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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 코로나?, With 성령!: 하나님의 진노와 아들의 실망, 그럼에도 불구하고!(창 6:5-22; 롬 1:18-25; 막 7:1-18)

기사승인 2020.11.20  12: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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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절 열둘째주일(11월22일)

1.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사망의 길과 생명의 길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이제 삼위일체교회력 창조절기가 오늘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다음 주부터는 대림절기가 시작됩니다. 어린 양이신 아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는 절기입니다. 우리 교단이 사용하는 삼위일체교회력은 창조절부터 한 해가 시작되지만, 성공회, 감리교, 예장통합교단이 사용하는 ‘통상 축제력(RCL, Revised Common Lectionary)’으로는 대림절기 부터 한해가 시작됩니다. 우리 교회의 재정 시스템도 11월까지 한해를 마감하고 12월부터 새로 재정을 편성하죠? 아무튼 삼위일체교회력과 통상축제력의 차이는 성부의 창조로부터 한 해를 시작하고 성령강림절로 끝나느냐? 아니면 아기 예수께서 오시는 대림으로부터 한 해를 시작하여 성령강림절로 끝나느냐? 그 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창조절기를 지내며 특별히 추수감사주일이었던 지난 주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복음서 말씀을 통해서 지금 상황이 비록 어렵고 힘들더라도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는 위로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또한 구약 이사야 말씀을 통해서는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통해서는 마지막 날에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우리들의 목자가 되어, 저와 여러분들을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신다는 은혜로운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창조절기의 마지막 말씀은 조금 우울합니다. 구약 본문 말씀인 창세기를 통하여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창 6:5-6)”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약 본문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막 7:6b).”라고 안타까워하십니다.

서신서인 로마서에서 바울 사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악한 자들과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먼 이들을 바울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롬 1:21a)라고 꾸짖으며 이들의 생각과 마음은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b)라고 한탄합니다. 따라서 심판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대의 의인이요, 그 시대에 완전한 자이며 하나님과 동행한(창 6:9) 노아와 그의 가족은 구원하십니다. 창세기 본문 후반부의 말씀이 바로 그러한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앞에 사망의 길과 생명의 길이 놓여져 있습니다. ‘홍수의 심판’과 ‘방주의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실 건가요? 창조절을 마감하며, 또한 한 해를 마감하며 여러분들은 지금 어디로 가시려고 마음을 먹고 있나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설교 제목과 같이, 코로나 이후(After Corona) 시대에 성령께서 함께하심(With 성령)으로 하나님의 진노와 아들의 실망에도 불구하고 노아처럼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구약의 말씀부터 볼까요? 먼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시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 6:5-6) 그리고 이르시기를,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창 6:7)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당시 상황을 볼까요? 성경 말씀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개역개정은 너무 부드럽게 되어 있어 그 죄악상을 파악하기가 애매합니다. 공동번역으로 볼까요?

“하느님 보시기에 세상은 너무나 썩어 있었다. 그야말로 무법천지가 되어 있었다. 하느님 보시기에 세상은 속속들이 썩어, 사람들이 하는 일이 땅 위에 냄새를 피우고 있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상은 이제 막판에 이르렀다. 땅 위는 그야말로 무법천지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저것들을 땅에서 다 쓸어버리기로 하였다.’”(창 6:11-13)

무법천지가 되었습니다. 세상이 속속들이 썩어 땅 위에 더러운 냄새를 피우고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먼저는 이방인에게, 그리고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당이 됩니다. 따라서 서신서 본문 로마서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의 죄악’에 관해 언급합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을 만물을 통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그것을 알고서도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책망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18-21)

그들 이방인들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롬 1:22-23)”다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들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 속에 내버려 두십니다. 하나님을 떠난 서글픈 인생이죠. 말씀을 볼까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롬 1:24-25a)

결국 이렇게 피조물을 창조주 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3.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그리고 복음서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잘 믿는다하는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서기관들의 불의에 관한 예수님의 예리한 지적의 말씀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 것에 관해 종교지도자들이 비난하자, 예수님께서 오히려 종교지도자들이 ‘고르반 제도’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에 관해 지적하십니다. 말씀을 볼까요?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막 7:1-2).” 이어서 그 말씀에 대한 부연 설명이 이어집니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막 7:3-4)

팔레스틴은 먼지가 많기 때문에 눈병도 심하고 피부병도 심합니다. 따라서 밖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먼지가 날리지 않게 물을 뿌려야 합니다. 이러한 것이 ‘장로들의 전통(τὴν παράδοσιν τῶν πρεσβυτέρων, Tradition of the Elders)’입니다. 여기서 전통, 혹은 유전을 뜻하는 말인 헬라어 ‘파라도신’은 문자적으로 ‘대대로 손으로, 혹은 구두로 이어받은 것’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유대인들이 조상들로부터 구두로 이어받은 것으로, 당시 성문 율법이었던 모세 오경을 해설하거나, 새로운 상황에 적용시켜 만든 각종 구전 율법을 가리킵니다.

장로들의 전통은 마태복음 15장 2절과 오늘 본문 마가복음 7장에만 나옵니다. 대부분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논쟁을 벌일 때, 자신들의 정당성을 추구하기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가령, ‘안식일 논쟁’, ‘이혼문제논쟁(마 19:3-12)’, ‘정결례에 관한 논쟁(막 7:1-13)’ 등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장로들의 전통(유전)은 예수님 당시에는 구전(口傳)의 형태로만 있었지만, 기원후 200년경부터 문자로 집대성되기 시작하여, 800년경에는 탈무드의 형태로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렇게 장로들의 전통에 근거하여 예수님께 묻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막 7:5)”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 도다.”(막 7:6-9)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전통 가운데 인간의 전통, 교리를 중시한다고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그 전통과 교리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립니다. 중요한 본질보다 다른 형식이나 부수적인 것을 더 중시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교단의 큰 어른이신 장공 김재준 목사님의 글 가운데 1952년 경에 쓰신 ‘국경이 어디인가?’라는 글이 있습니다. 인용해 보겠습니다.

▲ 신문을 읽는 장공 김재준 목사와 한신대 신학대학원 장공기념관에 걸린 장공의 글씨
저녁 황혼에 손님 한 분이 찾아왔다. 나는 없는 숯을 피워 풍로 위에 갖다놓고 오신 용건을 물었다.
“나는 정통신학을 수호하는 데 목숨 바치기로 작정한 사람이오.”
처음부터 상기가 되어 다소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러십니까? 목숨까지 바칠 거야 있습니까? 노형께서 ‘이단’ 하신다면 ‘목숨’이라도 위태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정통’을 하시는 데야 무어라 하겠습니까? 안전한 기성세대이신데요!”
손님은 도사리고 앉으며 묻기 시작했다.
“도대체 당신은 ‘자유’를 말하며 ‘문호개방’을 언제나 부르짖고 있으니, 나라에도 국경이 있고 그 국민을 지키는 파수병정이 있어야 그 나라를 보전할 수 있는 것이지, 그저 ‘개방’만 하면 어떻게 된단 말이요?”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노형께서 말씀하시는 국경선은 어디 있습니까?”
“정통주의 신학이 국경선이지요.”
그는 한참 있다가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나라의 임금은 정통주의 학자겠습니다. 그려.”
“아니오. 임금이야 그리스도시지요.”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정통주의 신학을 내 나라의 국경선으로 삼아라.”하고 말씀하셨나요?”
“똑똑히 그런 말씀하신 것은 없지요.”
“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말씀하신 일이 없습니다. ‘남을 평론하지 말라. 형제의 눈의 티는 보고 네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셨습니다. 국경선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당신 머릿속에 그어놓은 것이요. 예수님이 그으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정통신학을 국경선으로 한다면 대체 감리교회는 예정설에 흥미가 없으니 국경 밖일 것이요, 성결교회도 구세군도 국경밖에 있는 ‘적’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친구를 만들라고 하셨는데 노형은 신학으로 원수 만드는 데만 열심이십니다. 그려! 그런데 도대체 정통신학이 무엇입니까?”

앞서 이 글이 1952년경 글이라고 소개했었죠? 7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전통 가운데 인간의 전통, 교리를 중시하는 신학, 교단, 교회가 지금 자기 외에 모든 것을 불의하다고 폄하하며 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개신교회가 타락해 갑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장공 김재준 목사님이 찾아온 손님에게 한 대답과 비슷하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막 7:10-13)

여기서 고르반(Κορβᾶν)이란 ‘하나님께 드린 헌물’이라는 뜻입니다. 이 제도는 정말 아름다운 헌신 제도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소유물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고르반으로 바쳐진 헌물은 아무도 손을 댈 수 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제도를 악용하는 것입니다. 가령 젊은 자녀에게 나이 든 부모는 공경과 공양의 대상이지만, 부모를 공경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이 고르반 제도를 악용합니다. 따라서 자신이 가진 땅이나 집이나 재물을 고르반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다 드려버렸으니, 부모님을 위해서 쓸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것은 이렇게 고르반으로 하나님께 받쳤던 헌물을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시면, 아니 부모님 모르게 다시 돌려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그 사람이 고르반 했던 헌물에서 얼마를 제하고 다시 돌려줍니다. 이렇게 고르반 제도를 악용하여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아가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죠?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러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을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막 7:14-16).” 이 말씀의 의미에 관해 제자들이 궁금해 합니다.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의 의미)를 묻”(막 7:17)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막 7:18)”라고 대답하십니다.

본질보다, 부수적인 것에 목숨을 건 종교인들에 대한 질책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처럼 예수님의 제자들도 깨닫지 못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한탄하신 것입니다. 지난주 말씀에 예수님께서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기도’를 소개하시며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셨죠?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그렇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지만, 그 마음은 딴 곳에 가 있습니다. 몸은 여기 예배당에 있어 하나님께 찬송하고 예배드리지만 마음과 생각은 딴 곳에 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이나,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 먹는 것이나,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고, 그 대신 사람의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포악하고 부패한 인간들과 또한 불의로 진리를 가로 막는 사람들을, 또한 입술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지만, 그 마음은 딴 곳에 가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4. 시계탑을 향하여 총을 쏘라!

이처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지금 세상은 썩어 버린 세상, 무법천지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말씀처럼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이 땅 위에 더러운 냄새를 피우는 것입니다. 땅까지 오염되어 타락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 인류가 이 지구촌을 위협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2017년 2월 독일에서 열린 ‘뮌헨 안보 컨퍼런스’는 ‘기후변화, 핵전쟁, 그리고 팬더믹’을 인류의 3대 위협 요소라고 합니다. 동시에 이것은 우리 인류가 만든 것이죠?

기후변화나 핵전쟁은 잘 아시는 것이고, 팬더믹(Pandemic)도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전염병’을 뜻하는 말로, 지금 코로나-19가 그 예입니다. 놀라운 것은 핵무기가 수백만 명을 죽일 수 있지만, 테러리스트가 바이러스를 활용한다면 수억 명도 죽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람을 죽이고 경제를 무너뜨리고 있죠? 반면 사람들의 활동은 줄어들어 기후는 조금 좋아졌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개발한 핵무기와 인간으로 말미암은 코로나 팬더믹의 포악함과 부패로 사람들이 땅을 오염시키고 사람들 간의 관계를 파괴하고 하나님 앞에 타락했습니다. 개역개정은 하나님께서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창 6:13b).”라고 말하지만, 공동번역은 “그래서 나는 저것들을 땅에서 다 쓸어버리기로 하였다(창 6:13b).”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말씀인가요?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입니까? 핵무기를 만들어 다른 사람을, 다른 나라를 힘으로 억누르는 사람과 나라가 문제입니다. 바로 로마의 평화, 곧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길입니다. 또한 자연을 파괴하고 개발을 일삼는 인간의 문명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세상을 뒤엎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불의한 현실을 뒤엎고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것이 바로 기독교 종말론입니다. 기존의 질서를 뒤엎고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 종말론처럼 급진적인 사상은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동학이나 원불교, 증산교 등 자생적인 민족 종교에서 ‘후천개벽사상(後天開闢思想)’을 말합니다. 우주적 시간을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으로 나누고, 현재 이전의 시대를 선천 시대로, 현재 이후의 시대를 후천 시대로 구분하여, 후천 시대에는 우주 및 인간사에 전면적으로 대변혁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사상입니다. 천지개벽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분명한 미래의 청사진을 제공함으로써 민중들에게 현세구원사상으로 큰 힘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기독교 종말론은 현대 정치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변주됩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당시, 사람들은 파리 시내 도처에 있는 시계탑을 향하여 총을 쏘았습니다. 시계탑이 무슨 죄인가요? 그러나 시계탑을 향한 시민들의 동시다발적인 총격을 통해 종말론의 참 의미를 읽어낸 철학자 발터 벤야민(W. Benjamin)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계탑을 향하여 총을 쏜 것은 역사의 연속성을 폭파시키고자 하는 혁명기 시민들의 무의식적 집합행동으로, 진정한 혁명은 무한 반복되는 ‘동질적 시간 연쇄’를 가차 없이 파괴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민중의 자각이다.”

그렇습니다. ‘동질적 시간 연쇄’, 곧 ‘동일한 시간의 반복’을 깨뜨려 버리는 것이 바로 종말입니다. 따라서 구약성서 묵시문학에 등장하는 종말론은 폭력과 참상으로 얼룩진 현행 질서가 무너진 뒤, 심판의 시간과 함께 다가올 새로운 세계에 대한 유토피아적인 열망을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불의한 현실에 대한 시대적 요청으로 등장한 종말론은 뿌리부터 급진적입니다.

따라서 불의한 현실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은 개혁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입장에서 10년 전이나, 50년 전이나, 아니 이들 풀뿌리 민중들의 삶은 100년 전이나, 1000년 전이나 똑같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반복되고 빈곤이 세습되는 이러한 현실 앞에서 희망은 유예되고, 지옥 같은 시간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지속됩니다. 따라서 시계탑을 향하여 쏜 총알은 이러한 일상화된 고난의 연쇄를 끊어 버리는 파국의 시작, 혹은 희망의 종소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누가, 무엇으로, 언제 이 불의한 연쇄 고리를 끊어버릴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새 하늘 새 땅은, 자신이 누구인지, 또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언제 시계탑을 향하여 총을 쏠지를 아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을 것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시계탑이 아니라, 반복되는 불의한 체제를 향하여 총을 -물론, 다른 어떤 것도 가능합니다만- 쏘는 사람들, 바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재창조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그 사건과 사람, 그리고 그 때를 노아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5. ‘After 코로나?’, ‘With 성령’을 통해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곧, 구약 말씀에 나오는 노아를 통해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창 6:8-10).” 이러한 노아에게 하나님께서는 방주를 만들라고 명하십니다.

“너는 고페르 나무(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1규빗은 팔꿈치에서 손가락 끝까지로 약 45cm),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창 6:14-16)

▲ 방주의 크기

이렇게 방주를 만든 후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창 6:17).”고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노아와 그 가족, 혈육 있는 모든 암수생물 한 쌍씩은 그 생명을 보존하도록 이끄십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창 6:18-20)

또한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에서 홍수 기간 동안 삶을 유지하기 위해 양식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너는 먹을 모든 양식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먹을 것이 되리라.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창 6:21-22).” 이렇게 낡아버린 세상이 심판을 받고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 새로운 세상에서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만을 찬송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도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 1:25b)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코로나 이후의 시대, 곧 ‘위드 코로나(With Corona)’의 시대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성령과 함께(With 성령) 지금 우리를 기다리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방주를 통한 생명의 길과 홍수를 통한 심판의 길을 펼쳐놓고 지금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표리부동(表裏不同)하지 말고, 진실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실 준비를 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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