대로 로마의 태양신 종교에 혼합되어 버린 것일까. 형식적으로만 보면 그런 반응이 나올 수도 있다. 왜냐하면 부활절 날짜를 결정한 것도 태양신 미트라의 부활 날짜와 겹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기독교인들은 태양신 미트라의 생일과 예수님의 탄생을 연결시켰을까?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시의 상황을 보면서 그 이유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예수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마구간의 말구유에서 태어난 그야말로 비참한 인생으로 태어났다. 그의 탄생은 누가 그의 생일을 기억하고 기록을 남길 만큼 화려한 탄생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탄생 시기에 대한 아무런 역사적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당연히 날짜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었다. 로마는 당시 태양신을 섬기고 있었다.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탄생일을 미트라의 생일과 일치시킴으로서 태양신 종교를 향하여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러한 사실은 미트라의 모습과 예수님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혹시 가난하고 초라하게 태어난 예수의 탄생의 모습이 백마가 끄는 전차에 올라타 은창을 들고 각종 무기가 둘려있는 금갑옷의 미트라신을 전복 시키고 있는 형국이 아닐까? 로마제국의 군인들이 신봉하는 그 태양신 숭배의 날을, 말구유에서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 인간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로 바꾸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칼과 창으로 세계를 정복하고자 하는 태양신 종교를 향하여 사랑과 섬김으로 세상을 하나 되게 만드는 예수님의 사랑의 승리를 선포하기 위하여 초대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탄생일을 미트라의 생일과 겹치게 규정하였던 것이 아닐까? 결국 12월 25일은 태양신을 숭배하는 날이 아니라, 세계적인 ‘예수의 탄생일’이 되고 말았다. 태양신은 간데없고 이제 이 날은 ‘구주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 되었다.

예수 탄생의 의미

 그러므로 우리는 태양신 종교를 향해 도전장을 내밀었고 결국 미트라로 대변되는 당시 세계의 가치관을 전복시켰던 예수님 탄생일 결정 사건의 의미를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런데 혹시 태양신을 향하여 승리를 선포 하였던 성탄절의 의미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또 다시 향락과 화려함을 추구하는 태양신 종교에 의해 점령을 당한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성탄절의 의미가 사랑과 섬김을 위해 초라한 말구유에 탄생하신 예수님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변질되어가고 있고 또 기독교도 태양신 미트라처럼 백마에 은창을 들고 강력한 힘으로 세상을 정복해 보겠다는 욕심을 내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은 오늘날의 크리스마스의 화려함과는 다르게 매우 초라하고 보잘 것 없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화려하지 않게 태어난, 자신의 생일마저 축하받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사람답게’ 구원시키기 위해서 세상에 내려와 십자가에 달리셨다. 우리의 삶이 예수 탄생의 의미를 되새기며, 다시 성탄절을 태양신 미트라의 생일이 아닌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생일로 바꿀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주님 오심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방배동 지적장애인과 그의 어머니의 사망 사건 그리고 코로나19가 수면위로 떠오르게 만든 가난과 무관심의 사회는 말구유에 태어나신 가난한 예수의 탄생을 보지 못하게 한다. 가난을 망각하고 있는 우리들을 향하여 말구유의 가난한 예수의 탄생은 주위의 화려함으로 가려져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의 눈으로 발견하게 한다. 코로나19의 시대에 예수는 또 다시 가난한 사람으로 우리에게 오고 있다. 그의 가난함으로 인하여 코로나19 감염의 가능성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그는 오고 있다.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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