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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매일이 정의로운 삶

기사승인 2020.11.24  17: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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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의를 빛나게 하십니다”(시편 37:1-9)

▲ 정신 온전하지 못했던 사울 왕을 위해 다윗이 수금을 타고 있었지만, 오히려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 ⓒGetty Image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많은 사름들이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고민하는 일들이나 괴로운 상황들이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도님들도 여전히 이렇게 생각하시나요?

우리의 인생에 고민거리나 힘든 일들이 없었던 적이 있던가요? 그렇기에 평안은 외부의 일들과 상관없이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내면에 주어진 평안을 누리기로 선택하면, 언제라도 우리와 함께 계신 성령께서 참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줄 믿습니다. 밖이 아니라 늘 내면을 주목 할 수 있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 평화를 심어 의의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평화의 씨앗은 거저 심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먼저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고, 낮아지고, 겸손해지며, 마음을 다해 선을 베풀 때 평화의 씨앗은 심겨집니다.

한 주간 저와 성도님들이 평화의 씨앗을 심기 위해 애쓰는 삶을 선택하다가 이 자리에 나왔을까요? 시편 126:5-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거둔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는 말씀처럼 포기하지 않고 평화의 씨를 뿌린다면 기쁨으로 열매를 거둔다는 이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요즘 코로나19에 감염되는 분들이 300명 단위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건강을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를 격상시켜야 한다는 이들과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격상시켜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심각한 상황입니다. 지역적으로는 바다의 상황 때문에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어려움을 문어 잡는 어민들이 겪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끝이 보이지 않는 어려움들이 찾아올 때 마다 우리는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힘들 때일수록 하나님을 바라보며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곁눈질로 다른 이들과 내 삶을 비교 하며 한탄하게 되는 일이 더 많아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보면 정직하게 일 한 사람들보다 부정직하게 일 한 사람들이 더 잘살아갑니다. 교묘하게 거짓말을 하고, 자기 잇속만을 챙기는 사람들이 오히려 잘살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삶이 눈에 들어오다 보면 지난날의 삶이 바보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되기도 합니다.

TV를 켜면 어떤가요? 부유한 연예인들의 집이 소개되고, 평생 가질 수 없거나 누릴 수 없는 또는 이룰 수 없는 삶의 모습들이 나열 되곤 합니다. 내 삶이 왜 이러나 싶기도 하고, 불공평한 세상에 분노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부모 잘못만나 내가 이렇게 살고 있나, 남편이나 아내 잘 못 만나 이렇게 되었나, 내가 그 때 그 결정만 안했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싶은 원망들이 올라오기도 합니다. 별의별 생각이 다 나는 거죠.

이처럼 어려움에 처할 때, 부정적인 마음들이 올라올 때, 한숨만이 쉬어질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태도로 살기를 원하실까요? 

오늘 1-2절의 말씀입니다. 새번역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악한 자들이 잘 된다고 해서 속상해하지 말며, 불의한 자들이 잘 산다고 해서 시새워하지 말아라. 그들은 풀처럼 빨리 시들고, 푸성귀처럼 사그라지고 만다.”

악한 자와 불의한 자라고 적혀 있지만 이 자리에 부유한 자, 세상에서 성공한 자를 대신 넣어도 의미가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부유한 자와 세상에서 성공한 자들이 악하거나 불의해서가 아닙니다. 성경은 세상에서 잘되고 잘사는 것에 대해 헛된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힘들 때 마다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뜻이 아닌 우리 자신만을 바라보게 되고 결국 길을 잃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바라봐야 할 삶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에 있다고 말합니다.

예레미야 22:13-16에서 여호야김 왕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13 “불의로 궁전을 짓고, 불법으로 누각을 쌓으며, 동족을 고용하고도, 품삯을 주지 않는 너에게 화가 미칠 것이다. 14 ‘내가 살 집을 넓게 지어야지. 누각도 크게 만들어야지’ 하면서, 집에 창문을 만들어 달고, 백향목 판자로 그 집을 단장하고, 붉은 색을 칠한다. 15 네가 남보다 백향목을 더 많이 써서, 집짓기를 경쟁한다고 해서, 네가 더 좋은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버지가 먹고 마시지 않았느냐? 법과 정의를 실천하지 않았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다. 16 그는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의 사정을 헤아려서 처리해 주면서, 잘 살지 않았느냐? 바로 이것이 나를 아는 것이 아니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이 이미 누리고 있는 부, 명성, 권력 따위가 우리가 애절하게 기도하면서 이루어야 할 최종 목표일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오늘 시편의 말씀처럼 이런 것들은 풀처럼 빨리 시들고, 푸성귀처럼 사그라질 것들입니다.

예레미야도 부, 명성, 권력 따위가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 형통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3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여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히 살아라.” 또한 이렇게 살 때 어떤 복을 누릴 수 있는지 시인은 4-5절에서 설명합니다. “기쁨은 오직 주님에게서 찾아라. 주님께서 네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신다.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네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신다. 주님께서 네 갈 길을 이루어 주신다.’는 이 말씀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합니다. 내가 교회 잘 다니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을 결국 이루어주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남들에게 말하지 않은 바램,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목적을 ‘마음의 소원’이라고 착각합니다. 사람을 의지 하지 않고 하나님께 더 예배드리고, 더 많은 시간을 들여서 기도하면 나의 길을 주님께서 이루어주시겠구나 착각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없이도 가질 수 있고, 이룰 수 있는 것들을 소망하고 있는 우리의 부끄러운 민낯이 드러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기쁨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찾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 기쁨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찾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왜요?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소원’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심어주신, 우리가 이 땅에서 진정으로 이루어야 할 목적입니다. 우리가 창조될 때부터 우리 안에 아로새겨주신 문신과 같습니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소원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2:13의 말씀을 보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오늘 말씀처럼 우리 안에 하나님의 소원을 두시고 행하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기도의 제목을 내놓습니다. 몇 분 또는 몇 시간을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만 우리는 중언부언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참 평안과 기쁨을 줄 수 있는지를 잊은 채 헛된 것만을 추구하며 기도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기에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라!’고 권면합니다. ‘나는 모릅니다.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고난과 괴로움 속에서도 가져야 할 믿음의 태도입니다. 내 목적과 내 길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럼 우리는 마음의 소원을 따라 기쁨을 발견하고 맛 볼 수 있게 됩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서는 ‘마음의 소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너의 의를 빛과 같이, 너의 공의를 한낮의 햇살처럼 빛나게 하실 것이다.” 의, 공의가 우리의 마음의 소원이고 하나님은 이 소원을 햇살처럼 빛나게 해주신다고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바꾸어 보자면,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겠죠. 이 마음이 우리의 마음의 소원이라고, 우리가 진실로 바라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3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여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히 살아라.” 우리의 어려움, 어두운 환경 등을 생각하면 우리 자신에 매몰되어 우리가 진정으로 관심 가져야 할 마음의 소원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도하면서 우리 안의 두려움을 몰아내야 합니다.

7절 이하의 말씀은 1-6절의 말씀을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7 잠잠히 주님을 바라고, 주님만을 애타게 찾아라. 가는 길이 언제나 평탄하다고 자랑하는 자들과, 악한 계획도 언제나 이룰 수 있다는 자들 때문에 마음 상해하지 말아라. 8 노여움을 버려라. 격분을 가라앉혀라. 불평하지 말아라. 이런 것들은 오히려 악으로 기울어질 뿐이다. 9 진실로 악한 자들은 뿌리째 뽑히고 말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반드시 땅을 물려받을 것이다.”

오랜만에 탁구장을 나갔습니다. 탁구 회원들 중에서 제가 실력이 가장 형편없기 때문에 게임을 해도 계속 지기만 합니다. 단식을 치다가 복식을 치게 되었는데요. 5판 3선승제에서 2:1로 저희 팀이 이기고 있었습니다.

4번째 세트 게임이 11:10 이어서 이제 한 포인트만 올리면 우리 팀이 승리 할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때 우리 팀원 분이 순간 신발 끈을 묶기 위해 몸을 숙였고, 상대팀에서는 이 장면을 못보고 서브를 넣었습니다.

저는 이 서브가 당연히 무효일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심판을 보던 선생님이 인 게임으로 간주하고 상대팀에 점수를 주셨습니다. 게임은 듀스가 되었습니다. 이 순간 제 마음에 분노가 확 올라왔습니다.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다음 서브가 들어올 때 냅다 탁구채를 휘둘러 버렸습니다. 공은 저 멀리 날아갔고 회원 분들이 “뭐야? 목사님 화났어?”라며 저를 달래주기 시작하셨습니다. 게임이 끝날 때까지 표정이 굳은 채로 탁구를 쳤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나니 제 행동이 너무 부끄러워졌습니다.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는데 그리고 또 다른 시각에서 보면 아주 공정하게 처리된 일이었는데. 회원들에게 온 몸으로 ‘나 열 받았다.’고 표출했다는 사실이 창피했습니다.

바로 회원 분들에게 사과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카톡 단체 방에 사과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것처럼 노여움과 격분과 불평은 순식간에 우리 자신을 잃게 만듭니다. 그리고 정신 차리지 못하면 이 감정들이 순식간에 악으로 향하게 합니다. 이런 사소한 일로도 얼마든지 우리는 쉽게 분노와 불평을 쏟아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물며 우리 자신과 가정의 어려움 또는 이익과 관련된 일이라면 얼마나 쉽게 분노, 격분, 불평을 선택하겠습니까? 힘들고 지칠 때일수록 남과 나를 비교하면서 쉽게 빠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눈이 뒤집히고, 눈에 보이는 게 없이 우리가 본래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오늘 시편의 시인은 우리의 이런 나약함을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타인을 보며 우리 자신을 잃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우리에게 심어주신 궁극적 관심,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때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삶을 잃지 않게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에게 심어주신 마음의 소원을 따라 살아가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소원을 이루어 가심으로 이 세상 속에서 우리를 빛나게 밝혀주실 줄 믿습니다.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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