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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글, 오명걸, 누구보다 한국의 고난 받는 이들을 사랑했다

기사승인 2020.11.20  12: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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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난함께 조지 오글 목사에 대한 추모글 발표

▲ 조지 오글 목사의 별세 소식에 고난함께가 발표한 추모글 ⓒ고난함께 제공

노동운동이라는 단어 조차도 모르던 시절 고통당하던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 산업선교회를 조직하고 박정희 독재정권의 인혁당 조작사건을 폭로해 강제 추방 당하는 등 한국 노동자들의 인권 향상과 민주화운동을 지원했던 조지 오글(한국 이름 오명걸) 목사가 지난 15일 미국 콜로라도에서 향년 91세로 별세했다.

조지 오글 목사와 조화순 목사, 한국 노동운동의 시작

조지 오글 목사는 미국 연합감리교회 선교사로서 1954년 부인 도로시 오글과 함께 한국땅을 처음 밟은 뒤 20년간 산업선교 활동을 펼쳤다. 특히 인천도시산업선교회를 설립해 노동자의 권리인 노동법에 기반한 교육프로그램을 시작하는 등 노동자들의 인권옹호에 앞장섰다. 이 과정에서 감리교 조화순 목사와 함께 인천에서 노동자 교육과 운동을 이끈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일화이다.

조화순 목사가 감리교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두 번째 사역지였던 시흥의 달월교회에서 목회를 하며 안수를 받았던 1966년 어느 날, 조지 오글 목사와 함께 온 조승혁 목사가 인천지역에서 산업선교회 일을 같이 하자고 제안하면서 한국 노동운동의 첫 장이 열린 것이다. 인천산업선교회를 통해 직접 노동현장을 체험하는 산업선교 실무자들이 배출되면서 인천은 그야말로 노동운동의 장이 되었다. 조지 오글 목사와 조화순 목사는 그야말로 한국 노동운동의 첫 사람들이었다.

조지 오글 목사, 조작된 인혁당 사건을 세계 알리다

조지 오글 목사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또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미국·캐나다 선교사들 모임인 ‘월요모임’에 소속돼 선교사로 활동했다. 박정희 정권의 감시대상이 된 오글 목사는 1974년 11월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양심수들을 위해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서 목요기도회에 참석해 사건이 조작된 사실을 알리고 피해자와 가족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는 곧바로 중앙정보부에 붙잡혀가 심문을 당하고 ‘빨갱이’라는 거짓 자백을 강요받았다.

이런 사실이 미국의 저명한 <뉴욕타임즈>에 보도되면서 파장이 커지자 박 정권은 오글 목사에게 강제 추방 명령을 내렸다. 명동성당에서 열린 인권회복기도회에 가다가 체포된 그는 12월 14일 아침 출입국관리소로 끌려가 다시 한 번 조사를 받은 뒤 그날 저녁 미국행 비행기에 태워졌다.

▲ 조지 오글 목사가 1974년 인혁당 사건 고문 조작설을 제기했다가 미국으로의 강제 추방명령을 받은 후, 경수 도시산업선교회 회원들과 오글 목사 가족이 모여 항의 예배를 드릴 때의 모습이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조지 오글 목사의 부인, 맨 오른쪽이 조화순 목사다. ⓒGetty Image

이듬해 4월9일 새벽 박 정권은 ‘인혁당 사건’ 선고공판 18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8명을 사형시키는 ‘사법 살인’을 감행했고, 그 가족들마저 ‘빨갱이’ 낙인으로 사회에서 철저히 매장시켰다. 이에 오글 목사는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인혁당 사건의 진실을 알리는 운동에 앞장섰다. 미 의회 청문회에 출석, 관련 증언을 하고, 한인 민주화단체와 함께 강연 등을 통해 한국의 인권 실태를 알렸다.

고난함께, 조지 오글 목사의 별세 소식에 추모글 발표

이렇게 한국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아꼈던 조지 오글 목사의 부음에 에큐메니칼 사회운동 단체들은 저마다 안타까움을 표현하며 추모의 글을 내놓고 있다. 특히 조지 오글 목사가 그랬듯이 한국 사회의 고난 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모임’(사무총장 진광수 목사, 이하 고난함께)에서도 추모의 글을 발표했다.

고난함께는 추모글에서 먼저 조지 오글 목사의 별세 소식에 “깊은 상실감을 느낀다.”고 언급했다.

이어 조지 오글 목사의 공적을 열거하며 그의 삶이 한국 사회를 위해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도 설명했다.

조지 오글, 한국 이름 오명걸. 벽안의 이방인이었으나
한국과 한국의 고난 받는 이들을 너무나 사랑하였던 사람,
가난한 노동자들의 곁에서 버팀목이 되어준 사람,
‘인혁당’ 사법살인을 세상에 알린 사람,
조승혁, 조화순,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일꾼들을 길러낸 사람,
우리는 당신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빚을 졌습니다.

이어 조지 오글 목사가 추방되어 탑승한 비행기의 스튜디어스를 통해 전해진 이름 모를 청년의 편지글도 소개했다.

“오글 목사님, 안녕히 가십시오. 저는 한 젊은이입니다.(제 이름을 쓸 수 없습니다.)
저희 대부분은 목사님께서 저희 나라의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일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저희 마음도 목사님과 함께 울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이름은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상황은 변할 것이며 머지않아 목사님께서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
한국으로 초청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발 건강하십시오.”

고난함께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조지 오글 목사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전했다.

당신의 유산들이 흘러흘러 지금의 우리에게까지 전달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당신이 갔던 작은 예수의 길을 
따르겠습니다. 부디 그곳에서 평안하시길 기도합니다.

다음은 고난함께 발표한 조지 오글 목사에 대한 추모글 전문이다.

조지 오글, 오명걸, 작은 예수를 추모하며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우리는 오늘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깊은 상실감을 느낍니다. 
조지 오글, 한국 이름 오명걸. 벽안의 이방인이었으나 
한국과 한국의 고난 받는 이들을 너무나 사랑하였던 사람, 
가난한 노동자들의 곁에서 버팀목이 되어준 사람, 
‘인혁당’ 사법살인을 세상에 알린 사람, 
조승혁, 조화순,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일꾼들을 길러낸 사람, 
우리는 당신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빚을 졌습니다.
추방되던 날, 비행기에서 스튜어디스를 통해 전해진 
모르는 청년의 편지글이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오글 목사님, 안녕히 가십시오. 저는 한 젊은이입니다.(제 이름을 쓸 수 없습니다.) 
저희 대부분은 목사님께서 저희 나라의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일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저희 마음도 목사님과 함께 울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이름은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상황은 변할 것이며 머지않아 목사님께서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 
한국으로 초청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발 건강하십시오.”

당신의 유산들이 흘러흘러 지금의 우리에게까지 전달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당신이 갔던 작은 예수의 길을 
따르겠습니다. 부디 그곳에서 평안하시길 기도합니다.

2020년 11월 19일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모임

이정훈 typology@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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