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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기사승인 2020.11.29  16:4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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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를 믿는 신앙(창세기 1:31)

▲ 하나님께서 세상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신앙은 차별과 배제를 허락하지 않는다. ⓒGetty Image
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지난 주일로 창조절이 끝났습니다. 이번 주일부터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한 해를 마무리하고 있는 시기에 우리는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또 다음 한 해 동안 어떤 신앙의 자세로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창조절은 끝났지만, 창조 신앙부터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인이라면 당연하게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을 믿습니다. 이를 사실 그대로 믿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어떤 이념적인 의미로 믿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싸움은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이 싸움의 근본에는 창조론이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것을 직접 만드셨다’는 말씀이 사실 그 자체라고만 믿는 신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안에 담긴 의미는 생각하지 않고 글자를 믿는 신앙이 이런 싸움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창조를 믿는다고 말하기 위해서 성경이 왜 창조 이야기로 시작되는지, 창조 이야기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창조를 믿는다고 말하는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은 창조에 관해 성경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생각해보고 우리가 어떤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창조 개념의 변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생각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던 생각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이외에 주변 지역 고대 신화들 속에서도 신은 어떠한 형태의 창조 활동을 합니다. 이때 신이 행하는 창조 행위는 우리가 생각하는 창조와는 약간 다릅니다.

보통 신화들 속에서 신들은 어둠을 몰아내고, 악한 존재와 싸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는 창세기 1장의 하나님께서 물을 갈라 하늘과 땅과 바다를 만드시는 모습과도 유사합니다. 하지만 그 목적은 조금 다릅니다. 고대의 신화에 나타난 창조는 자신이 믿는 신이 얼마나 강한지를 드러냅니다. 가장 두려운 것을 이길 수 있는 신이기에, 적들로부터 우리를 지킬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대의 신화 속에서 신은 ‘우리’를 지키는 신, ‘우리’를 돕는 신입니다. 우리 이외의 주변 국가나 들짐승 등은 우리의 적이기에 신은 이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합니다. 신화 속에서 창조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시리아와 같은 제국이 생겨나고 이들에 의해 처참한 침략을 당하면서, 창조에 관한 신앙에 조금 변화가 생겨납니다. 신은 더 이상 우리의 삶에만 관여하는 존재가 아니게 됩니다. 나와 내 나라의 구원만을 이루는 신이 아니라 다른 나라까지도 관여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발전합니다.

그런 신앙 속에서 나타난 것이 예언자들의 선언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심판의 도구로 삼으셨다.’는 말씀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저들도 창조하셨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쟁을 이기게 하시는 신이 아니라 이 나라 저 나라 모두를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신앙이 생겨납니다.

자신들이 어떻게 해도 도시를 파괴하고 자신들을 괴롭히는 제국이라는 존재 앞에서 우리를 지키고 도우시는 하나님이라는 생각은 깨졌습니다. 그래서 그들 역시도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신앙이 생겨갑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페르시아의 ‘고레스’를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고, 예레미야가 바벨론을 하나님 심판의 도구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신앙은 아마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적들을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개념에서 출발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들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개념으로 이어지면서 새로운 신앙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바로 요나서 마지막에 나타나는 말씀과 같은 신앙입니다.

요나서는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 회개를 선포하러 갔던 예언자입니다. 그 마지막 4장에서 요나는 니느웨가 멸망하기를 바라며 멀리서 니느웨를 지켜봅니다. 요나서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저 적들을 창조하시고 더 나아가 그들의 삶을 주관하신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끼시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 역시도 구원하고자 하신다는 신앙이 생겨납니다.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와 바벨론의 속국이었던 시절, 이들의 신앙은 유일신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분명 수많은 신을 섬겼습니다. 가나안 토착 신을 섬기기도 했고, 이집트의 곤충 신앙이나 동물 신앙을 따르기도 했습니다. 아시리아와 바벨론의 신을 섬기기도 했습니다. 이때 이들은 해와 달과 별도 각각의 신으로 여기며 섬겼습니다.

그런 시기에 그 모든 것들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라는 신앙이 발전됩니다. 우리가 신상을 만들 때 사용한 나무, 돌, 금, 은 모두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다. 하늘과 해와 달과 별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다. 솔직히 앞서 말씀드린 우리의 적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생각과 자연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생각, 어느 것이 먼저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바벨론 포로기가 시작될 때까지도 해와 달과 별을 섬겼다는 기록을 보면,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도 창조하셨다고 생각한 이후에도 자연물을 하나님과 별개의 신으로 생각하며 섬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역사가들과 예언자들, 성경을 기록한 이들을 이것이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말합니다. 그 신앙을 널리 전합니다.

자연물 역시도 하나님의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에 앞서 요나서에서 본 것과 같은 방식의 신앙도 이어서 생겨납니다. 하나님께서 자연을 아끼고 지키신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신앙이 한데 엮여 있는 말씀이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이고, 하나님께서 이런 자연을 아끼신다는 표현은 오늘 본문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이 담고 있습니다.

물론 이 신앙에는 구약성경이 가지고 있는 반 제국적인 성향도 엿보입니다. ‘너희들은 너희 신을 믿으며 강한 척 하지만, 너희 역시도 우리 하나님께서 만드신 존재일 뿐이다. 심지어 너희가 믿고 있는 그 신들은 우리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일 뿐이다.’ 이런 구약성경의 반 제국적 정서도 분명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에

지금까지 드린 말씀은 창조 신앙의 변화와 흐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만 아니라 내 적들도 만드셨으며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만물을 만드셨고 그 모든 것을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구약성경의 이런 생각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사랑하는 말씀인, 마태복음 6장 31-32절 말씀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 말씀 어디에 창조와 관련된 것이 있을까 싶으시겠지만, 창조와 관련된 말씀은 이 앞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말씀을 전하시면서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말씀하셨습니다.

“공중의 새는 우리가 심지도 먹이지도 않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을 기르신다. 들의 백합화는 수고도 길쌈도 하지 않지만 솔로몬의 모든 영광보다도 아름답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조차도 이렇게 입히신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을 그저 창조에 관한 신앙적 개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난주에도 말씀을 나눴듯이 예수님께서는 머리로만 신앙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신앙은 언제나 실천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함께 보았지만, 요한복음 13장 3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속한 존재가 우리뿐이라면, 우리는 우리끼리만 사랑하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내가 미워하는 사람,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 나를 힘들게 만드는 사람까지도 창조하셨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그들까지도 사랑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자연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이 자연을 사랑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믿는 것은 이 세상의 시작에 하나님께서 계셨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을 아끼고 지키고 사랑하신다는 점을 믿는 것입니다. 또 이러한 창조를 믿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모든 것을 나 역시도 사랑하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창조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최근 EBS에서 다시 방영되고 있는 ‘밥 로스의 그림을 그립시다’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밥 아저씨라고도 불리는 ‘밥 로스’ 씨는 그림을 너무 쉽게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이 분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게 되는 이유는 이 분이 그림을 그리면서 툭툭 내던지는 말들에서 많은 깨우침을 얻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이 분이 그림을 그리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항상 밖에 나가서 꽃과 나무를 바라보세요. 때로 이들과 대화를 나눠보세요. 그들과 친구가 되어보세요.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보면 꽃과 나무와 연못과 산과 구름의 모습이 내 마음속에도 그려지게 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안 보고도 그 모습을 상상해서 그려낼 수 있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분은 그림 실력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자연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이 사랑하는 자연의 모습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얼마 전에 연기자이신 ‘이대연’ 씨와 인터뷰를 한 일이 있습니다. 제 페이스북에도 그 내용을 쓰긴 했습니다만, 이분께 어떻게 그렇게 다양한 사람의 연기를 잘 하시냐고 묻자 해주신 이야기입니다.

“저는 길 가다가도 여러 사람의 모습을 지켜볼 때가 있습니다. 때때로 길에서 다투고 계신 아저씨들을 볼 때가 있는데, 두 사람이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주장하는 바가 전혀 다르죠. 저는 이런 모습들을 계속 바라보면서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하고, 그것을 제 연기로 표현합니다. 어쩌면 연기자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인거 같습니다.”

밥 로스 화가나 이대연 연기자나 자신이 선택한 직업 속에서 그 직업에 맞는 대상을 사랑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 앞에 붙어있는 직업명이 그러한 삶을 살아가도록, 어떤 대상을 사랑하도록 이끌어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붙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나에게 붙이려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와 관계없다고 생각되는 존재를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창조를 믿는 신앙입니다.

창조 신앙은 이 세상의 기원이 무엇인지 가르쳐주는 지식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사랑하심을 깨닫고 우리도 그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고백이고 다짐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씀을 ‘나를 사랑하셨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만물을 사랑하심을 깨닫고 나도 그 사랑을 실천하며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겠다고 다짐하며 살아가는 일이 창조 신앙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도 함께 실천합시다. 우리도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사랑합시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에게 더욱 큰 사랑으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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