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傍若無人(방약무인)

기사승인 2020.11.22  00:2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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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한복음 15:9-11)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남기신 마지막 명령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Getty Image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최근 며칠 동안 코로나 확진자 수가 계속 300명을 넘고 있습니다. 중앙방역대책본부나 감염병 전문가들은 지금 상태라면 12월 초에는 매일 600명이 넘는 확진자가 발생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정말 불안이 사라지지 않는 시기입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코로나가 다시 유행 중이고, 어떤 곳도 안전한 곳이 없는 상황입니다. 또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자기 자신을 포함한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시기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 어떤 말씀을 나눌 수 있을지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불안이 극대화되는 시기에 어떤 말씀이 우리를 위로할 수 있는지, 어떤 말씀에 힘입어 살아가야 할지 계속 고민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을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 신앙의 가장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또 너무나 많이 왜곡되어 해석되고 전달되었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왜곡되어온 말씀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서에 나오지 않는 말씀 묶음이 나타납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하시며 많은 이야기를 전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는 네 장에 걸친 긴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의 말씀도 그중 일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제자 중 한 사람이 자신을 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후에 시작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요한복음 13장 31-35절의 ‘새계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말씀입니다.

이 본문 다음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리라는 말씀을 하시기 때문에 13장과 14장이 다른 이야기로 보이기도 하지만, 13장 36절에 나오는 베드로의 질문,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질문도 다시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을 때, 예수님의 유월절 말씀은 13장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13장 1-20절에 나타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말씀도, 유다가 자신을 팔리라는 말씀도 예수님의 고별 말씀 속에서 모두 연결된 이야기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13에서 16장까지 이어집니다. 14장 마지막 절에 예수님께서 “여기를 떠나자”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다른 이야기로 전환되는 것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장소를 이동하셨는지 안 하셨는지 알 수 없지만, 15장에서는 13-14장의 말씀이 연결되어서 나타납니다.

17장에는 앞선 네 장의 말씀을 요약하는 예수님의 기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기에 13-16장은 하나의 말씀으로 볼 수 있고, 이 요약 기도문까지 합한다면,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유월절 말씀은 모두 다섯 장이 됩니다.

이 긴 말씀의 핵심은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속해 계시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 속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안에 속해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사랑, 기쁨, 평안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오해하거나 왜곡할만한 소지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와 함께 나타난 몇 가지 말씀들은 지금까지 상당히 이상한 방식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15장 18-25절과 16장 2-3절에는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받게 될 고난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15장에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리라는 말씀, 16장은 더 구체적으로 출교 당하게 되리라는 말씀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순간에 당신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해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고 있음을 잊지 말라고 하십니다.

간혹 이 말씀을 세상과 단절한 채 살아가도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사랑받지 않더라도 예수님의 사랑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런 생각은 맞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더라도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심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분명 요한복음은 교회가 박해 당하던 시절에 기록되었고, 박해의 시기를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적었습니다.

초대교회 때에 있었던 박해로 인해 ‘세상에서 미움 받는 일’을 세상과 단절해도 된다는 식으로 읽는다면, 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영생의 길, 구원의 길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과 단절해서는 이 일을 행할 수 없습니다.

세상과의 단절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너무 들어가려고 해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15장 1-5절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포도나무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참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그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버려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열매 맺음’은 마태복음의 ‘열매 맺음’과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마태복음이 복음전파의 결과를 ‘열매’라고 말한다면, 요한복음은 ‘예수님 안에 속하는 삶’ 자체를 ‘열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개념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열심히 전도하지 않는 사람은 불구덩이에 던져진다’는 식의 신앙으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불구덩이에 던져진다’라고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때 개신교는 상당히 공격적인 전도를 했습니다. 길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예수님 믿으라고 소리쳤습니다. 지금도 서울과 인천을 잇는 국철, 1호선에서는 그렇게 전도하고 계신 분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을 싫어하고 비난해도 자신의 전도 활동을 그치지 않습니다. 세상은 자신을 미워할지라도 예수님은 자신을 사랑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행동이 자신을 지옥불로부터 지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방식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집으로 오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 동인천으로 갈 때가 있었습니다. 동인천역 가까운 곳에는 항상 성경책 들고 교회 다니라고 애들을 붙잡는 아주머니가 계셨습니다. 어느 날 이 아주머니가 한 아이를 붙잡고 교회 다니라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저 성당 다녀요.”라고 말하면서 아주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가자, 이 아주머니께서 들고 있던 성경책을 그 아이에게 던지시면서 “지옥에나 떨어져라!”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런 모습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고 말해야만 합니다. 또 이런 모습을 보여 왔음에 사과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완전히 잘못 이해한 결과가 바로 이런 비참한 개신교의 모습입니다.

내 계명을 지키며, 내 안에 거하라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셨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무엇입니까? 이미 말씀을 시작하면서 전해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아주 간단한 것임에도 지금까지 교회가 하지 못하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전도에 열심을 내는 많은 개신교인이 착각하는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인데,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갈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영생의 길로 이끄는 것이 사랑이다.’라고 생각하는 점입니다. 이건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너보다 위에 있다고 여기는 교만일 뿐입니다. 이런 교만을 품고 복음을 전한다면 이는 방약무인(傍若無人)한 전도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마음은 사랑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아이에게 지옥에나 떨어지라고 성경책을 던지시는 아주머니의 모습 어디에 사랑이 있습니까?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성경이 우리의 경전이 맞다면, 전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아주머니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한 성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성도 같지 않은 성도를 만들어낸 교회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교회가 아닙니다. 장사꾼들의 소굴인 하나의 상점일 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너무나 추상적인 것이어서 어떻게 행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3장에서 유월절 고별 말씀을 전하시기 전에 실제적인 행동을 보이셨습니다. 바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사건입니다.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것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자신을 세 번 부인할 것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똑같이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어떤 제자라 할지라도 차별 없이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13-16장에 나타난 말씀들을 계속 보면 예수님께서 반복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5)”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15:10)”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님과 같이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되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결국 우리도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지치고 힘들면 나에게 도피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널 사랑하니까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살아가라는 말씀은 더더욱 아닙니다.

어떠한 순간에도 내가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의 힘으로, 내가 주는 평안함으로, 내가 주는 기쁨으로 다시 세상에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내게 등 돌린 세상 사람들에게 다시금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신앙의 핵심이 되는 말씀이고 어떤 순간에도 우리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도록 붙드시는 말씀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혼란스러운 세상, 경제 문제로 인해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잊지 않는, 그 마음을 잃지 않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참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께서 그의 품에 우리를 품어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를 품어주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처형을 앞둔 상태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평안을 받았다. 나는 기쁨을 받았다. 나는 사랑을 받았다. 그것을 이제 너희에게 준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굳게 서 있을 수 있는 평안, 기쁨, 사랑을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를 주신 것처럼 우리도 또다시 세상에 평안과 기쁨과 사랑을 전하기에 사랑의 선순환을 이루어가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시는 여러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과 평안이 온 땅에 퍼져나가게 될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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