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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때가 아닙니다

기사승인 2020.11.30  17: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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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선시(動善時, 요한복음 2:1~4)

▲ 예수님께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음을 알리는 마리아. ⓒGetty Image

예수살기

예수 살기는 우리 신앙의 가장 큰 목표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결국 예수님의 삶을 우리의 삶을 통하여 살아내는 것이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2020년을 시작하면서 저는 한 해 동안의 우리 교회의 목회주제를 “예수살기”로 제시하고 이에 대하여 성경을 중심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잠시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바울의 삶을 통하여 예수살기는 우리에게 있어서 삶의 전환점,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임을 의미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살기는 진행형으로서 완성을 향하여 달려가는 결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예수를 살아갑니다.

두 번째 ‘살기’는 ‘움직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어떤 동기에 의해서 실질적으로 움직여집니다. 예수 살기는 예수님’이라는 동기가 우리의 살기를 움직임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살게 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 움직여지고 그래서 살아지게 됩니다. “예수살기”는 이처럼 예수님이라는 동기에 의해 우리의 삶의 움직임이 결정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의 동기(動機)가 우리의 삶의 동기가 될 때 “예수살기”는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삶의 동기(動機)는 무엇이었습니까?

그 분은 자신의 삶의 동기를

1.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
2.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기.
3. 눈먼 사람들의 눈 뜨게 하기.
4. 억눌린 사람들 풀어 주기.
5. 주님의 은혜의 해(희년) 선포하기.

예수님의 삶의 동기가 오늘 나의 삶의 동기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우리의 온 생애를 통하여 우리는 이 질문을 늘 자신에게 던져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 살기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한 이후에 저는 여러분들에게 아시아의 오래된 지혜 중의 하나인 도덕경 8장의 물이야기를 통하여 예수살기를 보다 심층적으로 들여다보았습니다.

上善若水 상선약수
處衆人之所惡,故幾於道 처중인지서오 고기어도
水善利萬物而不, 夫唯不爭, 故無尤 수선이만물이불, 부유부쟁 고무우
居善地 거선지
心善淵 심선연
與善仁 여선인
言善信 언선신
正善治 정선치
事善能 사선능

오늘은 물의 이야기를 통한 예수 살기에 대한 마지막 설교입니다.

오늘 언급하고자 하는 물의 특징은 動善時, 동선시입니다.

動善時
움직일 동(動)
착할 선(善)
때 시(時)

때를 잘 구별합니다.

노자를 비롯한 아시아의 지혜는 시(時)의 개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하늘의 뜻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도(道) 다시 말하면 진리와 관련이 있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물의 가장 중요한 특징, 아니 마지막 특징으로서 시(時), 때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우리 옛 어른들은 시(時) 라는 단어를 잘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時)는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시계의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어른들의 시(時)는 하늘의 시간, ‘때’였습니다.

비가 올 때, 씨를 뿌릴 때, 쉴 때, 거둘 때 등등 하늘의 뜻과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크로노스가 아닌 카이로스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시(時)입니다.

성경 구약의 지혜서 중 하나인 전도서도 ‘때’에 대하여 길게 말합니다.

1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 2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 3 죽일 때가 있고, 살릴 때가 있다. 허물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 통곡할 때가 있고, 기뻐 춤출 때가 있다. 5 돌을 흩어버릴 때가 있고, 모아들일 때가 있다. 껴안을 때가 있고, 껴안는 것을 삼갈 때가 있다. 6 찾아나설 때가 있고, 포기할 때가 있다. 간직할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다. 말하지 않을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다. 전쟁을 치를 때가 있고, 평화를 누릴 때가 있다. 9 사람이 애쓴다고 해서, 이런 일에 무엇을 더 보탤 수 있겠는가? 10 이제 보니,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수고하라고 지우신 짐이다. 11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전도서 3:1~11)

때를 아는 것! 예수 살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우리는 이 때를 알지 못해서 일을 그르치기도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곤 합니다. 때를 아는 것! 오늘 우리는 때를 알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내 때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그 유명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발생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 위기의 순간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거절하십니다. “때가 아니다.”라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조금 있다 곧 바로 사람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도움을 주심으로서 위기를 극복하게 하십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해하지 못한 예수님의 행동은 오늘의 기록뿐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7장은 예수님의 행적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형제들이 예수님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고 권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예수가 하는 일을 온 세상 사람들이 보고 듣게 하자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는 그들에게 “내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너희는 명절을 지키러 올라가거라. 나는 아직 내 때가 차지 않았으므로, 이번 명절에는 올라가지 않겠다.”(요 7:6, 8) 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십니다.

그러나 그 후 예수님은 형제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 간 후에 아무도 모르게 올라가셨다.(요한 7:10)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상황을 전하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아직 나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마치 어머니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이러한 답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혹시 예수님의 거절하는 것 같은 말, “내 때가 아닙니다.” 라는 말은 하나님의 이적은 인간의 집요한 요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는 말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조정되어지는 분이 아니십니다. 특별한 능력의 기도가 있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능력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이적을 생성케 할 수 있는 기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모든 것은 자신의 때를 이루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이러한 시도에 대하여 예수님은 “내 때가 아니다.”라고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에게는 진정한 기도에 대한 응답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조건 지어지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을 상대하는 어떤 인간의 외부적인 조건이나 혹은 그의 내면적인 것이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의지와 섭리에 따라 움직이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에게 기도를 받는다든지 하는 행동은 비성서적인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행동은 성서에서 나온 것보다 매개체를 주로 사용하는 무속적인 종교의 분위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는 오직 하나님만이 결정하실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 나타나는 예수님과 그의 형제들의 대화를 살펴볼 때도 이러한 사실은 분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7:6)

형제들이 예수님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것을 권유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의 이 권유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숨어서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형님이 이런 일을 하는 바에는 자기를 세상에 들어내십시오.”라고 하면서 예수님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고 말합니다.

광고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매우 매혹적인 제안입니다. 좋은 일을 하는데 알려서 나쁠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요?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서 동참하도록 하는 것이 무엇이 나쁩니까?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렇게 알리기를 바라는가? 성서의 기자는 그 이유를 불신앙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7:5) 그렇습니다.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에 대하여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때에 자신의 방법으로 자신이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힘이 아닌 다른 힘을 빌리는 것입니다.

왜 꼭 내 당대에 내가 그 일을 꼭 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런 의미에서 최근 한국이나 미국 등지에서 유명해진 목사들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꼭 자신이 그렇게 큰 사역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이왕 할 바에야 큰 일 한번 해보자’는 형제들의 제의를 물리치는 모습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하는 일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고 또 그 분의 때에 이루시리라는 것을 굳건히 믿습니까?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의 요청을 거부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형제들의 제의를 거부합니다. 두 경우 모두 ‘내 때가 아니다.’하는 말로 거부합니다. 그 분은 ‘내 때’와 ‘세상의 때’를 구별하십니다. ‘내 때’와‘세상 때’는 무엇이 다른 것일까요?

하나님의 때와 세상의 때

예수님의 때는 결정적인 시기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때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스스로 만들어 가시는 때입니다. 하나님의 때는 세상의 지혜로 판단할 수 없는 그러한 시간을 의미한다.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그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 때는 살아있는 때입니다. 움직이는 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애매모호한 행동(거절한 이후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고 또 형제들의 제의를 거절한 예수님이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일)을 이해 할 수 있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때를 살 수 있을까요? 오직 믿음의 사람들만이 가능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사심이 없기에 가장 올바른 때를 구별하는 신비스러운 능력을 자신도 모르게 소유하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때를 잘 알아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말하는 것은 단지 시기적인 의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엇이 하나님의 섭리 인지를 분별하는 통찰력을 말합니다.

반면에 세상의 때는 항상 준비되어 있습니다. 항상 준비되어 있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기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내 당대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말은 어찌 보면 약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내 당대에 교회를 짓고 내 당대에 이러저러한 일을 이루어 보겠다는 것은 믿음의 부족의 결과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결국 하나님의 때를 내 때로 만들어 가려는 인간의 부질없는 행동입니다. 이것의 결과는 파괴적이고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라는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한국교회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담임목사 세습도 이 같은 ‘내 때’를 이루고 ‘내 때’를 연장시키겠다는 불신앙의 발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때를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는 결코 새로운 창조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때 구별하기

이처럼 하나님의 때를 구별하는 것은 예수살기에 있어서 핵심입니다. 동선시(動善時), 물처럼 때를 구별하여 살아가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예수 살기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침내 어머니 마리아는 자신의 아들 예수의 말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일군들에게 ‘예수가 시키는 대로 할 것’을 지시합니다.  이제야 마리아는 모든 것을 예수님에게 맡깁니다. 자신의 뜻을 관철하지 않고 그저 예수님의 뜻을 따르기로 합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2:5)  마리아는 이제 예수의 때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결단에 달려 있음을 깨닫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맡길 수 있고 그가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결단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내가 만들어 가겠다는 것의 포기입니다.

구약의 인물인 요셉의 삶의 특징 중의 하나가 때를 기다릴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때를 구별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있을 때도 몸부림치지 않았습니다. 분통을 터트리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조언대로 감옥에서 풀려난 관리가 그를 기억하지 못하고 아무런 조치도 해주지 않았을 때도 발버둥 치지 않았습니다. 아무 말 없이 세월을 보냈습니다. 때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진정 때를 구별하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흐르는 물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예수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동선시(動善時), 때를 구별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때’를 구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곧잘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기게 해 주십시오” 무엇이 그리 급합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늦춰지거나 혹은 앞당겨져 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집니다.  때를 구별하고 기다릴 줄 아는 신앙이야 말로 삶을 행복하게 해줄 것입니다.

동선시(動善時)

‘하나님의 때’를 구별하는 신앙을 훈련하게 되는 사람은 조그만 영광에 우쭐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삶의 위기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면서 열심히 살아갈 뿐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물이 묵묵히 흐르는 것은 때가 되면 마침내 바다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삶도 그래야 합니다. 조급해 하지도 말고 실망하지도 말고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면서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흘러가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동선시(動善時),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 예수님을 살아갑시다.

홍인식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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