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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첫 주, 『혁명 노트』를 펼치다!(사 60:15-22; 갈 3:15-22; 눅 1:5-25)

기사승인 2020.11.27  17: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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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림절 첫째 주일(11월29일)

1. 기다림과 소망의 촛불을 켜라!

▲ 대림 첫주, 기다림과 소망의 촛불

아기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를 기다리는 대림절(Advent)이 시작되었습니다. 비록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새롭게 바뀐 절기에 성찬예식을 함께 하지는 못하지만, 이 시간 이제 평화의 왕으로 오실 아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위로받기를 원하며 또한 힘들었던 2020년 한해도 시간의 책장 속으로 들어가 추억 속, 아련한 한 장의 사진으로 남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는 대림절 첫째 주일에 ‘기다림과 소망의 촛불’을 밝힙니다. 온 세상이 죄로 인하여 소망을 잃었을 때,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소망하며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렇게 기다림과 소망의 촛불을 켜는 것입니다.

작년 대림절 첫째 주일 설교 제목을 보니, ‘힘든 계절, 겨울이 다가오다!(단 3:13-28; 계 18:21-24; 마 10:16~33)’였습니다. 예상은 하지 못했는데, 말씀 제목 그대로 힘든 계절이 다가와서 한 해 동안 많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대림절 첫 주 말씀은 소망의 말씀입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은 세례 요한을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며, 또한 서신서 말씀을 통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약속을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구약의 말씀을 통해서는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원히 땅을 차지 할 것이라고 축복하십니다. 작년 대림 첫 주와는 전혀 다른 희망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 3차 팬더믹이 시작되었지만, 곧 치료제와 백신이 개발된다고 합니다. 힘들지만 조금만 더 인내하고, 기다림과 소망의 촛불을 켜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2. 세례 요한,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할 자

먼저 복음서 말씀을 살펴볼까요? 세례 요한의 출생을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은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선지자입니다. 아버지는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 사가랴이며 어머니 역시 제사장 아론 가문의 자손인 엘리사벳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아버지, 어머니가 장로님이거나 목회자 가정인 것입니다. 말씀을 보겠습니다.

▲ 가브리엘 천사를 만나 요한의 아버지 제사장 사가랴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눅 1:5) 그리고 이 두 부부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 의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많았습니다.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눅 1:6-7)

다윗 시대 이후부터 제사장들은 24반열로 나누어 각 반열의 순서대로 1년에 한 주간씩 2회를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사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아비야 반열은 8번째에 해당이 되었는데, 사가랴가 이렇게 순서대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 때였습니다.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 새,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눅 1:8-14)

주의 사자가 나타나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 요한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태어날 아기 요한에 대한 예언이 천사로부터 이어집니다.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공동번역: 올바른 생각)’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눅 1:15-17)

여기 나실인(‘거룩하게 되는’, 또는 ‘분리된’이라는 의미) 규례가 나오죠?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는데, 문익환 목사님의 『히브리 민중사』 (정한책방, 2018)에 보면, 포도주로 대표되는 농경문화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의 농경문화를 부정하고, 아벨의 유목 문화 전통에 서 있는 것입니다. 곧 히브리 민중전통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히브리인들의 노예 해방전통에 서 있는 이들이 바로 나실인이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러자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눅 1:18) 그러자 천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눅 1:19-20)

가브리엘 천사는 ‘하나님의 사람(혹은 하나님은 강하시다)’이라는 뜻입니다. 미가엘, 라파엘과 함께 대천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가브리엘 천사는 오늘 본문에 한번, 그리고 처녀 마리아에게 또 한번(눅 1:26-27), 이렇게 신약 성경에서는 두 번 나타나고, 구약 성경에서는 다니엘에게 두 번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합니다(단 8:16, 9:21). 미가엘 천사가 전사(戰士)의 이미지로 묘사되는 반면, 가브리엘 천사는 중재자나 꿈 해석자로 나타납니다. 가령 다니엘에게 나타나 벨사살 왕이 본 환상인 ‘숫양과 숫염소의 환상’에 대한 의미(숫양은 메대, 바사이고, 숫염소는 헬라 제국)를 설명하며,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 일흔 해에 관한 예언(칠십년 동안 포로로 바벨론 왕을 섬기고, 칠십 년이 차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것)을 풀이해 준 것(렘 25:11, 29:10 참조)이 바로 꿈 해석자의 역할입니다. 아무튼 밖에서 제사장을 기다리는 백성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전 안에서 지체함을 이상히 여기더라. 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하는 대로 있더니,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눅 1:21-23)

직무의 날 동안에는 집을 떠나서 성전 벽에 건물을 지어 만든 작은 침실에서 지내게 됩니다. 아무튼 사가랴가 직무의 날이 다 되어 집으로 돌아 간 이후, 엘리사벳이 잉태를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눅 1:24-25)

이렇게 세례 요한이 태어나게 됩니다. 그는 가브리엘 천사의 예언대로,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푼 것이 그 예입니다. 또한 엘리야의 정신과 능력을 가지고 주님보다 먼저 와서, 아버지와 자식을 화해시키고 거역하는 자들에게 올바른 생각(의인의 슬기), 곧 정의로운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 주님을 맞아들일 만한 백성이 되도록 준비하였습니다.

3. 율법의 완성자이자, 폐기자이신 예수님

이렇게 예수님을 예비한 사람도 있지만, 다른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율법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초등교사(παιδαγωγος, 갈 3:24)’로 설명합니다. ‘파이다고고스’는 개역 성경에는 ‘몽학선생(蒙學先生)’이란 용어로 번역되었죠? 몽학이라는 말은 ‘어린 아이의 학문’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 시대나 로마 시대에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종의 가정교사를 뜻합니다. 물론, 우리나라 조선시대 때도 어린 아이들에게 천자문부터 시작하여 유교의 기초를 가르치는 일을 한 선생을 몽학훈장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무튼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한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오늘 서신서 본문 말씀이 그것을 잘 설명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 그리스 시대 초등교사인 파이다고고스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5-16)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한 약속이 있는데, 그 약속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언약은 율법보다 앞선 것이고, 율법은 이 언약을 페기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갈 3:17).” 아브라함 이후, 사백삼십 년이 지나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죠? 아브라함과의 언약이 먼저이고, 모세의 율법은 나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하나님께서 직접 맺으신 약속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갈 3:18).” 그렇습니다. 이렇게 정리한 후에, 바울은 율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 3:19).” 그렇습니다. 율법은 우리의 범죄함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통해 범법함으로 하나님께서 중보자인 모세에게 준 것이죠? 그러나 이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효력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가 되는 동시에 ‘율법의 폐기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씀이지만 바울의 말을 계속 들어 볼까요? 공동번역으로 보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약속은 중재자를 내세우지 않고 하느님 한 분의 생각으로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하느님의 약속과 반대되는 것이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사람에게 주어진 율법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이었다면 사람은 율법에 의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온 세상이 죄에 갇혀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만이 그 믿음으로 약속된 선물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갈 3:20-22)

무슨 말씀입니까? 율법을 통하여는 죄를 깨닫는 것이고, 율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 믿음으로 약속된 선물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을 넘어서는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율법을 스스로 완성하심으로 율법의 폐기자가 되신 것입니다.

4.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원히 땅을 차지하리니

이제 예수님께서 오시면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의 종노릇 하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갈 3:25)”기 때문입니다. 오늘 구약 본문인 이사야 말씀이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가 됩니다. 먼저 말씀을 볼까요?

“전에는 네가 버림을 당하며 미움을 당하였으므로 네게로 가는 자가 없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를 영원한 아름다움과 대대의 기쁨이 되게 하리니, 네가 이방 나라들의 젖을 빨며 뭇 왕의 젖을 빨고,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사 60:15-16)

물론 이사야 60장 말씀은 제 3이사야, 곧 바벨론 포로에서 다시 고향인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예루살렘 이사야’의 말씀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예레미야나 다니엘에게 예언하였던 70년 바벨론 포로 생활을 끝내고 다시 유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맞을 궁극적인 승리와 영광, 그리고 최후 승리라는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그 승리의 말씀을 볼까요?

“내가 금을 가지고 놋을 대신하며 은을 가지고 철을 대신하며 놋으로 나무를 대신하며 철로 돌을 대신하며 화평을 세워 관원으로 삼으며 공의를 세워 감독으로 삼으리니, 다시는 강포한 일이 네 땅에 들리지 않을 것이요, 황폐와 파멸이 네 국경 안에 다시 없을 것이며 네가 네 성벽을 구원이라. 네 성문을 찬송이라 부를 것이라.”(사 60:17-18)

이제 다시는 포로 살이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사 60:19-20)

하나님께서 영원한 빛이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슬픔은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원히 땅을 차지하리니,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사 60:21-22)

포로살이했던 그 연약한 나라가 이제 강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세상입니다. 새로운 사회입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오셔서 만든 새로운 세상이며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만들어야 될 새로운 세상의 모습입니다.

5. 혁명노트

▲ 『혁명노트』와 저자 김규항

사회문화 비평가인 김규항 선생은 『혁명노트』 (알마, 2020)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안에 새로운 사회가 있는가?” 이렇게 그는 아기 예수께서 오셔서 만들었던 새로운 사회를 고민합니다. 그 새로운 사회가 『혁명 노트』 10개 장, 119개의 짧은 글에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김규항 선생이 그려내는 이러한 새로운 세상은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측면보다 정치경제적인 측면(특히, 자본주의 비판)이 강화된 ‘새로운 사회’입니다. 그 목소리를 들어볼까요?

“우리는 자본주의사회를 살아내는 일이 꽤 고단하지만 적어도 이전 사회보다는 낫다고 확신한다. 꼭 그렇진 않다. 13세기 영국을 기준으로, 농노는 주 31시간 노동했다. 오늘 식으로 말하면 농노는 하루 노동시간이 5시간쯤이고, 그 절반은 제 생산수단을 기반으로 자율적으로 노동하며, 주택이 무상 제공되고, 평생 고용이 보장된 정규직으로서 주택과 고용을 자식에게 물려주었다.”

지금보다 옛날이 그나마 노동자 농민들에게 좋았다는 말입니다. 물론 의료 환경이나 생활의 편리함에 있어서는 다르겠지만, 아무튼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에 관해 김규항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착취는 자본주의에서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일이다. ‘착취 없는 세상을 바란다’는 말은 실은 ‘자본주의 폐지를 바란다’는 뜻이다. … 자본가가 이윤 추구와 축적 활동을 무한 반복하는 이유는 그가 한 인간이기 이전에 ‘인격화한 자본’이라는 데 있다. 자본가의 영혼은 자본의 영혼이다.”

그리고 이런 예를 하나 소개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부자라는 제프 베조스(Jeff Bezos)의 2019년 현재 자산은 170조원이다. 1년 임금 1억 원인 사람이 제 임금을 한 푼도 안 쓰고 170만년 모아야 하는 돈이다. 베조스가 그 돈을 다 쓸 수 있는가, 혹은 그 돈이 진짜 필요한가는 자본가로서 그의 활동과 무관하다.”

지난 20여 년간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가장 삐딱한 태도로, 제일 가지런한 글을 써온 일급 논객다운 글입니다. 한때 김규항 선생은 자기 사상의 시작과 현재를 “예수에서 출발해서 마르크스로 보완했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의 가장자리를 살피려는 김규항은 글은 날카롭습니다. 계속해서 김규항의 말을 들어봅시다.

“전통적 노예제 사회에서 전체 인구 가운데 노예 비율은 30퍼센트 가량이다. 자본주의사회는 국민, 시민, 인민 등으로 불리는 대부분의 사람이 임금 노예인, 극단적 형태의 노예제 사회인 셈이다. …… 현재 자본주의 생산력은 대개의 사람이 적정한 삶을 유지하는 데 주 15시간 노동이면 충분한 수준이다. 그러나 ‘주 15시간 노동’은 여전히 꿈같은 이야기다. 왜 노동시간은 줄지 않을까?”

자,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요? 김규항 선생의 말입니다. 변화는 질문에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변화는 ‘질문의 재개’로 시작한다. 예컨대 다들 ‘인공지능과 로봇의 시대를 맞아…’라 말할 때,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에게 왜 필요한가? 인간이 그것들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것들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가?’ 질문이다. 다들 ‘인간의 노동이 필요 없어지는 세상을 맞아…’라고 말할 때 ‘모든 인간은 노동할 권리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줄어야 할 것은 일자리가 아니라 노동시간이 아닌가?’ 질문이다. ‘집이나 부동산이 사적 소유물이어야 하는가?’ ‘거대 독점자본(재벌, 대기업)은 공유되는 게 모두에게 좋지 않은가?’ ‘자본주의하에서 기후 위기를 막을 수 있는가?’ 잃어버린 질문들이 재개되고 새로운 질문들이 꼬리를 문다.”

결국 대안은 민중, 혹은 시민의 자기해방입니다. 바울의 ‘전선 바꿈(회심)’과도 같은 깨달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김규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혁명은 인민의 자기해방이다. ‘자기해방’은 개인이 혼자 힘으로 해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누구도 그럴 순 없다. 또 한 다른 사람이 나를 해방해줄 수 없다. 자기해방은 내가 해방의 주체라는 의미다. 억압 상태에 있는 나를 다른 사람들이 빼내 줄 수 있다. 그것은 ‘구출’이지, 해방은 아니다. 해방은 나를 억압하는 시스템 앞에 서는 일, 내가 그 안에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 앞에 서는 일을 씨앗으로 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더는 이렇게 살지 않겠다’는 결단에 이른다. 벼락같은 ‘메타노이아(metanoia, 회개)’의 순간이다. 메타노이아로 자기해방의 도정이 시작된다.”

김규항의 『혁명노트』에 이렇게 세밀하게 쓰여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김규항 식 ‘새로운 사회’를 포함한 새로운 세상, 곧 인간의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인 측면도 무시하지 않고, 관계적인 측면, 나아가 실존적이고 본질적인 측면도 무시하지 않는 그런 새로운 세상을 꿈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코로나-19 이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롭게 부상하는 표준인 뉴노멀(New Normal) 시대, 곧 새로운 정상은, 대림 첫 주를 맞아 왼 손에는 혁명노트를 펼쳐들고, 오른 손에는 기다림과 소망의 촛불을 밝히는 데서 시작될 것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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