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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론은 하나님의 값없는 사랑과 은혜의 원리에 기초한다

기사승인 2020.11.21  16: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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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혜의 선택의 교리 ⑴

▲ Stefan Lochner, 「Last Judgement」 (1435) ⓒWikipedia

이번 글에서 살펴볼 것은 ‘예정론’(21장-24장)입니다. 예정은 한마디로 다음과 같이 정의됩니다: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라고 부른다. 이 작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스스로 결정하셨다. 이는 모든 사람이 같은 상태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생이 예정되며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원한 저주가 예정되기 때문이다”(III.xxi.5).

그래서 예정론은, 칼빈도 동의하듯이,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문제로 여겨지기도 합니다(III.xxi.1).

예정론에 대한 반대와 칼빈의 반박

그들이 예정을 반대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들이 아직 아무 죄도 짓지 않고 그를 노엽게 한 일도 없는데” 영원 전에 독단적으로 어떤 사람들은 선택하고 어떤 사람들은 거부하셨다고 말하는 이런 교리는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든다고 반대합니다(III.xxiii.2). 또 다른 사람들은 모든 것이 지금 이곳에서의 삶의 행위와 무관하게 이미 결정되었다고 말하는 이 선택교리는 사람들에게서 죄책과 책임감을 제거할 뿐이라고 말하며 반대합니다(III.xxiii.6, 8). 또 어떤 사람들은 비슷한 이유로 그것이 고결하게 살고자 하는 열의를 말살한다는 이유로 반대하고(III.xxiii.12), 마지막으로, 그것이 모든 충고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구실로 반대합니다(III.xxiii.13).

그러나 칼빈은 “경건한 마음으로 선택과 예정에 대해서 바른 길을 따라 생각”할 때, 저 반대자들을 놀라게 하는 “그 흑암 속에서 이 교리의 유용성뿐 아니라, 그 심히 향기로운 열매까지도 알려진다”(III. xxi.1)고 주장합니다. 사실 우리는 앞에서 이미 칭의론을 다룰 때, 칼빈이 그의 칭의론을 예정의 토대 위에 세웠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공로와 무관하게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운 뜻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이고, 따라서 예정론은 우리의 구원의 주체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런데 칭의론은 그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주로서 믿고 고백할 때, 그를 우리의 의로서 받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칼빈은 이렇게 칭의론을 예정론의 토대 위에 세움으로써 로마교회의 공로사상을 효과적으로 반박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 선택과 예정에 대해 말하면서 이 교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한없는 자비와 은혜를 드러내는 교리인지를 해명하려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 예정론을 1559년의 최종판 이전까지는 제1권 ‘신론’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함께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최종판에서 그는 제3권 ‘구원론’의 일부로서 다루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칼빈 학자들은 이것을 매우 의미 있는 전환으로 간주합니다. 왜 이러한 배치를 했는가. 그것은 그가 예정교리를 신론에서 다루는 것보다 구원론에서 다루는 것이 훨씬 더 적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3권 전체를 통해서 칼빈은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하게 되는지를 다룹니다. 그런데 예정론은 창세 전에, 우리가 어떠한 공로나 업적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시는 사랑”(III. xxi.5)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전합니다. 따라서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다루는 구원론에서 보다 예정을 탁월하게 묘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어떻게 이것이 은혜의 교리이고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로서 이해될 수 있는지를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예정론은 ‘은혜론’이다

칼빈이 이 교리를 다루고자 한 것은 그것이 성경적이라는 사실 외에도 또한 그가 목회현장에서 실제로 부딪친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첫 번째 신앙문답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됩니다:

“복음의 말씀은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도록 부른다. 그러나 불신앙에 의하여 눈이 멀었고 마음이 완고해진 사람들은 그와 같은 은혜를 경멸한다.”(1)

예정교리는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후에 『기독교강요』에서 그의 목회적 동기는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똑같은 복음이 똑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 전파되는데 왜 어떤 사람들은 믿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것일까?

그가 성경을 연구하면서 얻어낸 답은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을 선택 또는 결정하셨다(롬8:28-30, 9:6- 33, 엡1:4)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이 교리는 왜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믿고 또 다른 사람들은 거부하는가 하는 문제에 답을 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에게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와 은혜에 근거해 있다는 확신을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알기까지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의 원천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결코 충분히 또 분명하게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 영원한 선택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소망을 무차별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에게는 주시 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절하신다는 이 대조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명백하게 드러낸다(III.xxi.1).

칼빈은 바울 사도의 주장을 은혜에 의한 선택의 성경적 근거로 지시합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롬11:5-6). 칼빈에게 예정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III.xxi.5).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빚진 자이며 죄인이고,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된 인간을 자녀로 삼으시고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선택은 영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결코 이 선택을 되돌리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어리석음, 죄, 실수, 불신앙, 반역의 삶으로 일관하거나, 앞으로 계속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명백한 영원한 선택이 그 어느 것에 의해서도 결단코 흔들리거나 의심할 수 없는 우리를 위한 구원의 확실한 토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면 우리가 선하다거나 선행이나 공로가 있다거나 하는 질문이 생기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이 칼빈이 선택을 이신칭의 교리의 버팀목으로 생각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칼빈은 이 예정 교리가 지닌 두 가지 교육적 효과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예정 교리 이외에는 우리에게 올바른 겸손을 가르치는 것이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가를 진지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 없다”(III.xxi.1).

예정론 이해에 있어 네 가지 방해물

칼빈은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예정 교리를 이해하는데 있어 장애가 되는 몇 가지 문제들을 검토합니다. 첫째는 호기심입니다. 예정에 대한 논의는 그 자체가 이미 다소 곤란한 문제를 내포하는데, 칼빈은 이 호기심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고 위험스럽게 한다고 본 것입니다. 여기서 칼빈은 필요보다 더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하기보다는 경외하며, 경외함으로써 찬양과 영광을 돌리라고 권고합니다.

첫째로 예정을 탐구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의 성역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태연하고 자신만만하게 이곳에 뛰어 들어가는 사람은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며, 미로에 들어가 빠져나올 곳을 찾지 못할 것이다. 주께서 깊이 감추어 두기로 정하신 일을 사람이 마음대로 탐색하거나, 가장 숭고한 지혜를 사람이 영원 자체로부터 풀어내려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지혜를 이해하기보다는 경외하기를 원하시며, 경외함으로써 찬탄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에게 나타내시고자 하는 그의 비밀의 뜻은 그의 말씀을 통해서 제시하셨다(III.xxi.1).

칼빈은, 앞에서 여러 차례 확인한 바 있지만, 성경 이외에, 성경 말씀 밖에서 무엇을 생각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개혁파 신학은 성경 해설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말씀하는 것만을 따라갑니다. 그러니까 성경 밖에서 무엇인가 추론하고 사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확실한 지식은 다만 성경에서 얻을 수 있을 뿐이라고 단언합니다(I.v).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탐구할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인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확언하며, 혹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잘 모르는 점이 있다고 해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격려합니다.

“예정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알려주는 것 이외의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길 없는 황야를 걸어가려는 것이거나 또는 어두운 데서 무엇을 보려고 하는 것 못지않게 어리석다. 이 문제에 대해서 모르는 점이 있는 것을 우리는 부끄러워하지 말자”(III. xxi.1).

두 번째 위험성은 선택교리가 다소 난해하고 복잡한 문제가 있다고 그에 대해 일체 침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자들은 마치 암초를 피하듯이, 이 문제를 피하라고 할 뿐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이 점에서도 올바른 한도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지성에 관한 확실한 법칙을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성령의 학교이며, 여기서는 필요하고 유익한 지식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 동시에, 유익한 지식이 아니면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 경에서 예정에 대해서 밝힌 것을 신자들에게서 빼앗지 않도록 주의 해야 한다”(III.xxi.3).

세 번째는 무조건 예정교리를 악평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에 대해 칼빈은 그들의 불경건과 파렴치 때문에 우리가 제한을 받는다면, 그들이 문제 삼지 않는 신앙 문제는 하나도 없기 때문에, 믿음에 대한 가장 중요한 교리들을 숨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반박합니다(III.xxi.4).

마지막으로 네 번째 위험성은 예정론의 심리적 결과들에 우려하는 것입니다. 반대자들은 이 교리가 경건한 사람들에게 위험하다고 선동합니다. 왜냐하면 그 교리가 믿음을 흔들고 속마음을 어지럽게 하며 공포심을 불어넣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경건한 신자들 가운데도, 자신이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의 무리 속에 들어 있는지 여부에 대해 궁금해 하며, 혹시 자신이 유기된 자들에 속해있으면 어쩌나 하고 염려하는 자들이 의외로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지’ 예정론에 대한 반박

칼빈은 이렇게 서론적인 것들에 대해 말하고, 이제 여러 민족들 가운데 이스라엘의 선택에 대해 말하면서 선택교리 자체를 말하기 시작합니다. 우선 모든 신자가 유념해야 할 원칙은 “하나님께서 이 선택에 의해 어떤 사람은 구원에, 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하도록 예정하셨다”(III.xxi.1)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 대해서 흔히 제기되는 반론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의 공로를 미리 아시고 구원에 예정하셨다는 소위 ‘예지’ 예정론입니다.

이 주장은 어거스틴이 처음 주장한 견해인데, 그러나 그는 성경을 철저히 연구한 뒤에 그 주장을 철회하고 오히려 강력하게 반박했습니다(III.xxii.8). 칼빈은 어거스틴을 따라서 왜 ‘예지’ 예정론이 문제가 되는지를 여러 성구를 주석하며 논박합니다. 이것은 22장에서 자세히 설명됩니다.

여기서는 단지 성경이 예정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민족의 선택과 관련하여 예정을 다시 간략하게 정의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민족들이 있는데, 다른 백성들이 제외되고 마른 나무와도 같은 아브라함이라는 개인에게서 한 민족이 특별히 선택되었습니다. 그러나 왜 그들이 택함을 받았는가 하는 이유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모세는, 후세 사람들이 자랑하지 못하도록, 그들이 택함을 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사랑 때문이라고 가르칠 따름입니다(참고, 신4:37).

그리고 칼빈은 선택의 그 다음 단계로 이스라엘 안에서의 선택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서 어떤 사람은 버리시고, 어떤 사람은 그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렇게 이스마엘은 버림을 받고 이삭이 택하심을 받았습니다. 에서는 버림을 받고 야곱은 택하심을 받았습니다.

칼빈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가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이 이미 은혜가 값없이 주어지는 것임을 증명한다”고 주장합니다(III.xxi.6).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이나 아브라함, 그리고 이삭과 야곱은 버림받은 다른 민족이나 이스마엘, 그리고 에서와 달리 그렇게 탁월하거나 의로운 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선택에서, 특히 개인들이 선택되는 일에 대해서 칼빈이 각별히 설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자유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택의 작정이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신 사랑, 오직 저 사랑에만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하나님의 결정이 인간의 자격이나 미덕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칼빈의 칭의에 대한 주장과 모순이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만일 인간 안에 있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치 있는 것이 없다면, 필연적으로 선택의 원인은 인간 밖에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칼빈이 예정과 예지를 혼합하는 모든 이론을 거절한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만일 예정이 예지로 환원될 수 있다면, 즉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의 자격유무에 대해 미리 알고 있다면, 하나님의 결정은 그러한 자격을 갖고 있거나 갖지 못함에 의해 결정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결과 하나님의 결정은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결론은 논리적으로 존립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계속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 안에는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같이 인간 안에는 그들의 선택을 정당화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선택을 위한 근거는 다른 곳에서 발견되어야 합니다. 칼빈은 그 근거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합니다. 선택되는 것은 아브라함의 수중에 놓여 있었지만, 그 후손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썩은 지체로 인정되어 제외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을 배제하시고 아브라함의 후손을 선택하셨지만, 그들 가운데서도 많은 이들에게는 이러한 은혜가 거절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머리에 접붙임을 받아 결코 구원에서 제외되는 일이 없으므로 그들에게서 은혜의 더욱 위대한 힘이 나타”납니다(III.xxi.7).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신자들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은 자들이고, 그래서 구원에서 제외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내가 선택받았을까, 내가 구원받았을까 고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칼빈의 첫 번째 신앙문답은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목회적인 위로의 말과 함께 매우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는 한, 우리는 동시에 이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소유한 것이므로,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계획을 더 이상 캐물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이 반사되는 거울이요, 우리에게 영생을 확인시키시는 보증이시기 때문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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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존 칼빈/이형기 옮김, 『칼빈의 신앙교육서』(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1), 35.
(미주 2) Ibid., 37.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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